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서는 그 중 꾸리찌바에 한한다.
내가 지구 대척점에 위치한 이 도시들을 굳이 경험하고 싶었던 이유는 ‘경제’라는 명분아래 점점 사정이 나빠지는 우리의 도시가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발전되어야할 것인지 그 지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 도시를 불과 며칠동안 주마간산으로 둘러보고 그 내용을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지만, 본 만큼 느낀 만큼만 소개하려 한다.
브라질의 한 도시, 꾸리찌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수년 전 박용남선생이 펴낸 ‘꿈의 도시 꾸리찌바’를 읽고 난 이후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연이어 읽었다. 그리고 언젠가 꾸리찌바를 여행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2002년, 시민단체의 초청으로 창원에 온 박용남 선생을 직접 만나 꾸리찌바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고, 내가 칼럼위원으로 있던 경남도민일보에 ‘꾸리찌바를 아시나요’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도 했다.
2003년, 박용남 선생은 책의 그림을 흑백에서 칼라로 바꾸고 내용도 보완하여 증보판을 냈다. 이 책을 사서 또 한 번 읽었다. 꾸리찌바에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증보판을 읽고난 이후다.
이 글의 내용 중 객관적인 자료를 설명한 것은 모두 박용남 선생님의 책에서 옮긴 것임을 밝힌다. 글은 내가 경험한 각 시설 별로 정리하였다.
-출발-
김해공항에서 출발한 여행경로는 인천 - 런던 - 상 파울로 - 꾸리찌바로 이어졌는데 혼자 떠난 길이라 엄청 지루했다.
BA(브리티시 에어라인) 항공으로 도착한 상 파울로 공항 입국심사장에는 최근 시작된 미국의 외국인 지문검사에 대한 세계 유일의 저항으로 유명한 브라질의 자존심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국제공항에서 볼 수 있는 자국인과 외국인 외에 미국인 심사대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현지인의 말에 의하면 내가 도착하기 며칠 전, 상 파울로 TV뉴스에서 ‘미국 항공사 직원들이 지문날인을 거부하면서 상 파울로 공항 직원과 말다툼을 하던 중 욕설을 내뱉어 브라질 공항 당국이 3만6천 리얄(1달러는 2.8리얄이므로 한화로 약 1,5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하고 상 파울로 공항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조치하여 미국 항공사 직원은 공항에 머물다가 다음 날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보도가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미국공항과 달리 지문검사도 컴퓨터로 하는 것이 아니고 범인 취급하듯 손끝에 스탬프를 묻혀 눌러 찍는데 속도도 일부러 천천히 하여 며칠 전에는 미국 비행기 한 대 통과시키는데 무려 아홉 시간이나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도 했다.
상 파울로에서 꾸리찌바까지는 브라질 VARIC항공을 이용했다.
브라질의 1월은 한 여름이었기에 날씨 적응이 쉽지 않았다.
-꾸리찌바(Curitiba)-
꾸리찌바 시는 상 파울로에서 남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빠라나 주의 주도이다. 평균 고도 908m의 아열대 지방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총면적이 432㎢(대략 남북 35㎞, 동서 20㎞)로 우리나라의 대전시보다 100㎢ 정도 작지만 이용 가능한 토지는 대전보다 약간 큰 도시다. 인구는 270만 명(광역 도시권 인구)이다.
16세기 중엽 포르투칼 식민주의자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꾸리찌바는 원주민과 비싼 금속을 찾아 상 파울로 주에서 온 개척자들이 탐험을 하는 곳이었다. 그 후 1693년 남부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포르투칼 당국에 의해 소 도읍으로 분류되었다가 1842년 공식적인 시로 승격되었고 시의 인구가 6천여 명에 이르렀던 1853년에 빠라나 주의 수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유럽 인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럽 인들에 이어 1915년부터는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뒤를 이어 레바논과 시리아인들도 들어 와 20세기 중반까지 경제가 호황을 이루었다. 자국인 이주는 1950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현재 시 인구의 약 31%를 차지하고 있다. 1950년 당시 인구는 18만 명이었다.
