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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대응 않고 등정 주장만 되풀이하는 무모함 여전
1992년 가을 조선대산악회는 1972년 봄 마나슬루 원정에 참가했다가 눈사태로 사망한 오세근 대원의 20주기를 맞아 그의 추모등반으로 마나슬루에 도전한다. 원정대는 9월 25일 오후 6시 이영출 대원과 고소포터 나왕 푸르바 셰르파가 북동벽 루트로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대가 등정한 3일 후 폴란드-이탈리아 합동대(대장 크리스토프 비엘리스키)가 북동릉 변형루트로 등정에 성공한 후 한국대의 등정 의혹을 제기한다. 등정자 중의 한 사람인 이탈리아인 마르코 비안치(Marco Bianchi)는 홀리 여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팀이 오른 봉우리는 주봉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못 미치는 곳으로 그 주위에는 주봉보다 50~80m 낮은 봉우리가 많으며 그 중 한 봉우리를 올랐다”고 주장하면서 발걸음이 멈춰진 곳의 사진을 공개했다.
원정대는 귀국 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증거자료나 정황증거를 수집해 공식루트를 통해 신속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등반보고서에서만 등정을 주장하는 무모함을 드러냈다. 이후 조선대팀은 국제적으로 정상 등정을 인정받지 못하고 8,125m 지점까지 도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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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봄 로체에 재도전해 정상에 올라 손을 흔드는 박영석(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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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이 로체 재등정을 하게 된 이유
국내 8000m급 14좌 완등자 중의 한 사람으로 현재 ‘8000m급 신루트 프로젝트’를 수립, 왕성한 등반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영석 역시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오점을 남겼다.
1997년 한왕용과 한 팀을 이룬 박영석은 로체에 도전, 정상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동료 대원에 의해 의혹이 제기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1997년 그에 의해 로체 등정의혹이 제기됐던 이탈리아 등반가 마르티니와 스테파니와 같은 처지가 된다. 당시 박영석은 정상 40m 전에서 “이 정도면 다 올라간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하는 동료의 격려에 정상을 밟지 않고 돌아섰던 것이 화근이었다. 뒤늦게 박영석의 로체 등정의혹의 소문을 접한 동국대학교 산악부 선배들의 설득으로 4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2001년 봄 14좌 완등을 목전에 두고 로체 재도전에 나선 그는 등정에 성공해 명예를 회복했다.
당시 홀리 여사가 왜 로체에 재도전하느냐는 질문에 박영석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왜 로체 등정사진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좋은 카메라와 비디오를 가지고 왔다. 카메라맨과 함께 정상에 올라 등정사진을 촬영하겠다”라는 조크로 프로 산악인답게 즉답을 피했다.
로체와 함께 안나푸르나1봉(1996년 등정), 마나슬루(1998년 등정) 등정 의혹도 네티즌들에 의해 제기됐다. 마나슬루의 경우, “정상에 섰을 때는 너무 춥고 강한 바람이 몰아치는 상황으로, 만약 사진을 찍으려고 장갑을 벗었다가는 곧바로 동상이 걸려 손가락을 잘라내는 불상사가 생겼을 것”이라며 “때문에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안나푸르나는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등반하는 모습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박영석은 2001년 로체 등정에 이어 같은 해 여름 K2 등정에 성공하면서, 1993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8년 만에 통산 여덟 번째, 한국 최초로 8,000m급 14좌 완등자로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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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봄 로체에 재도전해 정상에 선 엄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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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의 시샤팡마와 초오유 문제
8,000m급 16좌 완등(14좌+로체샤르+얄룽캉)으로 국내 산악인 중 최고의 영예를 누리며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해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엄홍길도 젊은 시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모함을 드러냈다.
