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50
1월29일[연중 제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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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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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wHGEeVws8s
[인천교구 김훈겸 요한보스코 신부님 집전 (포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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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우리는 부단히 건너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 부재 상태에서 주님 현존 상태로!>
갈릴래아 호수 동편에는 이방인들 가운데 게라사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던 돼지를 떼로 키우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더러운 영을 추방하는 능력을 발휘하셨는데,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주님 부재와 현존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다 보니 공동묘지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그에게 붙은 악령은 한둘이 아니라 수백, 수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악령의 이름이 특별하게도 군대였습니다. 한 사람 안에 수많은 악령이 들어있다 보니, 수시로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너무 폭력적이다 보니 발에 족쇄를 채우고, 손은 쇠사슬로 묶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답답하고 괴로웠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밤낮으로 무덤과 산으로 돌아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는 자해행위뿐이었습니다. 한 인간 존재가 주님 부재 시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공동체가 주님 부재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중심에 계셔도 부족한 판인데, 다양한 우상들, 이런저런 악령들이 떡 하니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부재하실 때, 즉시 그 자리에는 악한 영이 자리를 은근슬쩍 자리를 잡습니다. 그 순간 우리의 현실, 우리 공동체의 현실은 얼마나 음산하고 비참한지 모릅니다. 마치도 칙칙한 무덤 분위기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다 보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차하면 소리소리 지르고 으르렁댑니다. 별것 아닌 일에 핏대를 올리고 폭력이 난무합니다.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경우에는 사슬이나 족쇄가 필요합니다. 극한 분열과 대립으로 하루하루가 지옥입니다.
은혜롭게도 군대라는 악령이 들린 사람은 죽기 일보 직전에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악령 들린 사람을 가엾이 여기시어, 말씀 한 마디로 그에게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화되었습니다. 음산하고 칙칙한 죽음의 분위기에서 화사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로 즉시 반전되었습니다.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오늘도 우리는 부단히 건너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 부재 상태에서 주님 현존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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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왜 악령의 문제를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라고만 하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그 사람은 게라사 지방의 무덤에서 살던 이었습니다. 악령이 살게 만드는 곳이 무덤입니다. 악령은 예수님께 달려와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 사람은 말로만 들으면 분명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 명확히 알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솔직히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수치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힘에 눌린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고장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며 자신들을 돼지들 안에 들여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그 고장 사람들에게 아직도 할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들을 돼지들 안으로 들여보내십니다. 게라사 사람들이 돼지를 쳤다는 말은 그들도 ‘사실상’ 악령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돼지들이 호수에 빠져 죽자,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귀들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그 많던 악령들이 지금은 왜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돼지들 안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것이 돼지지 악령이 아니라고 믿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더 깊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마귀들, 혹은 마귀들이 들어있는 악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 악습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려 하지만 그들은 악습을 벗어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악습의 이름을 솔직히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악습이 악령 때문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본인이 악령에 들렸음을 솔직히 시인하면 참 편합니다. 악령을 선택할 것인지,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본인이 결정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매하게 자신의 죄를 인간의 본성적인 부족함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만다면 그 사람은 점점 자신도 모르게 무덤 속으로 끌려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재산을 자랑하고, 먹고 노는 것을 자랑하고, 남보다 인정받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그런 악령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그 이름을 솔직히 고백할 수 있을 때야만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악령의 영향을 제거하러 오셨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만드는 내 안의 것이 ‘뱀’이라고 고백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뱀이 결국은 나를 사탄으로 만드는 것이니 그놈이 그놈입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우리 안에 있으며 사탄의 힘과 결합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인간의 나약함으로 포장하면 돼지 안에서 악령을 보지 못하여 예수님을 내쫓는 게라사인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영화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는 ‘아넬리제 미켈’이란 독일 여자 청년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에밀리 로즈에게 악령이 드는 것을 허락하시고 에밀리 로즈는 세상에 악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악령에 시달리는 지옥의 고통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사실일 수 있다면 에밀리 로즈는 악령이 들렸어도 성녀와도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어쨌건 그 교구 주교는 구마 신부에게서 에밀리 로즈를 통해서 하는 악령의 말들을 녹음시켰고 과실치사로 재판을 하는 중에 증거자료로 제출되었습니다.
