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진 변호사 (1932-2023)人生 이야기>
작년 2023년 5월, 어느 신문이
한 변호사의 별세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후
판사가 된 그는 네 딸을 두고 있었는데,
첫째가 눈에 이상이 왔고 백방으로 치료했지만 결국 양쪽 시력을 모두 잃었다.
그는 딸 치료 등 뒷바라지를 위해 천직으로
여기던 판사를 그만두고 (1978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 딸은 앞을 볼 수 는 없었지만 공부를 잘해 미국으로
유학가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돌아와 서울맹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취직한지 9개월 되는 때쯤 두 동생들과
함께 집 부근 삼풍백화점에 들렀었고,
그 때 붕괴 사고로 세 자매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1995년 6월 29일)
그 변호사는 딸들의 보상금으로 받은
6억 5천만에 본인 재산 7억원을 보태어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첫째가 근무했던 서울맹학교에 기증하였다.
그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정광진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세 딸을 한꺼번에 잃은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미쳐버리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가늠도 잘 안 된다.
아마도 짐승처럼 울부짖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격렬하게 대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격렬한 항의 중에 그는 희망의 빛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절망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이제 내 딸들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다"라고...
그는 놀랍게도 절대적 절망을 절대적 希望으로 전환시켰다.
그가 만든 盲人들을 위한 장학재단은 세 딸의
이름 한자씩을 가져와 "삼윤장학재단"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맹인 학생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장례식날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殡所)에 있었던
상주(丧主)는 건장하고 용모가 준수한 20대 청년이었다.
그는 고인의 외손자로서 1995년 사고 때 세상을 떠난,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 둘째 딸이 남긴 한 살짜리 아들이었다.(윤상원 1994~)
사고 후 정 변호사는 그 외손자를 데려와 자신이 키우며,
사위를 설득해 재혼케하여 새출발하게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선택이 아닌가?
그 아이는 절망속의 조부모에게는
살아야 될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홀아버지보다 더 극진한 사랑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젊은 아이 생부에게는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 새출발하는데 부담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고인의 선택이 더 없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다.
무엇이 그런 탁월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유대인으로서 나찌에 의해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에
갇혀 있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정광진 변호사가 이런 태도를 취했던 것같다.
그 상황에서 삶에게 기대하는 것을 중단하고,
"삶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앞에 놓인 과제가 무엇인가?
나는 그 과제를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인가?" 하고 질문했던 것같다.
그리고 그 책임을 온 어깨에 짊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떠난 딸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 그 남겨진 혈육이 온전히
성장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남은 가족들이 다시 평화를 얻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해 냈다.
그리하여 임종의 순간에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나이다...
"하며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인생은,
어느 소설의 결구처럼 '그렇게 슬픈 것만도 그렇게 기쁜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잘못과 무관하게 큰 시련이 올 때도 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남탓하고 자책하고 비판하다가
파멸되어 사라지고, 또 어떤 사람은 고통을
극복하며 세상에 남을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다시 빅터 프랭클을 인용하면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에 선택과 힘이 들어 있다."
시련이 왔을 경우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힘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
시련 속에서 억울해 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대신,
삶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냈던 사람은 불멸의 가치를 만들어 냈다.
성경에서 욥이 그랬다. (욥은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심지어 양 7천마리 낙타 3천마리 소 천마리 나귀 500마리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욥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빅터 프랭클이 그랬다.
그리고 정광진 변호사도 그랬다.
지금도 우리중엔 누군가가 그렇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