엄홍길은 1993, 1994년 연속으로 시샤팡마(8,027m)에 도전하지만 중앙봉(7,998m)에 오르는 것으로 그쳤다. 당시 8,000m급 14좌 완등에 대한 국내의 관심도는 매우 낮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엄홍길은 시간이 되면 등정사진을 공개하겠다고 했으나 여러 해를 넘기면서 명백하게 결론지을 자료를 제공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산악연감’과 미국산악회의 연감인 ‘아메리칸 알파인저널’은 그의 시샤팡마 주봉 등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1996년 ‘엄홍길 8,000m 14좌 완등 추진위원회’가 탄생되면서 그의 8,000m급봉 등반은 계속돼, 1999년 안나푸르나1봉과 2000년 봄시즌 캉첸중가 등정 이후 14좌 완등을 눈앞에 둔 그의 태도는 돌변한다. 그는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시샤팡마 등정 의혹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또한 정신이 없어 주봉을 중앙봉으로 착각했다고 변명했다. 또한 등정을 입증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으면서 “인맥과 학연에 의한 배타적인 파벌이 있다”고 5년 전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등정시비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시샤팡마 등정 의혹에 휩싸여 있을 때 또 다른 봉우리 초오유(1993년 등정)와 로체(1995년 등정) 등정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으나 시샤팡마 등정 의혹에 묻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잠재해 있었다. 당시 엄홍길은 스페인 대원 2명과 함께 로체 정상에 올랐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6년 스페인팀은 유럽의 히말라야 기록전문가인 사비에르(Xavier Equeskitza)를 통해 “엄홍길이 정상에 섰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등정에 실패하면 스폰서를 잃는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엄홍길은 홀리 여사 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정상에 서지 못했다는 주장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당시 엄홍길은 “함께 등반한 바스크팀 대원들이 정상에 먼저 올랐고, 뒤이어 정상에 올랐을 때는 카메라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등정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며 “만약 그때 로체를 등정하지 못했다면 우선 그들이 내가 등정했다는 주장에 대해 가만히 있었을 리 없을 것이고, 또한 만약 바스크 대원들이 나에 대해 그런 불신을 가졌더라면 어떻게 그후 가셔브룸1·2봉(1997년 등정)과 안나푸르나(1999년 등정)를 함께 등반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12년이 지난 2007년에 이르러, 엄홍길은 당시 로체 정상을 오르지 못했음을 밝히는 강력한 증언이 나왔다. 1995년 가을 엄홍길과 함께 등반했던 후안 발레조(Juan Vallejo)와 후안 오이아르자발(Juan Oiarzabal)은 “로체 정상을 향하고 있을 때 우리는 같은 로프를 묶고 있었다. 그러나 약 8,300m 지점에서 엄홍길은 스스로 로프를 풀고 돌아섰다. 그곳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당시 스페인 등반가 이나키 오초아(Inaki Ochoa)에게 실토했다. 오초아는 이러한 사실을 홀리 여사 측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2007년 3월 28일).
초오유 등정 의혹 역시 등정사진이 없어 시비에 휘말렸으나 등정하지 못했다는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논란 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들은 많다고 한다.
엄홍길은 2000년 K2 등정 후 14좌 완등을 공식 발표했으나 이후 국내외 여론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2001년 봄 로체와 그 해 가을 시샤팡마에 재도전, 등정에 성공한다. 그는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12년 만인 2001년 시샤팡마 등정을 끝으로 박영석에 이어 통상 아홉 번째, 국내 두 번째 8,000m급 14좌 완등자로 기록됐다.
다울라기리1봉의 진짜 정상은?
세계 제7위 고봉 다울라기리1봉(8,167m)에서도 한국대의 등정 의혹이 제기된다. 2005년 경상대학교 다울라기리1봉 원정대는 최임복(19) 대원과 고소포터 앙 다와(45), 페마 체링(35), 세랍 장부(45) 셰르파 등 4명이 마지막 캠프를 출발, 북동릉을 통해 15시간 만인 5월 4일 오후 5시경 등정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곧바로 베이스캠프에 함께 있던 이탈리아대(대장 로베르토 알로이)에 의해 등정 의혹이 제기된다. 경상대팀이 등정한 이튿날 이탈리아대의 대원 3명은 경상대팀의 발자국을 따라 정상을 향하다 2m 높이의 알루미늄 폴이 꽂혀 있는 해발 8,120m의 전위봉 아래 100여m 지점에서 그들의 발길이 끊겼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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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대가 공개한 다울라기리1봉 등정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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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등정자 최임복은 홀리 여사 측과의 인터뷰에서 눈과 바위로 뒤덮인 곳에 1m 높이의 폴이 있었고 고소포터가 분명 정상이라고 말했다고 등정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 해 11월 최임복과 함께 정상에 올랐던 다와 셰르파는 홀리 여사와의 인터뷰에서 북동릉으로 오르지 않고 북벽을 횡단, 정상에 올랐으며 정상에 있는 2m 높이의 폴에는 깃발이 매달려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경상대팀은 시즌 초등을 시도했기에 이들보다 먼저 마지막 캠프 위쪽에 발자국을 남긴 팀은 있을 수 없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국내 모 산악인이 최임복에게 등정 당시의 상황을 확인하자 히말라야 등반이 처음이었던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이 원정대는 2000년 이 산에서 등반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 이수호 등반대장의 추모등반이었기에 등정여부의 진실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등정 의혹을 제기한 이탈리아 여성 등반가 니베스 메로이(Nives Meroi)는 전위봉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베이스캠프에 돌아온 후에야 알았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두 번에 걸친 재등정 시도에서 악천후로 돌아섰다. 이듬해인 2006년 재도전에 나서 다울라기리1봉 진짜 정상에 올랐다. 2011년 1월 현재 49세(1961년생)로 8,000m급 14좌 중 12좌를 등정한 그녀는 세계 최고의 여성 등반가로 인정받고 있다.