악령은 여러 언어로 말을 하고 있었고 자신이 어떻게 교회 안에 침투하여 인간의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지
어쩔 수 없이 실토하고 있었습니다.
사제는 끊임없이 악령의 이름을 묻습니다. 악령은 결국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나는 카인과 함께 했었고, 나는 네로 안에도 있었다. 한때 유다와도 함께 했으며, 내가 바로 군단이며, 내가 벨리알이다. 그리고 나는 루시퍼이며, 육신의 악마다.”
죄는 항상 악령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CCC 598)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죄를 통해 우리가 악마와 결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돼지를 악령과 하나 되게 만드셨습니다. 게라사인들이 해오던 악습이 곧 마귀 들린 것을 섬겨오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라 핑계를 대겠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그 돼지의 이름이 솔직히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돼지는 돼지지 악령과 상관없는 것처럼 무덤에 살던 사람만 악령에 들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본인이 악령에 들렸다고 알았던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악령과 상관없다고 믿었던 이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자아의 모습은 뱀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에덴동산의 뱀을 사탄이라 불러도 될 것입니다. 그래야 사탄에게 유혹받으신 예수님도 쉽게 이해됩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누구나 사탄에게 유혹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라고 포장되면 결국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고 맙니다.
내 안에서 악령과 결탁하여 나를 죄짓게 만드는 자아라는 돼지 속에 숨어있는 것이 뱀의 모습임을 명확히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은 인간이 치료할 수 있지만, 악령은 주님만이 물리쳐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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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페이스 북에서 가끔 좋은 글을 보여 주곤 합니다. 며칠 전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굳이 복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썩은 과일은 스스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생각하니 참 좋은 글이었습니다. 불난 곳에 기름을 부으면 불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마련입니다.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습니다. “남편이 회사에서 돌아와 아내가 켜놓은 컴퓨터에서 아내의 메일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혼자서 출장 간다고 했습니다. 아내의 메일에는 누군가와 같이 출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내는 사실 좋은 사람이 생겼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남편은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면서 잘 지내다가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곧 자신의 실수를 뉘우치고 남편에게 돌아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저도 화를 참지 못하고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닌 적이 많았습니다. 오히려 흥분을 멈추고 지내면 곧 해결될 때가 더 많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사람을 탓하고, 벌준다고 해결 될 일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부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전쟁도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과 전쟁을 해야 하는 다윗의 마음은 칼로 찌르듯이 아팠을 것입니다. 아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결국 아들이 죽게 될 것이고, 아들이 이기면 또 다른 가족들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아셨고,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현실에서는 쉽게 실천할 수 없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가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 2000년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활은 깨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깨어지지 않는 달걀은 결코 병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우리의 몸은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으면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무덤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을 내보내고 성령이 함께 하면 주님과 함께 있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며칠 지나면 방 안에 먼지가 쌓이듯이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더러운 영들이 들어옵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 교만, 게으름, 욕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몸은 살아 있어도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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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는 게라사로 가셨다. 이 지방의 본이름은 게르게사인데 성경을 필사하면서 잘못 옮긴 이름이다. 게르게사는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나신다. 그 사람은 썩은 시체로 악취를 풍기는 무덤에서 산다. 세상의 영광을 약속받았던 자가 그곳에 살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에 거처하면서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 밤이나 낮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는 것은 그가 더는 비참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마귀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본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7절) 예수께서는 악령 들린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8절) 하시자, 마귀들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 떼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물에 빠져 죽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들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주님께서는 마귀들을 막으셨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인간들에게도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귀들이 돼지들을 소유할 힘이 있었다면 인간을 소유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은 성한 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마귀들의 군대가 자기에게서 쫓겨난 것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주님의 발치에서 마냥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뜻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19절)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에서 어떠한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이 변화는 나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들을 때, 우리도 그 주민들처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의 희생이 따를 때, 그 희생을 꺼려 예수님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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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도 안 되고, 그 주검에 몸이 닿아서도 안 된다”(신명 14,8). 이 말씀처럼 율법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규정합니다. 