1950년대의 꾸리찌바는 급속한 인구 증가 때문에 도시환경이 열악했던 제3세계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였다. 이농민들의 무허가 정착으로 판자촌이 생겼고 강과 하천은 도심지역에 빈번히 범람하였다. 교통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이었던 1964년부터 1979년까지는 정권의 속성상 해외자본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도시지역에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 때 대부분의 브라질 도시들이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자가용 통행을 위해 육교가 건설되는 등 자가용 이용이 조장되는 상황이었다. 꾸리찌바 역시 1960년대 초반까지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다. 심지어 도심의 사적지까지 훼손될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런 도시적 위기상황이 자이메 레르네르의 출현으로 1962년부터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는 꾸리찌바 도시의 산 증인이자 연출자이다. 한 도시를 보존하면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오랜 세월을 봉사했던 그의 헌신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은 현대 도시사의 빛나는 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세 번이나 시장을 역임했던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관료제에 물든 기존의 관행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언제나 시민과 함께 하려는 공직자들의 헌신과 꾸리찌바 시민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1998년 6월 8일자에서 꾸리찌바를 세계에서 가장 ‘현명한 도시(Smart Cities)’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흔히 진보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1인당 소득수준이나 소득 분포를 이용하여 우리나라 도시와 비교해 본다면 꾸리찌바는 그다지 내세울만한 도시가 아니다. 게다가 꾸리찌바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처럼 아름다운 해변은 물론이고 위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도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가 꿈과 희망의 도시라는 애칭을 얻으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꾸리찌바에 대한 나의 질문이다.
-도착-
꾸리찌바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낮 12시 경이었으며 호텔까지는 미니버스를 이용했다.
모든 도시경관이 낯설었지만, 한 가지 눈에 익은 광경은 책에서 본 파인 너트였다. 나무의 아래 부분은 몸통만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윗부분에만 가지와 잎이 달린 잘 생긴 나무다.
빠라나 주에 많이 서식하는 그랄라 아줄(Gralha Azul)이라는 까마귀 과의 새가 겨울먹이를 저장하기 위해 여름 내내 땅 속에 이 나무의 씨를 묻고는 정작 필요할 때 자신이 묻었던 위치를 찾지 못해 여기저기서 솟아 자라나는 나무다.
1971년 꾸리찌바 시장에 당선된 자이메 레르네르는 시민들에게 그랄라 아줄과 같이 행동할 것을 제안하며 시 전역에 6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꾸면 시원한 그늘과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다면서 ‘그늘과 신선한 물’이라는 프로그램에 착수한 바 있다.
숙소는 도심 한 복판의 로얄그랜드 호텔로 정했는데 유명한 ‘24시간 거리’ 는 호텔 바로 옆 길이었으며 ‘꽃의 거리’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장을 푼 뒤 나의 꾸리찌바 도시여행은 바로 시작되었다.
□ 24시간 거리
시침은 24시간 주기로, 분침은 60분 주기로 표식이 구분되어 있는 원형시계 (박용남 선생은 이 시계를 포스트모던 형이라고 했다)가 입구 상단에 높이 부착되어 있었으며 골조는 노란 색 칠을 한 원형 파이프를 곡 가공하여 세우고 지붕에는 투명한 아크릴을 씌운 우아한 아케이드 형의 몰(Mall)이었다.
1991년 시작된 이 공사는, 원래 시민들이 별로 사용하지 않아 위험스럽기까지 했던 도시지역의 한 길을 반 옥외 공간 형태의 아케이드로 만들고 '24시간 거리'라고 명명했는데 이름처럼 24시간 활용되는 장소다.
밤새도록 놀기를 놓아하는 브라질 인에게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길이 120m 폭 12m의 작은 거리인 이 건물은 실내로 햇빛이 투과될 수 있다는 것과 이용자들이 비와 냉기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다.
단순함과 경제성 그리고 신속성이라고 하는 꾸리찌바 시의 행정 철학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시설물이었다.
내부는 약국, 선물가게, 은행, 빵집, 꽃집, 미용실, 서점, 기념품, 커피점, 주점, 식당 등의 작은 가게들과 경찰부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상점은 총 34개이다.