정상이라고 꽂아 두었던 알루미늄 탐침봉이 다울라기리1봉 등정 여부의 핵심이다. 1990년대 누군가에 의해 설치된 탐침봉은 몇 년 후 그 부근으로 옮겨졌으나 그곳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결국 그 당시 북동릉 루트로 오른 대부분의 등정자는 정상이 아닌 곳에서 등정한 것으로 착각하고 등정사진을 촬영한 후 하산했다. 선의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지만 대상 산의 정보를 사전에 숙지하지 못한 것은 본인의 책임이다.
그 당시 전위봉에 올랐던 그 어느 누구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재등정을 시도하거나 후일 재도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고 진실을 토로한 등반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홀리 여사 측은 탐침봉까지 도달한 등반가는 정상 등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향후 다울라기리1봉의 국내외 등정자들의 등정 시비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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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울라기리1봉 정상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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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안나1봉대, 정상 아닌 정상 사진 제시
2009년 봄 경기도연맹 안나푸르나1봉 원정대는 4월 20일 오후 10시 캠프3(6,800m)를 출발, 13시간8분 만인 다음날 오전 11시8분 강정국 대원이 고소포터 칫지 누르부 셰르파, 푸르바 온겔 셰르파와 함께 안나푸르나1봉 등정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009년 봄 시즌 안나푸르나 북면에는 경기도연맹팀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물론 고소포터 2명도 안나푸르나 등반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폭설과 강풍의 악천후 속에서 과연 정상 등정이 가능했는지가 의문으로 남았다.
당시 마나슬루 등정 후 카트만두로 하산, 안나푸르나1봉과 다울라기리1봉 등반을 준비 중이던 부산연맹팀은 카트만두의 빌라에베레스트에 머물며 귀국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경기도연맹팀을 찾아가 박태원 대장과 강정국 대원에게 안나푸르나1봉에 대한 등반 정보를 부탁했다.
하지만 사전에 등반 정보를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한 이들은 주봉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북서벽 신루트를 시도하던 러시아대 대장 발레리 바바노프(Valeri Babanof)와 빅토르 아파나시예프(Victor Afanasyef) 2인조가 고소적응차 북면으로 오르다가(4월 4~6일 사이와 4월 16일 두 번 북면으로 등반) 경기도연맹팀의 베이스캠프를 방문, 안나푸르나1봉의 정상의 위치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러시아팀이 알려준 정보에 따라 박태원 대장은 북면에서 볼 때 동릉상의 두 개의 봉우리 중 우측 봉우리, 즉 중앙봉을 주봉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이들은 이러한 내용을 네팔 관광국에 정식 보고할 계획이라고까지 말했다. 주봉은 그곳으로부터 우측으로 직선거리로 약 350m 떨어진 곳에 있다.
당시 부산연맹팀은 의아했지만 더 이상 이의는 제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등반 전 안나푸르나1봉 정상을 정확히 모르면서 등반에 나선 것이다. 경기도연맹팀이 고용한 고소포터 2명은 그 해 가을시즌 한국팀에 참가, 거짓 등정 모의를 주도한 인물들로서 당시 주봉에 이르는 루트를 알지 못했다.