특히 마카베오기 하권은 돼지고기 때문에 순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6,18-7,42 참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돼지가 얼마나 불결하게 인식되었는지 잘 보여 주는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군대”라는 더러운 영은 예수님 앞에서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기를 청합니다.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마귀 들린 돼지들은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습니다. 악은 이처럼 예수님 앞에서 더 더러운 것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더 악하고, 더 부정하며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어둠을 더 선택하는 것이 바로 악의 방식입니다. 돼지들이 죽게 된 것처럼, 악이 이끄는 종착지는 바로 죽음입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한 말을 눈여겨봅시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악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고 싶은 마음을 우리 안에 심어 놓습니다. 한번 우리 안에서 허락된 이 마음은 우리의 생각을 점점 지배하기 시작하고, 우리를 더욱 악한 곳으로 이끕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순간이 가장 괴로운 순간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사라져 버리게 만들고, 우리의 믿음도 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고해성사는 오늘 복음이 고백하는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 주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선포하는 이로 새롭게 변화되었듯, 고해성사는 우리가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우리를 빛으로 나아가는 삶으로 이끌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잃어버렸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가야 할 곳은 바로 고해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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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귀들과 돼지 떼>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 5,11-13)
1월 29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인데, 마귀를 쫓아내신 일 자체는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일이고 특별하지 않은 일이지만, 이야기 중간에 들어 있는 돼지들 이야기는 많이 이상합니다.
여기서 ‘돼지들’은 그 지역이 이방인들 지역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고, 유대교 율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마귀들이 예수님께 청한 것은, “인간들 세상에서 살 수 없다면 짐승들 속에나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한 것입니다. 마귀들이 돼지들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마귀들이 인간 세상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니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입니다. 만일에 그곳에 돼지들이 아니라 다른 가축들이 있었다면, 마귀들은 그 가축들 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의 청을 허락하신 이유는 모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고 계셨을 텐데, 그래도 예수님께서 돼지들을 죽이신 것은 아닙니다.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은 일은, 말하자면 집단 자살을 한 것인데, 그것은 말 못하는 짐승들도 마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혐오하고, 그래서 거부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돼지들 속에 들어간 마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되어서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돼지들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어떻든 결과는 ‘선’입니다. 그래서 돼지들은 선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선의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4-17)
게라사인들의 ‘반응’도 많이 이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역에서 마귀들이 제거된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기만 하고, 또 예수님께 감사드리지는 않고,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라고 요구합니다.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떠나라고 요구하였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예수님을 쫓아낸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복음서 저자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는데,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1) 게라사인들은 아마도 유대인들을 싫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시니까 그들은 예수님도 싫어했을 것입니다.
2) 그들에게도 분명히 마귀는 두려운 존재였겠지만, 그 마귀들을 쫓아낸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더 두려운’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3) 그들은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겠지만, 크게 불편한 것도 없었으니 그럭저럭 마귀들과 함께 살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생긴 변화가 낯설었을 것이고, 그 변화가 유대인에 의해서 생긴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4)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갑자기 죽어버려서 생긴 경제적인 손해가 그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돼지 떼의 주인들은 예수님께 손해배상을 하라고 요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욕하면서 쫓아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5) 그들은 유대인들이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또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도 없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은 ‘선’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악’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사람들, 그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지내는 것이 편하고 좋았을 것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런 게라사인들과 많이 비슷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그저 돈을 많이 버는 것만, 또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게라사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재정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먹고사는 데에 크게 불편한 것도 없으니 아무 관심도 갖지 않고 사는 모습, 전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면, 먼 나라의 일이라면, 특별히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습,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관한 복음을 들으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 라고만 생각하면서 비웃는 모습 등. 그렇게 무심하게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마귀들은 인간 세상을 떠나지 않고 지금도 사람들 속에 숨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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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수님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마주칩니다. 이 사람은 한마디로 죽음의 세력입니다. 이는 그가 무덤에서 살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디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람은 사람들의 삶을 자꾸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갔습니다. 그를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이마저도 부수어 버리고,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쳤습니다.