내가 갔을 때가 오후 2시 경이었는데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Mall 중앙부 오픈스페이스의 많은 간이 테이블은 낮에는 패스트푸드 테이블로 이용되었지만 밤에는 전부 생맥주 광장으로 변했다.
밤의 분위기는 낮과 달리 매우 동적이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간이 공연도 열렸는데 몇 곡을 들었지만 단 한곡, 비틀스의 ‘Let it be’ 외에 내가 아는 노래는 한 곡도 없었다. 거리의 분위기는 젊었으나 이용하는 세대는 남녀노소 편중이 없었다. 가족, 친구 그리고 연인과 함께 자유롭게 어울리고 있었다.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꾸리찌바 시는 시설을 통해 수익을 얻고 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자체와는 달리 가게 주들에게 임대료와 세금만을 부과해 시설의 운영비용을 거두어들인다고 했다.
□ 자유시장 터 오소리오 광장
자이메 레르네르는 ‘부자의 게토(Ghetto)이건 빈민의 게토이건 게토를 가진 도시는 이미 도시가 아니다’고 했다. 이런 지도자를 가진 꾸리찌바 시민이 부럽다.
그의 이런 도시철학은 꾸리찌바의 도시 변화 속에 단지 물리적인 부분 외에도 많은 내용들이 배려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하며 실제로도 그 사례는 많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 역시 무주택자가 점점 늘어났으며 그 결과 작은 손수레에다 상품을 싣고 다니며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점상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들 노점상에게 시가 내린 최종 결론은 ‘떠나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며 ‘만약 이 도시가 그들에게 직업을 제공할 수 없다면 우리들은 그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오소리오 광장이 자유시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이런 고민의 결과다.
꾸리찌바 시에 있던 노점상들에게 합법적인 판매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공원이자 광장인 이곳에 주말 혹은 일정 기간 영업을 하도록 해주어 ‘자유시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공원에 나와 있던 한 시민은 ‘주말에만 영업을 하는데 주로 3월부터 시작합니다. 딸기와 꿀, 야채 등 계절 특산물들을 주로 팔지요. 꾸리찌바 시민들에게도 인기가 높은데 1월은 계절이 맞지 않아 장이 열지지 않습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공원 안에는 많은 수의 나무벤치가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지만 내가 찾았을 때는 이미 앉을 자리가 없었다.
눈길을 끈 것은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어린이 놀이터와 농구와 미니축구를 겸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철책으로 영역을 구별해 놓은 이곳에는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으며 우리의 여느 아파트 단지처럼 일부에는 모래밭 위에 놀이기구가 놓여있었다.
미니 축구장에서 꾸리찌바 젊은이들이 하는 풋살(20m×40m 농구장 규모의 실내 축구, Futsal이라는 용어는 스페인어 또는 프르투칼어의 축구를 의미하는 Futbol 또는 Futebol과 실내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인 Salon 또는 포르투칼어의 Sala를 합성한 것이다)경기를 볼 수 있었다. 펜스와 네트를 이용해 공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시설해 놓고 한 팀에 5명씩 출전하는데 브라질 인들이 매우 즐긴다했다. 우리의 동네 축구 같은 것은 주로 풋살로 경기한다면서, 사용하는 공은 축구공보다 조금 적지만 약간 딱딱하다고 했다.
풋살 경기도 월드컵이 개최되는데 여덟 번이나 브라질이 우승했다는 말도 들었다.
과연 축구의 제국 브라질의 청년답게 볼 콘트롤, 슈팅 등 축구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외한인 내 눈에는 우리 프로선수보다 발재간이 더 좋아 보였다.
공원 관리사무소 주변에는 붉고 화려한 꽃들이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공원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넓은 공간은 인근 ‘꽃의 거리’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많은 인파를 자연스럽게 공원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 꽃의 거리
1970년께, 개발지상주의에 편승한 분별없는 도로 건설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던 때.
