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없는 환율… 당국 “투기요인 점검” 경고도 안먹혀
정부 개입에도, 환율 또 올라 1345원
원달러 환율 연일 연고점 행진
코스피는 5일째 떨어져 2,435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윤석열 대통령의 출근길 발언과 외환당국의 공식 구두개입에도 원-달러 환율이 1340원대 중반까지 치솟으며 이틀 연속 연고점을 갈아 치웠다. 미국 중앙은행의 긴축 행보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당분간 환율 상승 추세를 막기는 역부족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2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5.7원 오른(원화 가치는 내린) 1345.5원으로 마감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였던 2009년 4월 28일(1356.8원) 이후 13년 4개월 만에 종가 기준으로 가장 높다.
이날 환율은 개장 직전 “시장 리스크 관리를 잘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에도 1341.8원으로 상승 출발하면서 전날의 장중 연고점 기록(1340.2원)을 경신했다. 이어 오전에 나온 외환당국의 구두개입에 잠시 하락 전환했지만 오후 들어 다시 상승하며 장 막판 1346.6원까지 오르기도 했다. 환율은 최근 6거래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며 43.1원 급등했다.
원화 가치가 크게 떨어진 건 미국 달러화 강세의 영향이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최근 다시 고강도 긴축의 고삐를 죄고 있는 데다 유럽과 중국의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안전자산인 달러 가치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향후 한미 기준금리 격차가 더 벌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원화 가치의 추가 하락 압력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코스피도 5거래일 연속 하락했다. 코스피는 전날보다 1.10%(27.16포인트) 내린 2,435.34로 마감했다. 코스닥지수도 1.56%(12.45포인트) 떨어진 783.42에 거래를 마쳤다.
브레이크 없는 환율… 당국 “투기요인 점검” 경고도 안먹혀
23일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이날 코스피와 원-달러 환율 종가가 표시돼 있다. 이날 환율은 외환당국의 구두 개입에도 상승세를 이어가며 1345.5원에 마감했다. 김재명 기자
미국의 고강도 긴축 움직임과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로 국내 금융시장이 연일 휘청거리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과 관계 당국이 환율의 급격한 상승을 막기 위해 일제히 진화에 나섰지만 상승 추세를 되돌리진 못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달러화 강세로 원화 가치 하락이 이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환율이 과거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오른 상황에서 향후 한미 기준금리 격차가 더 벌어지면 국내 시장에서 외국 자본이 유출되면서 환율이 추가로 오를 위험이 커진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결정일이 25일로 다가온 상황에서 통화당국의 고민도 더욱 커지게 됐다.
○ 대통령·부총리·외환·금융당국 모두 나섰지만 역부족
윤 대통령은 23일 외환시장 개장 직전인 오전 8시 50분경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출근길에서 “달러 강세와 원화 약세 상황이 우리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리스크 관리를 잘해 나가겠다”면서 “이것이 수입 물가를 상승시키고 국제수지를 악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닌 처음부터 작심하고 한 발언이었다.
그 후 30분도 되지 않아 외환당국도 움직였다. 기획재정부 당국자는 “최근 환율 상승 과정에서 투기적 요인이 있는지에 대해 면밀히 점검해 나갈 것”이라며 올 들어 4번째 공식 구두 개입에 나섰다. 이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임원회의에서 “환율 불안에 따른 시장 변동성을 악용하는 불공정 행위를 엄단하겠다”고 말했고,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역시 관계기관과 함께 예정에 없던 긴급회의를 열고 “시장 심리의 쏠림”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이날 하루에만 대통령부터 부총리, 외환·금융당국이 모두 한목소리로 시장에 경고 메시지를 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환율 상승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날 오전 구두 개입 효과로 잠시 1330원대로 내려간 환율은 다시 슬금슬금 오르더니 장 막판에는 1346원대까지 치솟았다. 증시도 금융시장 불안에 동력을 잃으면서 전날에 이어 이틀 연속 1%대 급락세를 면치 못했다. 김동욱 KB국민은행 자산운용부 팀장은 “환율이 지난주부터 급등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당국의 구두 개입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면서도 “구두 개입에도 환율이 안정을 찾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외환딜러는 “한국 경제의 문제로 환율이 오른다기보다 글로벌 달러화 강세가 나타나고 있어 당국의 개입 효과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 글로벌 강달러… 기업들은 손실 비상
최근의 달러화 강세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다시 고강도 긴축에 나설 것이란 시장의 전망이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이날 금리 선물(先物)로 기준금리 추이를 점치는 미 시카고상품거래소의 페드워치에 따르면 연준이 9월 자이언트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에 나설 가능성은 55%로 나타났다. 전날 47%였지만 하루 새 확률이 절반을 넘었다.
달러화는 더 강력해지고 있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22일(현지 시간) 109.05로 마감하며 한 달여 만에 다시 109 선을 넘어섰다. 유로화는 달러 대비 0.9943달러까지 떨어지며 한 달 만에 1유로를 1달러로 교환할 수 있는 ‘패리티(parity·등가) 환율’이 다시 깨졌다.
환율 상승으로 부담이 커진 한국은행이 25일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커지고 있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은이 연준의 9월 회의 전에 선제 대응에 나설 수 있다”고 분석했다.
환율 상승의 여파로 기업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원자재 가격과 투자비용이 높아지고 달러 부채가 불어나는 등의 악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 올 상반기 주요 기업의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철판과 플라스틱, 리튬 등 가격이 대폭 상승하면서 기업들의 원재료 매입비용이 대폭 상승했다.
박민우 기자, 곽도영 기자, 홍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