이렇게 게라사 지방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이 되었고,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족쇄와 쇠사슬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인 더러운 영에게 이르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어서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던 돼지에게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제야 게라사 지방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을 향한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게라사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다고 하여도, 이 일 때문에 생계에 가장 필요한 돼지 이천 마리가량이 죽어 속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된 사실보다도 당장 먹고살 문제에 마음이 쓰일 뿐이었습니다.
생계와 생명은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는 낱말입니다. 생계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염려하고 걱정한다면 참생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계와 생명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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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어제 고향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환대와 배척을 받고 당당히 떠나가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에 나타나십니다. 아마도 서쪽 막달라나 티베리아스에서 배를 타고 동쪽 건너편 게라사 쪽으로 이동하신 것 같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실패체험(?)을 하고 여기까지 오시면서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잠시 머물러 봅니다. 좀 마음이 짠합니다.
게라사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에서 나와 흉측한 몰골로 예수님 앞에 나와 따지기 시작합니다. 이건 또 뭐지? 다짜고짜 "난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하느님의 아들인 걸 안다고요. 그렇지만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나 좀 그냥 내버려달라."고 떼를 씁니다.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거죠.
이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습니다."(마르 5,3-5)
아마도 이 사람은 크게 상처받은 영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꼴보기 싫었을 겁니다. 그래서 무덤에서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 곁에 머무는 편이 더 편할 정도였습니다. 그 상처와 그로인한 번민이 한번 솟구쳐 오르기 시작하면 아무도 것잡을 수 없게 변해 버립니다.
감당이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견딜 수 없어 자해까지 하게 됩니다. 그 사람 머리 안에는 이미 '군대'(마르 5,9)라 불리는 '2천이나 되는'(5,13) 온갖 번뇌(煩惱)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백팔번뇌'가 아니라 '이천번뇌'나 되니 돌아버릴 지경입니다. 뇌가 불타도 2천 번이나 넘게 불 타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몇 마리의 마귀(번뇌)를 데리고 사시나요? 여러분의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세상 근심걱정, 분노와 흥분, 시기와 질투, 탐욕과 욕심은 얼마나 많나요?
이 괴로움에서 어떻게 하면 해방될 수 있을까요? 불가(佛家)에서는 수행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면 번뇌가 사라지고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요? 저는 그때 뿐이고 또다시 번뇌가 발동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도움은 되겠지만 뿌리까지 치유되긴 어렵습니다.
이 번뇌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그 뿌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더러운 영, 혹은 마귀는 누구보다도 똑똑한 영물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하느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볼 정도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의 참 신원을 담박에 알아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느님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와는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습니다.(마르 5,7 참조) 가능하면 하느님의 손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성향들이 모여서 번뇌를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를 하느님 앞으로 데려놓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그를 쫓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천이 넘는 마귀(번뇌)를 한꺼번에 몰아낼 수 있는 힘은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소위 '구마치유'의 논리가 아니겠습니까?
