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우연한 눈길에서 시작했다.
노들강이 제수씨에게 여행 옵션으로 사가야 한다는 특산물 강박관념을 토로하길래 초콜릿공장에 들러 내키지 않는 견학 체험을 했다. 초콜릿 봉지를 트렁크에 담고 차의 시동을 건 지 5분도 안된 시점이었다. 달리던 중 왼쪽에 제법 차들로 북적이는 주차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머체왓숲길.
제주에 웬만한 곳은 거진 돌아봤다고 자부하는 내게 완전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뭔가 토속적인 냄새도 풍겨왔다. 아톰 형과 노들강에게 양해를 구했다. 둘 모두 사려니숲길이 초행이라 두세 번 다녀온 내가 안내하던 참이었는데 여긴 내가 안 가본 곳이니 한 번 들어가보자고 했다. 바쁜 일 없는데 뭘, 하는 답이 돌아왔다.
차를 돌려 주차장에 들어갔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시간에 제주사투리가 들려왔다. 아, 이런 아침에 제주 사투리가 들려오는 차량들로 북적인다면 틀림없이 괜찮은 곳이란 느낌이 온몸을 달뜨게 했다.
입장료를 안 낸다는 점도 마음에 적잖이 들었다.(물론 사려니 숲길도 공짜다. 그런데 제주시 절물휴양림은 적잖은 입장료를 받는다.)
그런데 멋도 모르고 들어선 길, 따사롭다 못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데 간간이 들려오는 공사장 포크레인 소리와 중산간도로를 고속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굉음만 없다면 참으로 고요하고 나직한 길이 될 것 같았다.
가마니 같은 거적이 깔린 길을 걷는데 멀리 한라산도 보이고 여기저기 목장이며 숲들이 눈에 들어온다.
정말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길이다. 사려니숲길이 인공적이고 작위적인 데 견줘 이곳은 그냥 마을길이다. 왼쪽으로 들어가 한바퀴 빙 둘러보고 소롱콧길이란 다른 길과 겹치는 대목으로 나오는 코스다. 2시간쯤 걸렸던 것 같다. 나중에 보니 숲은 오름에 조성된 것이었다. 말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기하학적으로 설계(너무 거창한 표현인지 모르겠다)된 출입구를 몇 차례나 거쳤는지 모른다. 꼭 오름으로 들어갈라치면 그 출입구가 나타나 뭔가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줬다.
참 좋다, 소리를 연발했다. 사람의 손길이 영원히 닿지 않은 느낌까지 안겨주는 숲도 있다. 동백, 마가목 등등 오름마다 특징으로 내세우는 숲이 다르고 달랐다. 4.3 때 마을 주민들이 숨죽여 움크렸을 것 같은 으슥한 동굴 같은 곳도 눈에 띄었다.
4㎞쯤 걸었을까? 전망대가 나왔다. 우리가 차를 댄 주차장 쪽까지 시야에 들어오고 저멀리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도 보였다. 전망대에서 조금 쉬다가 어느 숲에 들어섰다. 아 삼나무숲이다. 일본 도야마 쪽의 삼나무 숲을 자동차로 달린 적이 있다. 처음에는 광활함에 놀랐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니 무서워졌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곳은 앙증맞긴 하지만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 여기서 한 번 더 쉬어갑시다. 앉아보니 더 좋다. 노들강은 키 큰 삼나무를 앵글에 담으려고 열심히 카메라를 조작한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냥 마음에 담는 게 최고다. 난 일어나 정녕 정령이 있다는 듯 나무를 껴안았다. 이 숲 사랑받을 만하다.
안내판 문구가 쿡 웃음을 찌른다. '말 임신 중'. 조용히 하라는데도 제주 사람들 강적이다. 마구 짓까분다. 우리가 넘 예민한가 싶기도 했다. 그런 곳이다.