지금은 ‘꽃의 거리’로 불려지면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거리도 조성 당시 주민들의 반대가 많았다. 매상 저하를 우려한 상인들은 시장을 상대로 법률적 행동에 들어갔으며 자동차 클럽의 성난 회원들이 도로 복원 시위에 나섰다. 그런데 시위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공무원들의 계획에 의해 준비된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이 거리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를 차마 방해할 수 없었던 성난 어른들은 어쩔 수 없어 그냥 돌아갔고 거리는 완성되었다. 보행자 천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통으로 남아 매주 토요일 오전 10부터 12시까지 거리 미술제가 열리고 있다. 거리가 만들어지고 난 뒤 이 지역은 도시의 중심지역으로 변했고 그에 따라 건물의 상업적 가치도 매우 높아졌다.
꾸리찌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널리 알려진 ‘꽃의 거리’는 말 그대로 활기에 넘쳐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표정도 밝았지만 형형색색의 꽃들과 벤치, 길 양 옆으로 형성된 각종 가게와 키 큰 나무들, 여기저기 펼쳐진 노천카페, 거리는 정열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리 미술제가 개최되는 길바닥은 단순하며 실용적인 석편이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거리였다.
아이들의 탁아소로 사용된다는 붉은 색의 폐 전차는 사용하지 않는 듯 문이 잠겨있었다. 옆에 섰던 경찰에게 그 용도를 물으니 전에는 아이들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낡아 용도를 폐지하고 관광 상품으로만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 곳은 카메라로 촬영되고 있음’이라는 팻말을 붙여 놓은 ‘안전지대’에는 노인 몇몇이 편안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으며 거리로 밀고 나온 카페의 노천 의자에는 젊은이들이 맥주가 가득 찬 잔을 앞에 놓고 뭔가 큰 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연주, 마임 등 다양한 거리 공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거리를 처음 만들 때, 영업이 안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는 길 양옆의 상인들을 떠 올리며 이곳이 차 다니는 넓은 도로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보행자 도로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지금 이 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상념은 이윽고 왜 이런 공간을 우리는 갖지 못할까로 이어졌다.
‘꽃의 거리’는 동쪽으로 오소리오 광장, 북쪽으로 찌라덴치스(Tiradentes, 브라질의 독립운동가)광장과 역사지구, 서쪽으로는 빠라나 연방대학과 시민보행공원으로 이어지는 꾸리찌바의 심장이었다.
빠라나 연방대학 앞을 지날 때, 입구 계단에서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동일한 붉은 상의를 걸치고 옷과 얼굴에 온통 진흙 칠을 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다같이 외치고 있었다. 가운데는 교수로 보이는 곱게 늙은 여자도 한 사람 있었다. 학교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것인 줄 알고 물었더니 요즘이 대학 합격자 발표 시기라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이 전통적으로 하는 행사라고 설명해 주었다. 브라질의 모든 대학에 이런 전통이 있는데 시내로 나가 행사를 하기도 하고 교내에서 하기도 하는데 내용은 대학마다, 전공마다 다양하다고 했다.
과라나(브라질에서 생산되는 과일)로 만든 음료수를 마시면서 잠간 쉬는 동안, 안내를 맡은 민 군이 ‘꾸리찌바는 자신도 처음 오는 곳이지만 상 파울로에 비해 계층 간이 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이해가 잘 안되어 되묻자 ‘상 파울로 시내 공원에서는 여자 혼자 손가방을 들고 저렇게 다니지 못해요. 나도 길거리에서 손목시계를 채여 본 적이 있거든요. 이곳은 다르네요. 가난해 보이는 사람과 부자로보이는 사람이 모두 편안히 길을 다니잖아요. 같이 잘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것 같네요. 상 파울로는 빈부 차가 심하면서 치안이 엉망이라 부자들은 백화점과 고급 레스토랑에만 모여 있고 도심의 공원과 거리에는 잘 나오지 않거든요’ 라고 했다.
이 청년의 말처럼 자이메 레르네르가 꿈꾸었던 ‘계층 간의 통합은 진정 이루어졌을까.