2천이나 되는 번뇌의 무리가 빠져나간 그 사람은 이제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맺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미 체험한 사람은 굳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수도자, 성직자가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더 널리 전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5,18-20 참조)
그러나 이러한 번뇌의 마귀가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으로 일거에 치유되는 것을 본 군중들의 태도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기적을 목격하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계기로 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5,17) 그게 바로 우리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기적들을 늘 체험하면서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게라사인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여러 마귀(번뇌)를 데리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번뇌가 심각해지면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하느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길만이 우리가 더러운 영의 지배를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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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로,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돌풍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다.'(마르코 5,2)
이제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서 마귀들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마르코 5,15) 있었습니다.‘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은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디아서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소서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고 저항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코 5,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그리스도의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코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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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5,19)
오늘 복음에는 평범한 곳이 아닌 평범 하지 않는 장소, 두 곳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호수 건너편 곧 이방인 땅과 무덤이 그곳입니다. 복음의 게라사인들의 지방은, 곧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그 지역은 율법에서 식용이 금지된 돼지를 키우는 지역, 더럽고 추악한 지역입니다. 또 한 곳은 바로 무덤입니다. 예전 어린 시절 자신의 담력을 과시하기 위해 한밤중에 공동묘지로 달려간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공동묘지는 생명의 지역이 아닌 죽음의 땅이며, 무덤은 세상과의 단절이자 타자와의 관계의 차단을 상징합니다. 무덤에서 살았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인간이란 본디 관계 속의 존재 곧 거짓된 자아와 참 자신, 자신과 타인,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이 관계에서 벗어나 고립되고 단절된 삶 곧 지옥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존재였기에 밤낮으로 무덤에서 괴성을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찢곤 하였는데,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5,6.7)라고 소리칩니다. 자기의 이름을 ‘군대’라고 밝힌 더러운 영은 나아가서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쫒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합니다.”(5,10) 다만 가까운 산에 놓아기르는 돼지들에게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더러운 영들을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고, 마침내 발작한 돼지들은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수 동편의 골란고원 중턱에 있으며, 돼지들이 비탈을 내달려 호수로 빠져들었을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예상하지 않은 일이 발생합니다. 그 발단은 돼지 치는 이들이 고을과 촌락에 달려가 아마도 주인들일지 모르지만, 주민들이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 저희 고장을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5,17) 언뜻 이해되지 않는 반응이지만, 돼지를 잃은 주민들이 쓸모없는 미친놈 하나 구하려고 자기들의 재산인 돼지들을 죽였으니, 또다시 다른 곳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와 걱정에서 그렇게 간곡히 떠나 주시라고 부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일이 단순히 그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별 쓸모없는 한 사람 살리자고, 천연기념물 살리자고, 문화재 보존하자고 개인 사유지와 재산을 희생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게라사인들의 반응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지역에 만연해 있는 님비 현상 아닌가요. 님비NIMBY현상이란 ‘내 뒷마당에서는 안 된다(Not In My Backyard)’는 영어의 약자이며 위험 시설과 혐오시설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행동을 지칭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게라사인들은 미친놈(?) 하나 살리려고 자기들 재산을 축냈으니 요즘 같으면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할 법하다, 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비록 재산은 잃었어도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고 그로 인해 다들 두려움에서 이제 벗어났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기적과 같다, 고 생각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따뜻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놀라운 일이,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나에게 손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팽배합니다.
마귀 들렸던 이가 제 정신을(5,16) 차리고서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5,18)라고 청하였지만 예수님은 이 간청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5,19) 고 말씀하시며 가족에게 돌려보내십니다. 이런 조치는 일차적으로 악령에 들림으로 고립되고 단절된 가족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더러운 영이 나갔지만, 아직도 가족 상호 간에 서로 주고받았던 여러 가지 상처의 치유와 화해가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다른 한편 그가 마귀에서부터 벗어난 것은 사실 자신이 먼저 벗어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사 표명이나 의지가 아니라 더러운 마귀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 두려움에서 돼지들에게 들어가겠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의 태도를 보시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다는 그의 청을 허락하시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우리 또한 마귀에 사로잡힐 수 있지만 그때보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저를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결국 그 사람에게 요구되는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5,20)라는 표현에 함축된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방인 지역의 선교사로 선택되었음에 감사하면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마귀 들렸던 이처럼, 우리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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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에는 듣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늦은 밤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찹쌀떡~~ 메밀묵”입니다. 간단한 리듬이 담긴 이 소리를 아마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추운 겨울, 사람이 많이 오가는 전철역 근처에서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파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길거리 음식인데도 많은 사람이 거부감없이 이를 구매하신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찹쌀떡, 메밀묵을 좋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찹쌀떡, 메밀묵’이라는 고유 장단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합니다. 외국인에게 이 장단에 맞춰서 “찹쌀떡, 메밀묵”을 외쳐보라고 하면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6글자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만의 고유 장단이기에 따라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고유함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 머무는 이는 사랑 실천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행복해하며 남의 행복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주님의 고유함이 자기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실천에 주저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 실천하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고, 사람들에게 바보 멍청이 소리를 들을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먼저라서 다른 사람의 행복에 오히려 배 아파합니다.
