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낱 먼지요, 입김에 지나지 않는 인생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복음을 듣고 또 들으며 기뻐합니다.
전하고 또 전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모든 일정 위에도 함께 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자격 없는 자, 주님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덮어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잘 알아듣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본문 주해)
19~20절 : 바리새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의 정체를 묻는다.
바리새인들은 이 당시에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물을 때 ‘네가 그리스도냐?’ 하지 않고,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뿐인데, 요한의 대답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는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열망이 강렬하였음을 볼 수 있다.
21절 : 그러자 ‘엘리야냐?’ 아니면 ‘그 선지자냐?’라고 또 묻는다.
그들이 ‘엘리야냐?’라고 물은 이유는, 유대인들은 메시아 오기 전에 승천하였던 엘리야가 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
그러나 세례 요한은 승천한 엘리야가 직접 온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한다. 세례 요한이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음으로 구약의 엘리야의 모습과 비슷했다.
세례 요한의 출생 과정에서 천사는 요한이 엘리야처럼 행할 것을 고지한 적이 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1:17)
그리고 예수님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일한 세례 요한을 두고 엘리야라고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11:10....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17:11~13)
‘그 선지지냐?’라고 물은 것은 모세가 예언한 말씀을 근거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베드로는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가 예수님이라고 한다.(행3:22~23)
그러나 요한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앞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에 함께 포함된다.
22~24절 : 그들이 자기들을 보낸 자에게 대답해야 한다고 하며 다시 묻는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자기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온 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다.
그 소리의 내용은 이사야 40장 3절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25~27절 :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가 또 세례 요한에게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닌데 왜 세례를 베푸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자신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 사람은 내 뒤에 오는 분이지만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하였었다.(15절) 이는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세례는 그분을 드러내기 위한 세례인 것이다.(31절)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은 그분의 종의 자격도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눅7:28)라고 하셨다.
28절 : 이 일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났다.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는 현재 요르단 북쪽으로서, 요단 서편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와 다른 장소이다.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는 ‘고통의 집’(그리스어)이란 뜻이지만, 요단 동편의 베다니는 ‘샘 근원의 집’(아람어)이다.
(나의 묵상)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한 존재이다.
‘그가 혹시 그리스도?’라는 의문을 가지고 모여온 자들에게 단 한 순간도 은근슬쩍 ‘그리스도인 척’ 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한 존재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두고 ‘엘리야’(마11:14)라고 하신 것이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눅7:28)라고 인정해 주신 것을 알고 있기나 한지.....
오직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에 열심을 내다가 땅에서는 이슬과 같이 사라진 인생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하늘에서,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은 모든 자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확실히 깨닫고, 변질되지 않고 끝까지 그 일에 올인하는 것만큼 멋진 인생이 없을 것 같다.
그 멋진 인생을 살도록 주님께서 내게 주님과 교제하는 은혜를 선물로 주셨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은혜를 주신 이유는, 이 말씀 묵상이라는 통로를 통해 복음과 생명의 삶이 전해지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나의 사명임을 깨닫는다.
매일 주님과 나눈 교제로 만나는 모든 이들과 대화하고, 그것을 통해 생명이신 주님을 알리는 일이다. 무슨 신학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성경에 능통한 자도 아닌 나를 주님께서 쓰시는 것에 감격할 뿐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외친 것처럼 내가 외쳐야 할 소리는 무엇인가?
안개와 같고 헛것과도 같은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자랑하는 나팔 소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이며 빛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주심으로 내가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이다.
또한 그 감사와 감격이 변질되지 않고 더 깊어질 수 있음은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생명의 교제를 하기 때문이다.
참 복음의 소리를 듣기 드문 이 시대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들의 소리가 있음을 너무너무 감사한다.
그 가운데 또 하나의 소리로 나를 택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내 생명 다할 때까지 이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이 자리에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길 소원한다.
(묵상 기도)
주님,
오랜 세월 속에 믿음의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주님께로 더 가까이,
말씀께로 더 가까이,
십자가로 더 가까이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부족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또 하나의 소리를 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소리를 끊임없이 불어대는 나팔수가 되게 하옵소서.
이 사명을 다할 때
이 땅에서 미련 없이 떠나
영원하신 아버지 품속에 골인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