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화요일 ( 토빗 2,9ㄴ-14)(마르12,13-17)
제1독서
<나는 시력을 잃은 채 지냈다.>
▥ 토빗기의 말씀입니다.2,9ㄴ-14
오순절 밤 나 토빗은 죽은 이를 묻어 준 다음,
9 내 집 마당에 들어가 담 옆에서 잠을 잤는데, 무더워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10 내 머리 위 담에 참새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하였다.
그때에 뜨거운 참새 똥이 내 두 눈에 떨어지더니 하얀 막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치료를 받으려고 여러 의사에게 가 보았지만,
그들이 약을 바르면 바를수록 그 하얀 막 때문에 눈이 더 멀어졌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아주 멀어 버렸다.
나는 네 해 동안 시력을 잃은 채 지냈다.
내 친척들이 모두 나 때문에 슬퍼하고,
아키카르는 엘리마이스로 갈 때까지 나를 두 해 동안 돌보아 주었다.
11 그때에 내 아내 안나는 여자들이 하는 일에 품을 팔았다.
12 아내가 물건을 만들어 주인들에게 보내면 주인들이 품삯을 주곤 하였다.
디스트로스 달 초이렛날에
아내는 자기가 짜던 옷감을 잘라서 주인들에게 보냈다.
그러자 그들은 품삯을 다 줄 뿐만 아니라
집에서 쓰라고 새끼 염소 한 마리도 주었다.
13 내가 있는 곳으로 아내가 들어올 때에 그 새끼 염소가 울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내가 아내를 불러 말하였다.
“그 새끼 염소는 어디서 난 거요? 혹시 훔친 것 아니오?
주인들한테 돌려주시오. 우리에게는 훔친 것을 먹을 권리가 없소.”
14 아내가 나에게 “이것은 품삯 외에 선물로 받은 것이에요.” 하고 말하였지만,
나는 아내를 믿지 못하여
그 새끼 염소를 주인들에게 돌려주라고 다시 말하면서,
그 일로 아내에게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아내가 말하였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3-17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13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 성심 성월을 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것과 세상 것 사이의 질서를 가르쳐 주십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마르 12,14)
수석 사제들, 율법 학자들, 원로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장황하게 말문을 엽니다. 얼핏 들으면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다 그분께 호의적이기까지 한 듯 느껴지지요.
하지만 이 지당한 이야기 안에는 올가미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예수님은 황제와 식민지 백성인 이스라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게 되실 테니까요.
아무도 꺼리지 않고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 분으로서 황제의 편에서 세금을 독려한다면 식민지 백성의 정서에 반하는 형국이 되겠지요. 반대로 진실하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심으로써 이방인과 불화한다면 민중 봉기와 반역을 조장하는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이는 허울 좋은 말로 예수님을 떠보며 그분의 미래를 차단하려는, 세속 정치에서는 아주 흔한 술수일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예수님께서 우문에 현답을 던지십니다. 그들은 감탄하지만, 데나리온 한 닢에 들어 있는 의미들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지요. 종교 영역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들, 제도들이 다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데나리온 한 닢이라는 물체에 새겨진 초상과 글자가 누군가를 표현한다 해도, 그 글자와 사람은 물론 그 가치와 제도까지 오로지 하느님의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충실한 유다인의 전형인 토빗이 등장합니다.
"토빗은 죽은 이를 묻어 준 다음"
도입 부분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듯 느껴집니다. 토빗은 이미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검을 묻어 준 일로 도망다니는 처지가 되었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었지요.(토빗 1,16-20 참조)
이국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고 주검마저 버려진 이들에게 마지막 예를 갖춰주는 일은 참으로 훌륭한 선행이었습니다. 토빗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러한 선행과 자선을 멈추지 않는 의인이고 선인이었지요.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잘 알고 있어요."(토빗 2,14)
사고로 시력을 잃은 토빗과, 그 대신 생계를 꾸리느라 지친 아내 사이에 오해가 생겨, 아내가 토빗에게 반어적으로 질문들을 퍼붓습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고로 장애를 입은 것이 마치 자선과 선행의 보답이냐고 비아냥대는 듯 들리니, 오죽 답답하고 서러웠으면 저리 따지나 싶어 부부 모두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 지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재산이나 건강, 자손 등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보고, 질병과 실패, 후손 없음을 죄로 인한 징벌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과 버려진 동족을 위해 헌신한 토빗이 재산과 시력을 잃은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탐욕이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 하느님 일과 세상의 일을 혼동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꾸 하느님과 거래를 하고 싶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만큼 할 테니 이렇게 해 달라고요. 그렇다면 고통이나 불행은 설명할 길이 없게 됩니다. 달콤한 건 섭리고 쓴 건 자기 죄가 되어 버리니까요.
사실 자선과 선행을 현실적 보상을 의식하고 행하지는 않지요. 주님의 축복을 끌어내기 위해 무언가 한다면 자칫 거래가 되어 버리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우리와 흥정을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선과 선행은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의 회복과 유익이 목적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베푸는 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자선과 선행은 인간이 하느님 자녀다움, 하느님 모상성을 충만히 발휘하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지요. 베푸는 이는 베풀수록 모든 것의 주인이시면서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다 내어 주시는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결국 더 행복하게 되는 이는 받는 이보다 주는 쪽입니다.
자선과 선행은 베푸는 그 순간 이미 큰 축복입니다. 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그 자체가 물질적이고도 영적인 커다란 축복일 터이고, 나누는 이의 비움과 관대함과 자비와 흡족함은 이미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고 세상 것은 세상에 돌리는 지혜를 청합시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무얼 좀 더 주셨다면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살피고 경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뜻에 따라 베푼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이미 나눔 자체가 보상이고 축복임을 감사하며 주님 마음에 우리 마음을 합하면 그것으로 족하답니다.
예수 성심 성월의 첫 날, '자비와 인정이 넘치는 예수 성심'께 이 한 달을 맡겨 드립시다.
예수 성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 출처: 원글보기;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