사랑이라는 주님의 고유함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유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나온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났습니다. 그 더러운 영을 아무도 휘어잡을 수가 없었지요. 그 안에는 군대라고 불릴 정도로 그 수가 많았지요. 이 마귀를 쫓아내시지요. 그런데 그 더러운 영들이 사람들이 산에서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에 들어간 것입니다. 마귀들이 들어갔던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더러운 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이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축하할 일입니다. 하지만 고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자기들의 손해를 생각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또 생겨 손해를 볼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안에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고유함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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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마르코 5,1-20 (마귀들과 돼지 떼)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8)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마르 1,13)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더러운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깨끗한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어두운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밝은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사악한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착한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억누르는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일으키는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내치는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돌보는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빼앗는 영을
그대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내어주는 영을 품어라
영을 지닌 그대 사람아
그대에게 맞갖지 않으니
그대안의 죽이는 영을
밖으로 보내라
그리고 다만
살리는 영을 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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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을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합니다.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나왔습니다.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하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큰 복입니다.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와(마르5,15), 새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 12,2)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제정신으로 돌아왔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으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 주시길 바랐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 4,28)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주교)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5,18)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 우리도 기도할 때 제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누군가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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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世上)에서 중요(重要)한 3가지‘금(金)’이 있는데 돈을 상징(象徵)하는 “황금(黃金)”과 음식(飮食)을 상징하는 “소금” 그리고 시간(時間)을 상징하는 “지금(只今)”이다.
어느 남편(男便)이 이 말을 듣고선 너무 의미(意味)가 있다고 생각해서 부인(婦人)에게 문자로 물어보았습니다. “여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3가지‘금(金)’이 있는데 뭐라고 생각해?”
잠시 후 부인에게서 답장(答狀) 문자가 왔습니다.
“현금, 지금, 입금.”
이 문자를 보고 남편이 입을 쩍 벌리며 다시 문자를 보냈습니다.
“방금, 쬐금, 송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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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 천국의 온전한 삶>
하느님 중심의 정주(定住)와 믿음과 사랑-
"새벽부터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게 하소서."(시편 90,14)
“성공의 길은 다양하지만, 실패의 길은 포기, 하나뿐이다. 하나의 길이 막혔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 어록에 나오는 오늘 1월29일자 말씀입니다. 이래서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믿음입니다. 한쪽문이 닫혔다고 절망할 것은 아니니 한쪽문이 닫혔으면 옆문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없다는 것이니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어제 1.28일 주일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축일이자 동방교회에서는 사막의 은수자, 성 이삭의 축일을 지냅니다. 7세기 시리아 출신의 성인으로 서방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동방에서는 아주 유명한 성인입니다.