□ 역사거리
꾸리찌바 도시계획연구소는 도시변화의 계획과정과 그 결과를 네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는 상호 유기적인 인과 관계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 네 가지 변화는 물리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이들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역사거리는 위의 네 가지 발전 단계 중 마지막 단계, 즉 ‘도시의 문화적 혁명’ 결과인데 이는 물리적 변화의 산물이었고 경제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라는 과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꾸리찌바의 도시문화정책은 이 역사 거리를 비롯하여 도시전역에 걸쳐 문화적 가치 및 민족적 다양성을 보존하도록 하는 일련의 사업들을 포함하고 있다.
일련의 사업들이란 도심을 재생시키거나 역사적 건물과 문화유산을 보호한다거나 혹은 오래된 건물을 새롭게 재활용하거나 문화재단을 설립하는 등을 말한다.
거친 숨결로 물을 뿜는 말(馬)이 조각된 아름다운 분수가 광장입구에 자리한 역사거리는 이 도시의 문화정책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거리는 깨끗하게 잘 간수되고 있었으며 건물들은 한 채 한 채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일요일 오전에는 벼룩시장이 열리지만 내가 갔을 때는 평일이라 벼룩시장 대신 우리의 포장마차와 흡사한 노점상 몇 군데에서 치즈와 햄, 과자, 과일주스 등을 팔고 있었다. 가게를 찾는 사람도 많이 없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에 비해 그 연조야 미미하지만 도시의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게 관리하려는 도시행정 당국의 마음씀씀이를 알 수 있는 공간이었다.
꾸리찌바 시가 '창조된 토지(created surface)'라 명명하여 채택한 도시정책의 결과물인 가리발디 하우스(Garibaldi House)가 광장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창조된 토지(created surface)'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민간소유의 토지와 건물을 공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소유주에게 다른 개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시가 필요한 것을 취하는 역사유적 확보정책이다.
가리발디 하우스도 꾸리찌바 시에 있는 이탈리아노 클럽(Club Italiano)이 소유하고 있던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이었지만 과거처럼 복원할 경제적 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꾸리찌바 시는 이 단체에 다른 인센티브를 주면서 복원한 건물이다.
내가 찾았을 때, 마침 가리발디 하우스 내에는 무슨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지 정장차림을 한 남녀가 많이 모여 왁자지껄했다.
역사거리를 약간 비껴 나오자 뽀띠 라자로또(Poty Lazzarotto)의 ‘꾸리찌바와 그 사람들’이란 제목의 벽화가 여행자를 맞아주었다. 원통형 정류장과 식물원, 지혜의 등대, 그리고 ‘신선한 물 프로그램’ 등 꾸리찌바의 다양한 특징들을 형상화한 이 벽화는 약 30센티미터 정방형 타일로 모자이크되어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현장에서 페인트로 그린 것이 아니라 타일 한 장 한 장을 구워 만든 작품이었다. 아무렇게나 시공된 콘크리트 위에 원색의 상업성 칠만 보아 온 내 눈에는 그 자체로서 경이로웠다.
뽀띠 라자로또(Poty Lazzarotto)는 이 도시가 낳은 유명한 미술가인데 이 벽화 외에도 도시 여러 곳에 꾸리찌바의 풍물과 역사를 소재로 한 그의 벽화가 있다.
□ 빠이올 극장
130여 년 전인 1874에 건설된 탄약창 건물을 1971년에 개조하여 만든 아름다운 원형극장이다. 도심 외곽지역에 있었지만 이 연극관의 개조는 시내에 있는 기념물의 보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꾸리찌바 도시문화혁명의 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풍스러운 외형도 눈을 끌었지만 이 건물을 비껴간 듯 계획된 사방의 도로를 보면서 막무가내로 직선을 그어대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케 했다. 마치 마산의 삼각지공원과 같이 도로 속의 섬처럼 생긴 삼각의 잔디 공간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외벽의 치장도 없었고 그 흔한 입구 캐노피조차 없었다. 관람을 마친 후 비가 오면 불편하지 않을까 라는 주장이 건물의 원형을 지킨다는 주장에 밀린 것 같다.