나중에 내중천이란 곳도 나온다. 아마도 한라산에 많은 비가 내리면 바다로 흘러가는 내가 되는 모양이다. 이런 곳이 있나 싶었다. 그리고 밀 나락이 놓인 들판이 나왔다. 생전 밀을 본 적이 없는 내게 노들강이 밀인 것 같다고 했다. 마치 노랑 융단이 깔린 것 같았다. 길을 마치고 주차장을 다시 면밀히 살펴보니 ㅎ 자 들어간 번호판은 우리뿐이다. 역시 이곳은 제주 사람들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란 결론이 내려졌다.
점심은 애초에 작심한 대로 교래리 토종닭을 먹었다. 지난해 가을 가족여행 때 맛있게 먹던 원조집을 찾았다. 역시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일요일이라선지 예약이 넘쳐 한참을 기다렸다. 두 분 모두 만족했다. 특히 후식으로 내놓는 녹두죽은 일품이다. 회장님도 언제 일행 데리고 가 녹두죽만 먹어도 행복해질 것이다.
사려니숲길을 갔다. 초행인 두 분을 위해서였다. 안내한다고 따라나섰다가 혼쭐이 났다. 30분쯤 뒤 볼일 소식이 전해졌다. 큰일 나겠다 싶었다. 탐식의 후유증이다. 괄약근에 최대한 힘을 적게 전하며 빨리 걸으려니 힘들었다. 급하게 찾은 화장실을 아가씨가 차지하고 있다. x 마려운 강아지처럼 종종거리는데 트럭이 멈추고 아저씨들이 이쪽 눈치를 살핀다. 잠시 뒤 아가씨가 나오고 내가 들어갔다.
나중에 노들강이 그런다. "형 어떻게 봤어요? 화장실 페인트칠하고 있던데"
"아유 말도 마라. 조금만 늦었더라면 차에 시동 걸고 다른 곳 화장실 찾아갈 뻔 했다."
교래리 들렀다가 사려니숲길 가려는 분들에게 권한다. 입구 직진 200m 지점의 화장실을 반드시 들러 볼일 해결하고 가라. 무쏘의 뿔처럼,
이럭저럭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진다. 다음 행선지는 84학번 종호가 운영한다는 한남항 카페 '헤밍웨이'를 찾아간다. 비양도 앞이라는데 처음 카카오내비는 정반대쪽을 가리킨다. 하여튼 여러 차례 검색해 제 길을 잡았다. 5.16도로도 잠깐 탔다. 아마 처음 제주에 왔던 제주 졸업여행 때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제주시 넘어가는 지점에 절물휴양림이 눈에 띄길래 노들강에게 살짝 양해를 구했다. 직장 동료가 꼭 가보라고 추천했는데 입장료도 꽤 받고 두 숲길 가본 뒤라 굳이 그럴 필요없을 것 같다고 설득했다.
애월 바닷가를 도는 해안도로를 탔다가 큰 길도 탔다가 하면서 약간 에둘러 헤밍웨이 카페에 도착했다. 바닷가 흔들 벤치에 앉아 비양도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하는 곳으로 입길에 오르내린다고 했다. 지난해 가족여행 때 누가 저렇게 번듯한 카페 차렸나 부러워했는데 그곳을 내 2년 후배가 운영하고 있었다.
순천이 고향인 종호 내외의 생김새가 닮았다. 원래 닮아 결혼했는지 살다보니 닮아졌는지 모를 일이다. 공교롭게도 음식점을 위탁운영할 중국인 업자와 미팅하고 계약을 체결한다고 저녁을 함께 못하겠다고 했다.
우리끼리 모슬포 간다고 하니 횟집이 더 낫지 않느냐면서 한 집을 추천했다. 땅거미가 내리는 길을 달렸다. 오른쪽에는 바람 많은 동네답게 풍력발전기가 외로이 불빛을 밝히며 돌아간다.
널따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가니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다. 사람이 북적대는 건 좋은데 커다란 다라 안에 식기들을 내던지듯한다. 아니 이건 중국집 배달 식기 부리는 듯하는 건가. 불쾌한 느낌을 없애지 못한 채 메뉴판을 보니 우리의 목표 고등어가 없다. 모둠회 8만원을 먹어보란다. 아톰 형은 여기까지 들어왔으니, 하는 표정으로 시킨다.
내가 불러세웠다. 사정을 설명하고 나가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격한 반응이 돌아오진 않았다.