어제 “지옥은 텅 비어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교황님의 말씀도 이 성인의 사상에서 영감을 받았을 거란 인터뷰 기사를 일부 인용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지옥이 텅 비워져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말씀이 회자된 적이 있고 나는 이것이 성 이삭이 다뤘던 주제라 생각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렇다. 성 이삭은 지옥이 텅 비워져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텅 비워져 있기를 희망했다. 초기교회에는 이런 생각을 갖은 많은 교부들이 있었고 이것은 성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되는(All will be all in God)’ 종말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지옥이 영원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성 이삭은 영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특별히 흥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신적 사랑의 무한함(The immensity of divine love)’이 그의 관심사였다. 성인은 신적 사랑은 하나의 목적을 지녔으며, 창조의 목적은 분명히 인간 악에 의해 좌초되지 않는 다는 것과 신적 사랑은 마침내 어떻든 지옥을 극복할 것을 믿었다. 성 이삭의 개인적 생각이지만 이것은 니싸의 그레고리오, 서방의 노르비치의 줄리안, 많은 신비가들의 생각이라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삼 “하느님은 사랑임”을 깨닫게 하는 인터뷰 기사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찌보면 지옥도 하느님의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로 인해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천국도 연옥도 지옥도 이미 지상에서 시작된다는 것이고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을 잃을 때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연옥이자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 치유받은 게라사의 미친 사람과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다윗의 대조에서 우리는 귀한 가르침을 얻습니다. 게라사의 미친 사람은 그대로 지옥의 사람같습니다.
흡사 주님이 지옥에서 그를 구출해내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아. 게라사의 미친 사람은 바로 하느님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잃고 공동체 에서 격리 소외되어 고립단절의 삶을 살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지옥에서의 미친 사람입니다. 고립단절의 무관(無關)한 삶이 바로 지옥입니다. 복음 서두의 장면은 그대로 지옥도(地獄圖)를 연상케 합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흡사 지옥에서 구원의 하느님을 찾아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미친이를 지옥에서 끌어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더러운 영을 제압할 수 있는 분은, 더러운 영에 들린 이를 지옥에서 끌어낼 수 있는 분은 구원자 예수님뿐입니다.
어제 주일 삼종기도후 강론시 교황님 한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누누이 강조하는 말씀이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Don’t dialogue with the devil)”는 것입니다. 악마와 대화하다보면 십중팔구 말려들기 마련이니 창세기의 하와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악마의 아부성 발언을 일언직하에 물리치시며 부마자로부터 떠날 것을 명령하는 예수님입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일련의 과정을 겪은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는 마귀들렸던 자의 청을 거절하시고 자기 공동체 삶의 자리로 복귀하여 복음 선포자의 삶을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부마자(付魔者)에서 복음 선포자(宣布者)로 획기적 구원의 전환에 모두가 놀랐다 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 배 낫습니다. 마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평소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새삼 지옥도 천국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을 살아갈 때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오늘 사무엘하권의 다윗의 대죄의 보속으로 겪는 고난과 시련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대로 지상에서 겪는 지옥체험입니다. 정말 미치거나 자살까지 이를 극한 상황에서 의연하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다윗의 모습이 복음의 미친자와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으며 올리브 고개를 울며 올라가는’ 피난길에 오른 장면은 그대로 비극의 절정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이 지옥과도 같은 극한 상황의 수모와 곤욕과 시련 모두를 남김없이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은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사랑이 정말 놀라운 감동입니다. 하느님은 시종일관 이런 다윗을 눈여겨 보시며 함께 해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시편 139장 말씀입니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시편 139,7-8)
천국도 지옥도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천국도 지옥도 스스로 자초하는 선택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관계가 좋으면 천국이지만 관계가 나쁘면 지옥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살 때 천국이요 하느님을 등지고 살 때 지옥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지상천국의 온전한 삶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정주와 믿음과 사랑을 노래한 제 좌우명 고백시를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 곳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아 이야기하오리다."(시편 73,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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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윗의 기도>
“주님께서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시어 저자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어찌하여 네가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말할 수 있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우리는 하느님께 청하든 흠숭을 드리건 찬미를 드리건
우리가 뭘 하는 것쯤으로 기도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라면 기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라면 우리가 더 잘해야 할 것은 잘 듣는 것, 곧 경청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나는 일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른과 대화할 때 어른이 말씀하시면 말은 물론 하던 모든 동작 멈추고 공손히 듣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멈춤과 경청이 부족합니다. 가끔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기들끼리 그러하듯 제 앞에서도 휴대전화로 뭘 하는데 그때 저로서는 무척 당황스럽지요.
