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코리아 격하게 사랑하니?
대한민국 코리아의 국조-봉황
용(중국)이 떠 받치고 있는 백제 대향로
[산해경]"봉황이 사해를 날면 평화가 온다."
참새들이 어찌 봉황의 마음을 알리오?
고구려에 상실한 백제영광을 회복하고자 했던 성왕 때 제작된 백제의 상징-대향로/꼭대기 봉황은 마한을 상징하는 신조로 마한의 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마한을 통합한 백제가 마한을 계승했다는 의미이며, 대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중국을 상징하는 토템으로 중국까지 떠 받들어야 한다는 백제중심의 세계관을 의미하고 있다. 가운데 신선들이 악기를 타고 노니는 모습들은 백제가 추구하는 평화로운 대동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대동세계이기도 하다.
중국 최고 지리서[산해경/해외동경]에는 "해외동경(한국)에 봉황이라는 신조가 있는데 봉황이 사해를 날면 평화가 온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제 대향로는 세계 최고의 예술적인 조형미로 [산해경]기록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3한을 기록한 [후한서/한전](서쪽)에는 "마한에는 꼬리가 5척이나 되는 닭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봉황은 바로 서남해 중심의 한반도의 꼬리 긴 토종닭을 의미한다. 그리고, 중국 최고 지리서 [산해경]에다가 서남해 지역의 토종닭이 사해를 날면 평화가 온다고 기록할 정도면 인류평화정신의 뿌리가 율려로 상징되는 마고성이며, 그 마고성이 바로 서남해 지역임을 명확히 말해 주고 있다할 것이다.
[자료]한성을 회복하고 백제영광을 실현하고자 했던 성왕
백제의 중흥기 기반을 마련했던 무령왕(武寧王)에 이어 성왕(聖王)이 523년 즉위했다.
오랜 백제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성왕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도 드물다.
그는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다음, 북으로 고구려에 침탈당한 영토를 회복하고, 제2의 도약을 위해 도읍을 웅진(현 공주)에서 사비(현 부여)로 옮기는 대역사를 단행했다. 아울러 그는 국가의 통치제도를 새롭게 정비해 백제가 명실상부한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완비하게 했다.
성왕 시절의 백제는 찬란한 문화를 자랑했고 아름다운 백제의 유물 대부분이 성왕 시대 백제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백제의 진정한 백제다운 문화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서기 523년, 20여 년간 재위했던 무령왕이 62세의 나이로 붕어하자 성왕은 벽돌로 만든 특이한 형태의 무령왕릉을 만들었고 금동백제대향로도 성왕시절의 작품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성왕은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으며 일을 잘 결단했다”고 서술돼 있을 정도로 지적인 면모가 강했던 것으로 예상된다, 또 성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고려할 때 무예에도 어느정도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한 나라의 군주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탁월한 영도력, 통치제도 대대적 정비
도읍 웅진(현 공주)서 사비(부여) 천도
사찰 창건·불경 번역 등 불교 전파 앞장
국민 단합·왕권 강화 등 정국 안정 만전
외국에 사신 파견 발전된 문화 전파
日 불교관련 문화·유물 막대한 영향
◆사비시대의 개막
우리나라 역사에서 도읍지를 왕실에서 자의적으로 옮긴 사례는 많지 않다. 특히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것은 강력한 왕권과 새로운 도읍지를 건설할 만한 경제력 및 사회적 결속력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성왕 시절 사비로의 천도는 이러한 정치, 사회, 경제적 제반 조건이 갖추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의 영도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웅진시절의 백제는 도읍기에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동성왕(東城王)과 무령왕이 등장하면서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룩한다. 나아가 웅진에서의 정치적 안정을 이룩함과 동시에 국가의 공민을 확보하고 농경지를 확대하는가 하면, 대외교류를 통한 경제력도 증대된다. 결국 웅진도읍 시기의 이러한 번성은 성왕이 등극하면서 최전성기에 이르게 되는데 성왕은 538년 새로운 도약을 위해 도읍을 사비로 옮가는 결단을 내렸다.
성왕이 사비를 천도의 대상지로 삼은 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사비지역이 갖고 있는 지리적인 장점이다. 백마강과 부소산성으로 둘러싸인 사비지역은 방어에 유리하고,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도 편리했다.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부여지역은 남쪽과 동쪽으로 벌판이 펼쳐져 있어서 농업생산력을 높일 수 있었다.
또다른 측면은 바로 왕권강화이다.
성왕은 강력한 왕권확립을 위해 백제가 부여족의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라고 개칭했다는 점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왼쪽부터 성왕의 초상화(전신 좌상)와 일본 호류사 몽전에 보관되어 있는 목제 구세관음상.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성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모습을 본따 제작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통치체제 정비
성왕은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외곽의 요충지에 나성을 쌓았으며, 그 내부는 5부(部)로 구획하고, 각 부는 다시 5항(巷)으로 분리하여 한국 고대 도성제 사상 가장 발달된 형태를 완성했다.
외적인 것 뿐 아니라 내부 통치조직도 대거 개편됐다.
