차마 기사를 두 번 읽을 수 없었다.
머리는 꼼꼼히 챙겨볼 것을 재촉했지만, 마음은 따르지 않았다. 두 눈은 먼 산에 박혀버렸다. 내용은 단순했지만, 그 충격은 쉽게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력한 이를 유린하는 차별과 배제, 공포와 협박, 억압과 폭력 등 괴물의 온갖 속성이 우글거렸다.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의 숨겨온 속성이자, 나 자신의 맨얼굴이었다. 그 부끄러운 모습을 직시할 자신이 내겐 없었다.
이젠 ‘T’(티)라는 영문 이니셜로 남은 스무살 베트남 신부, 아직 학생 신분인 나의 딸보다 4살 어린 나이였다.
세상을 무채색으로 보는 법이 없고, 무지개색으로 그리는 나이,
꿈·사랑·희망 따위의 말들에 귀 기울이며, 그 눈은 바다 너머 아득한 미지의 땅을 응시하는 나이.
들꽃만 봐도 가슴이 설레고, 날아가는 새의 날개에 사연 하나씩 실어 보내는 나이,
그런 신부를 기만하고, 능욕하고, 폭력을 휘두르다, 그 가슴에 칼까지 꽂았다.
그건 미친 자만이 아니었다. 광기의 우리 속으로 던져지도록 방치한 우리 또한 공범이었다.
솔직히 부끄러움보다 앞서는 건 그 순간에도 발동하는 욕심이었다.
그날도, 그 후에도 나는 별일 없이 지냈다. 적당히 안타까워하고, 적당히 슬픈 척하고, 적당히 분노하고, 적당히 나무라다가, 때가 되면 하루 세끼 거르지 않았고, 술 몇 잔에 시시덕거렸으며, 가끔은 은밀한 일탈을 꿈꾸기도 했다.
그런 이중성과 허위의식이 부끄러웠지만, 그것이 드러남으로써 밀폐된 나의 평화가 흔들리거나 깨지는 것이 더 싫었다.
그러나 이 땅의 누이들, 그 누이의 누이들, 그보다 더 먼 누이들이 겪었던 일들까지 외면하거나 잊을 순 없는 일. 스무살 신부 ‘티’가 당한 오늘의 현실은 바로 엊그제 우리 누이들이 당한 현실이었다.
불과 20여년 전, 윤금이씨는 기지촌의 한 쪽방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가난은 윤씨를 기지촌으로 밀어넣었고, 윤씨는 그곳에서 이 땅을 탈출하기 위한 마지막 소망 곧 미국행을 꿈꾸었지만, 결국 그는 제국의 병사에 의해 몸과 영혼이 난자당한 채 이 세상을 떴다.
기지촌 여인으로서 더럽다 멸시를 받았지만, 그의 꿈마저 불결할 순 없었다.
그것은 멋도 모르고 47살의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팔려 온 티의 꿈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미스 킴, 미스 리는 동두천에서 부산에 이르기까지 텍사스촌마다 가득했으니, 그건 6·25전쟁이 이 땅에 조성한 막장이었다.
수많은 가난한 누이들은 군입 하나 덜고, 동생들 학교 보내기 위해 그곳에 몸을 던져야 했다.
그보다 앞선 세대의 누이들은 일제의 성 노리개가 되어 전쟁터로 끌려다녔고, 그보다 더 앞선 누이들은 중국에 공녀로 바쳐졌다.
민간에선 심청이처럼 쌀 몇 석에 팔려가기 일쑤였다.
소설 <감자>의 복녀는 그런 팔려가는 조선인 신부의 전형이었다.
단돈 80원에 무능력자에게 팔려 시집간 복녀는 먹고살기 위해 작업장 간부에게 몸을 팔았고, 감자 서리를 하다가 걸려 지주인 왕 서방의 애첩 노릇을 했고, 버림받게 되자 다툼 끝에 낫에 찔려 죽는다.
<감자>의 결말은 이렇다.
복녀를 죽인 왕 서방과 복녀의 남편 그리고 한방의사는 복녀의 사인을 뇌일혈로 하기로 담합한다.
왕 서방은 사례비로 남편에게 30원, 의사에게 20원을 건넨다.
지금도 통하는 고전적 수법이다. 티의 죽음도 그렇게 정리될까. 내가 티의 부모나 형제라면, 아니 그 이웃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작은 비석 하나 우리 가슴에 세우자. 스무살 신부의 짓밟힌 사랑과 꿈을 기억하고, 그것을 유린한 우리의 광기와 폭력, 차별과 무관심을 함께 기억하는 작은 비석.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석보다야 쉽게 잊히겠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우리 가슴속에 작은 별빛으로 빛날 것이니, 우리로 말미암아 고통받은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작은 연대의 표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