또 경기도연맹팀은 정상 등정 후 하산도중 강대원이 실족·추락해 정상에서 촬영한 카메라가 든 배낭을 떨어뜨려 등정사진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귀국 후 산악매체와 원정보고서를 통해 강대원이 피켈을 어깨에 멘 모습이 담긴 등정사진을 공개했다. 이 등정사진의 위치는 정상이 아니다. 이에 대해 당시 경기도연맹 내에서도 이견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직 국제적으로는 등정 의혹이 제기되지 않았으나 조만간 그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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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연맹 안나푸르나1봉 원정대가 공개한 등정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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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선의 또 다른 8,000m 고봉에 대한 등정의혹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과 세계적인 산악전문 웹진인 익스플로러스웹(www.explorersweb.com) 등이 캉첸중가와 함께 오은선의 또 다른 봉우리의 등정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또 중앙일보(2010년 8월 27일자)는 국내 한 산악인의 주장을 인용, 다른 등정자들의 사진과 상이하다며 시샤팡마, 마나슬루, 낭가파르바트의 등정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본 연감이 국내외에서 확보한 자료를 분석, 오은선의 몇 개 봉우리의 등정 여부를 확인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등정사진이 정상이 아닌 정상부 능선 7,950m 지점으로 보인다며 등정 의혹이 제기된 시샤팡마(8,027m·2006년 여름 등정)의 경우, 당시 조선대와 김홍빈팀은 오은선과 7,500m 지점에서 비박하고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정상에 도달했다고 오은선의 등정을 입증해 주고 있다.
마나슬루(8,163m·2008 가을 등정)의 경우, 코오롱팀·부산연맹팀의 등정사진과 오은선의 등정사진이 상이하다고 등정 의혹이 제기됐다. 중앙일보는 ‘오은선씨의 등정사진에서는 배경으로 산 능선이 보인다. 그러나 고미영씨는 정상 바위에 기대어 포즈를 취했다. 부산연맹팀의 정상사진 배경에도 바위가 보인다’고 의문을 던졌다. 하지만 오은선의 등정사진을 면밀히 분석해 본 결과 정상부~동릉 능선에서 심낭히말 산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그곳은 정상부 바로 아래였다.
또 정상이 아닌 정상부 설사면에서 찍은 등정사진을 공개해 말썽이 난 낭가파르바트(8,125m·2009년 여름 등정)의 경우, 당시 고소포터들이 촬영한 동영상을 판단해 본 결과 정상부가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오은선은 정상에 도달한 것이 분명하나 악천후 등 여러 가지 사정상 정상부 아래 설사면에서 등정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공식적으로 등정 의혹이 제기되지 않았으나 정상 등정사진에 정상부의 케른과 룽다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상이 아니라고 뒷말이 무성했던 초오유(8,201m·2007년 봄 등정)의 경우, 같은 날 오은선보다 약 45분 늦게 단독 등정에 성공한 일본의 노부카주 쿠리키(Nobukazu Kuriki)가 촬영한 동영상에 정상부에 서 있는 오은선의 모습이 보인다. 이로써 국내외 산악계에 나돌던 등정 의혹은 말끔히 해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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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선의 안나푸르나1봉 등정 사진. 뒤편 왼쪽에 또다른 정상이 바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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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은선이 공개한 사진으로는 정상 등정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두 봉우리가 있다. 최근 국내외에서 의혹이 거론돼 왔던 로체와 안나푸르나1봉이다. 로체의 경우, 오은선은 2009년 12월 3일 기자회견에서 국외에서 등정 의혹이 거론됐다는 로체 등정에 관한 자료를 공개했다. 오은선이 제시한 자료는 정상부에서 셀프로 찍었다는 사진 한 장과 그녀보다 하루 먼저 정상에 오른 국제 상업대가 설치했다는 정상부의 룽다가 매달린 사진 두 장이다. 룽다가 설치된 정상부의 사진은 로체 정상이 분명하다. 그런데 셀프로 촬영했다는 사진을 분석해 본 산악계 일각에서는 로체 정상에서 촬영했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의혹은 기자회견 이후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으나 오은선이 캉첸중가 등정 의혹을 무대응으로 일관하자 최근 또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오은선은 같은 날 등정한 미국인이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고 홀리 여사 측에 의혹을 제기한 장본인이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증빙자료로 자신의 등정여부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도리다.
안나푸르나의 경우, 정상에서 찍었다는 등정사진 뒤로 안나푸르나1봉 정상부 리지가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오은선이 14좌를 완등했다고 발표한 이후 카트만두에서 등정의혹이 제기됐었다. 당시 대부분의 전문 산악인들은 물론 네티즌까지도 안나푸르나1봉과 중앙봉 사이의 동릉 아래라고 주장했지만 오은선은 이에 대응하지 않았다.