중앙통치조직은 16관등제, 6좌평, 22부사제, 수도의 5부-5항제로 재정비됐는데 이 중 핵심은 바로 22부이다. 22부는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내관 12부와 일반 서정을 맡는 외관 10부로 이루어졌다. 각 부의 장관은 3년마다 한번 교대했는데 이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려 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지방통치조직은 방, 군, 성제로 개편돼 세분화시켰다.
방은 전국을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으로 구분한 최고의 지방통치조직이다. 각 방은 6~10개의 군을 관할했으므로 방령은 일종의 군관구사령관의 기능을 한 셈이다. 이 방과 군 아래에 성(현)이 두어졌다. 현의 수는 200~250여개 정도였다.
◆끊임없는 국토회복의 꿈, 그리고 신라의 배신
성왕의 천도 이후 왕권이 강화되면서 눈은 자연스레 국외로 돌려졌다. 바로 고구려에 뺏긴 한강유역 회복이 백제의 최대 목표가 된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하정책으로 빼앗긴 한강유역은 백제의 발상지로 대중국 교통로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잃어버린 한강유역은 백제의 정신이 스며있는 곳임과 동시에 국가정책상 소홀히 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성왕의 한강유역 회복 의지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나타난다.
성왕은 즉위 원년인 523년에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1만 명의 군대를 보내 격파했고, 즉위 후 7년이 지난 529년에는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이 거느린 군대를 3만 명의 군사로 막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늘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곡 싸움에서 2000여 명의 병사를 잃는 피해를 보기도 하고, 사비 천도 후인 540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일도 있다. 하지만 성왕은 고토 회복에 대한 집념만은 버리지 않았다.
백제의 한강유역 회복의 꿈은 약 10년 후에 실현됐다. 백제는 551년 한강유역 회복을 위해 가야군, 신라군과 함께 대대적인 군대를 진군시켰다. 전투는 백제군과 가야군이 한강 하류지역, 신라군은 한강 상류지역을 각각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 전쟁의 승리로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개 군을 차지했으며, 신라는 죽령 이북에서 고현에 이르는 10개 군을 점령했다. 오랜 백제의 숙원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고토 회복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오랜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가 백제와의 맹약을 저버리고 553년에 갑자기 한강 하류지역을 공격, 이 지역을 탈취해 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성왕은 이듬해에 신라의 배신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도 맞서 거국적으로 군사를 동원해 현재의 옥천 관산성에서 일대 혈전이 벌어졌다.
사비 도성에 있던 성왕은 전쟁에 앞서 아들 위덕왕(威德王·여창)을 위로하겠다는 마음에서 전장으로 나갔고 보병 50명과 함께 백제군의 진영으로 가던 중에 불행히도 구천(狗川·현 옥천)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잡혀 전사하고 말았다.
<예술을 사랑한 군주, 성왕> 문화, 세상을 하나로
국민 단합 위해 종교예술 진흥적책 펼쳐
역대 왕조 중 가장 찬란한 문화 꽃피워
성왕(聖王)시절의 백제는 역대 백제 중 문화예술이 가장 찬란했던 시기로 꼽히고 있다.
백제의 예술을 볼 수 있는 국보 제287호인 금동대향로가 성왕시절의 유물인 것만 봐도 그 당시의 백제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성왕시대에 문화가 크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성왕이 백제 불교의 번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금동대향로가 순전히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불교의 영향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백제금동대향로는 부여에서 출원한 백제 건국세력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 흐름과 연관돼 있으며 불교의 연화장 세계와 도교사상이 응결된 재현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성왕이 재위하던 시기보다 약 150여년 전인 침류왕(枕流王) 원년인 384년이었다. 이 때 왕실에 의한 불교 수입은 고등종교를 통한 백성의 교화를 도모하고자 한 것으로 백제를 비롯한 삼국시대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백제는 침류왕 대에 불교가 공인됐음에도 이후의 불교흔적은 크게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백제사회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성왕 대에 이르러서야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성왕은 백제 국민들의 단합을 꾀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 부흥에 적극 나섰다.
특히 이 시절 불교의 융성을 위해 국외교류가 활발히 진행했다.
성왕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불교 사상을 도입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사비 천도 후인 서기 541년에 사신을 중국의 양(梁)나라에 보내 열반경 등의 경전과 사찰을 지을 수 있는 장인들, 그리고 각종 기술자 등을 요청했다. 이들은 사원건축과 같은 국가 토목사업에 관련된 장인인 것이 분명한데 불교에 대한 성왕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절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들은 서산 보원사지 출토 금동불 입상과 예산의 사면불, 서산 마애불삼존불, 태안 마애삼존불 등이다.
또한 성왕은 이보다 앞선 538년부터 발전된 백제 불교를 일본에 전파하는데도 노력을 경주했다. 특히 552년에는 서부희씨(西部姬氏)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로 하여금 금동석가불 1구, 번개 약간, 경론 약간을 일본에 보냈고, 554년 2월에는 승려 담혜(曇慧) 등 9명을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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