다시 내비를 켜고 만선식당 간판이 보이길래 차를 세웠다. 이집 맞나 싶었다. 지난해 가족여행 때 보인 식당 입구가 아니었다. 들어갔더니 알겠다. 반대쪽 출입문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일하는 청년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9시에 영업을 끝내야 하고 낌새를 보니 술깨나 마실 것 같은데 그냥 이쯤에서 작별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럴 순 없지, 물러설 내가 아니다. 제주에서 오직 고등어조림 하나 보고 달려왔는데 무슨 매몰찬 소리냐, 9시까지 엄수할테니 조림 하나 대령하고 회 하나 포장해달라고 했다.
청년은 주방 아줌마 보고 동의를 구하고 결국 앉을 수 있었다. 40분 동안 밥 먹는데 대리 부를 필요없다고 하고 두 분만 소주 한 병씩을 들었다. 아톰 형은 태어나 이렇게 맛있는 조림 처음 먹어본다고 했고 노들강은 이런 조리는 나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어려운 것 아니라고 했다.
정말 그렇게 9시 3분쯤 식사를 마치고 모슬포항 한번 둘러보고 집에 와 씻고 술상을 차리니 11시가 거의 다 돼간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회를 냉장고에 숙성시켰는데 제대로다. 특히 콩밥(팥밥일 수도 있겠다)을 회, 소스, 고추, 마늘과 함께 김에 싸먹는 방식이 색다르기도 하고 비릿한 고등어맛을 중화시킨다며 노들강도 좋아했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것이 배가 넘 부르다는 것이었다. 술을 마시면 꺼지겠지 싶었는데 웬걸 갈수록 배가 불어와 서로 고통을 호소한다. 제발 네가 먹어라. 한 그릇에 몇 점 안 나오는 고등어회를 서로 먹으려고 악다구니를 쓰는 서울 광화문 풍경과 넘 달라 웃프다.
난 0시 20분쯤 운전하느라 피곤하다는 이유로 먼저 손 들고 잠자리에 들었다. 여러분 상상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고등어회가 널려 있는데 알자지라가 꿈나라로 향했다.
첫댓글 저는 집사람에게 정말 어렵게 제주가는 허락(?)을 받았기에 본전생각에 열심히 놀았다는 기억이 남습니다. 3일간 마신 술도 엄청난 양인데 이날 밤도 알대장이 잠든 이후로 남은 고등어회와 술을 아톰형과 새벽2시 넘게까지 해치웠습니다.ㅋㅋ
다음날 아침 어렵게 찾아간 서귀포의 식당에서 푸짐한 전복뚝배기를 먹으며 아톰형이 반주로 한잔? 물어보는데 전날의 여파인지 차마 마실 수가 없더라구요 ^^
4월과 5월 연속 제주도를 찾아 당분간 끊어야 할 듯. 근데 머메왓숲길은 발리 가보고 싶네.
머체왓숲길과 사려니숲길은 여러모로 비교되는 점이 많았는데요...
오전에 6.7km를 걸은 머체왓은 수종이 다양하고 인공적인 느낌이 별로 없어서 어느 순간에는 동네 뒷동산 같은 길도 있었고, 동백이나 삼나무숲도 보다 자연에 가까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에 약 5km를 걸은 사려니숲길은 많은 사람이 찾는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포장로 등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고, 수종도 키큰 삼나무 위주로 단순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간 알대장님의 눈썰미 덕분에 너무나 좋은 기분을 느끼고 왔습니다.
푸짐하게 잘 먹었네. 머체왓 숲길은 그렇잖아도 제주 사람의 추천이 있어 가 볼 생각이다.
실은 어제 전동차 안에서 읽었지만, 댓글은 이제사 씁니다. 무엇보다 머체왓 숲길 산책이 부럽습니다. 농담 짙은 초록빛의 사진도 멋지고요.
배고픈 점심 당직 시간~~ 숲길도 좋고 노을 내다보이는 카페도 좋지만 맨 아래 고등어회가 훅 끌립니다. 이건 염장 수준~~ㅎㅎㅎ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