2010년 5월 메스너는 카트만두에서 오은선을 단 한 차례 만난 후 쓴 ‘정상에 여성들이 드디어 올라’에서 무대응으로 일관해 온 오은선을 덕성을 지닌 여성이라고 평했다. ‘그녀가 외부의 거센 비난과 공격에도 자기의 신조를 밝히지 않고 오직 침묵을 지켜온 것은 그녀의 덕성에서 온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덕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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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 8월 20일 브로드피크 전위봉(8,030m)을 주봉으로 잘못 알고 등정사진을 촬영한 장용일 대장(오른쪽)과 한윤근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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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정보다는 등반루트가 더 중요했던 등반들
2008년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의 강사들이 주축이 된 인도 메루피크 원정대(대장 김세준)는 신루트로 북동벽을 돌파, 주봉 정상(6,660m)을 등정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북동벽을 거쳐 오른 봉우리가 메루피크 연봉의 어느 봉인지를 알지 못했다. 김세준, 왕준호, 김태만 등이 이루어낸 성과 역시 세계 등반사에 기록될 만한 훌륭한 성과였다.
2009년 대산련은 이들의 등반능력을 높이 평가, 대한민국산악대상을 수여한 점에는 수긍할 만했으나 원정귀국 후의 정확하지 않은 보고를 거르지 못했다는 오점을 남겼다. 정상에 올라야 목표를 달성한 것이라는 천편일률적인 가치기준이 언제까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등정 오인’ 깨끗이 인정한 모범적 사례들
국내외에서 등정 의혹이 제기되면 대부분은 이를 무시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무마하려고 하는 반면, 곧바로 이를 인정한 훌륭한 팀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상 산의 정보 미비로 정상을 착각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88년 악우회는 브로드피크에 도전해 주봉 등정을 발표하지만 그 후에 등반한 일본팀에 의해 전위봉으로 밝혀지면서 이를 깨끗이 인정, 당시 장용일 원정대장을 잃는 아픔 속에서의 훌륭한 결단으로 평가받았다.
1992년 울산 합동대 초오유-시샤팡마 원정대는 시샤팡마 주봉 등정을 발표했다. 그 후 등정자 중 한 사람인 남선우는 카트만두에서 활동 중인 홀리 여사를 통해, 그리고 나름대로 조사한 결과 자신이 오른 봉우리가 중앙봉이고 주봉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국내 산악계의 그 어느 누구도 등정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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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년 시샤팡마 중앙봉에 오른 남선우, 김영태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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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시샤팡마 등반에 나서는 거봉산악회의 요청으로 등반정보를 제공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오른 봉우리가 정상이 아님을 주지시키는 아름다운 사례를 남겼다. 또 1996년 러시아대에 합류한 박정헌의 경우, 역시 시샤팡마 중앙봉을 주봉으로 잘못 알고 올랐다. 후일 그는 자신이 오른 곳이 주봉이 아니라는 것을 깨끗이 시인했다.
2007년 한국산악회 에베레스트 실버원정대는 김성봉(66), 이장우(62) 대원이 고소포터 5명의 도움을 받으며 사우스콜을 출발, 12시간 만에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든 당시 60대 노인 두 명의 등정소식은 전 세계로 타전됐다. 국내외 언론은 이들의 등정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두 등정자는 국가로부터 훈장까지 수장 받았다. 그러나 내부에서 등정자 2명 중 1명이 힐러리 스텝 부근에서 하산했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원정대도 이를 시인했다. 한국산악회는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는 등 조기수습으로 산악계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원정대를 이끌었던 에베레스트 등반 경험이 있는 한국산악회의 중견 산악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사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공명심이 부른 과욕이라는 자평이 잇달았다. 그로 인하여 당사자는 자신이 오른 지점을 처음부터 확실히 밝혔지만 개인적으로 그 불명예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돼버렸다. 그도 피해자였다.
상기에 언급한 것 외에도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등정 의혹은 제기되지 않았으나 국내외에서 유언비어처럼 나돌고 있는 등정의혹은 수없이 많다. 특히 등정사진이 없는 경우는 말할 나위 없다. 국내 고산등반가 중에서 정상등정이 확실한 사람은 친분 관계나 의리 때문에, 불투명한 대부분은 본인이 등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8,000m급 14좌 다섯 번째 완등자인 폴란드 산악인 크리스토프 비엘리스키의 단독등정 때의 정상사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엘리스키는 “생명을 담보로 오른 정상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어렵더라도 반드시 등정 증명을 만들어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영예를 누리려면 그만한 노력은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다.
/ 자료 제공 부산산악포럼 정리 한필석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