옛날 같으면 정 급한 일이 있으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밖에 나가 용무 보고 돌아와서는 다시 경청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할 때 중요한 것은 경청인데 오늘 다윗은 그 경청에 있어서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는 시므이의 저주를 하느님 말씀으로 듣습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인간을 통하여 하시는 하느님 말씀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고 맞듯 저주를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다 받을 수 있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공손히 받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경청의 자세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모든 자연 재앙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경고를 듣고, 니네베의 왕과 백성들이 단식하고 회개했듯이 지금껏 하던 모든 것을 멈추고 바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행위에서도 하느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의 말 안에서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관련한 하느님의 음성도 듣는데 이 또한 너무도 놀랍고 대단합니다.
그래서 그 반역은 아들이 지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들을 통해 내리신 벌입니다.
아들의 죄가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의 벌이요, 하느님께서 가장 치명적인 방법으로 내리신 벌입니다.
그랬을 겁니다. 간음죄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죽은 것도 치명적인 벌이었는데 아들이 반역한 것은 틀림없이 그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죄를 자기가 받아야 할 벌로 받아들이고, 벌도 인간이 주는 벌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벌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공손한 기도 자세일 뿐 아니라 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한 짓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내리신 벌이라면 받아들이기 훨씬 수월하겠지요?
그래서 벌을 내리신 하느님께서 선도 내려주실 것을 기대할 수도 있게 되고, 그래서 이런 바람과 믿음으로 다윗은 이렇게까지도 얘기합니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벌을 주시는 하느님은 선을 은총을 주실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느님이 벌도 사랑으로 주시고 선도 은총으로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했기에 다윗은 성인이고,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고 우리의 모범입니다.
어제는 아무리 해도 제목만 올라가고 강론 내용이 올라가지 않아 몇 분에게만 이메일로 보내드렸는데 그것이 어제 강론 댓글에 올라와 있네요.
원하시는 분은 그것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가끔 이런 일이 있는데 저도 왜 그런지 모릅니다.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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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5,8)
오늘 복음(마르5,1-20)은 '마귀들과 돼지 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가셨을 때, 그곳에서 수가 많은 군대라는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군대 마귀!>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를 죽일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던 마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게라사에서 이 군대 마귀를 쫓아내시는 치유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악의 세력보다도 더 큰 힘을 지닌 분으로서, 군대 마귀처럼 아무리 강력한 악의 세력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복음 환호송)
그러니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우리도 어떠한 악의 세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매순간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더러운 영아, 나에게서 나가라."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5,8)
더러운 영인 악령(마귀)은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내 주위를 맴돌며 호시탐탐 내 안으로 들어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인 악마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싸우게 하고, 탐욕을 부리게 하고, 시기질투하게 하고, 나쁜 생각을 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게으르게 합니다. 이처럼 악마는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끕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러운 영(악마)을 몰아내야 합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닌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름)으로.
오늘도 악과 싸워 승리하는 자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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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lY8fXf0m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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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마르 5, 19)
주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자비를 우리에게
언제나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그 어떤 것도
막지 않으시며
다 맞아들이십니다.
맞아들임은
대화의 기장 큰
본질이 됩니다.
치유와 정화는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대화를
나누십니다.
더러운 영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은
점점 죽음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더러운 영을
추방한 후
제정신이 된 그를
가족들에게 돌려
보내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저버리지 않으시는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자비를 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자비없이는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더러운 영은
결국 끝이 있지만
자비는 영원합니다.
자비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선택하는
예수님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끝없는 자비로
다시 일어서는
자비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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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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