건물 관리인은 ‘공연은 3월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하면서 부탁도 하기 전에 구경하라면서 실내 등을 켜주었다.
내부의 바닥과 벽도 새로 시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화장실과 복도는 추가로 만든 것이었으나 기존의 질감에 잘 어울렸으며 공간이용이 탁월하였다. 특히 관람석 뒤편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원형 철재 계단이었는데 내 한 몸도 겨우 오늘 수 있는 규모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필요한 통로로서의 기능을 잘하고 있었다.
무료 연주도 자주 있으며 유료일 때는 5리얄(한화 약 2,200원) 정도 받는다고 했다.
단순한 원형 건물인데 중앙부에 동심원 형태가 치솟아, 이단 원통형인 이 건물의 공간적 특성을 이용해 공연공간으로 개조한 건축적 제약에 따라 무대는 전형적인 아레나(Arena stage, 무대가 객석 속으로 돌출된 형)형이었다. 무대바닥은 원형으로 마루판만 깔려있었다. 객석은 가는 원형 철봉으로 엮은 후 검은 색 가죽을 씌워 만들었으며 좋은 가시선을 확보하기 위해 뒷자리로 갈수록 객석의 각을 심하게 치켜들었다. 공연자와 감상자가 서로 호흡을 느낄만한 크기와 형태를 가진 공간이었다. 중앙에 솟아 있는 원형 지붕의 벽 아치창의 유리에는 색이 칠해져 있어서 어두운 실내로 약하지만 형형한 빛을 실내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입구의 작은 로비에는 출연진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안내하는 민군의 말로는 우리나라의 나훈아 패티김 수준의 유명 연예인도 있다고 했다.
얼핏 남루해 보이는 빠이올 극장을 나오면서, 천 석이 넘는 고급 문화회관과 수백 석의 공연시설에만 관심가지는 행정가들과 예술인, 그리고 건축가인 자신의 못남이 부끄러웠다.
건축적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문화는 무엇인지, 진정한 건축가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생각게 했다. 충격이었다.
□ 오페라 데 아라메 극장
도시의 대표적인 랜드 마크 중 하나이다. 외국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며 시가 개최하는 대부분의 문화 이벤트가 열린다. 이곳은 원래 폐광지역이었지만 시가 광물회사로부터 저가에 구입해 주변지역을 자연 상태로 복원함과 동시에 오페라 하우스를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했다.
자이메레르네르 시장이 직접 설계했다는 이 건물은 230톤의 철강을 이용해 80명의 기능공들이 60일 만에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객석 규모는 약 1,000석이다.
꾸리찌바의 도시행정 철학은 경제성, 신속성, 단순성이다. 아라메 극장은 이런 꾸리찌바 시의 행정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물이었다.
쇠와 유리로만 지은 건물. 채석장으로 황폐해진 숲 속에 지은 건물. 채석으로 깊게 골이 페인 산 형상을 절묘하게 이용해 지은 건물. 경이로웠다.
물 위 공중을 가로질러 건물로 들어가는 오버 브리지 구성도 일품이었지만 브리지의 바닥을 철재 그레이팅(steel grating)으로 시공해 밑이 훤하게 보이는 구조라는데 놀랐다. 하지만 밑이 훤하게 보여도 심리적으로 전혀 위험을 느낄 수 없었다.
원형 파이프를 직선 혹은 곡선 가공하여 구조재로 사용하였는데 응력에 비해 부재의 사이즈가 모자랄 경우 큰 부재로 무겁게 처리한 것이 아니라 가는 파이프를 여러 가닥 이용함으로 투박함을 없앴다. 숲 속에 자리 잡은 이 건물의 외벽은 얇은 유리 한 장이었다. 숲 속에서 공연을 본다는 느낌을 극대화시킨 것이 설계자의 의도였다.
지붕은 폴리카보네이트(유리처럼 투명한 플라스틱의 얇은 판) 돔으로 되어 있어서 햇빛이 훤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잠시 건축적 의문을 가졌으나 비를 맞지 않는 야외극장이라고 생각하니 의문이 해소되었다.
무대의 규모는 적절하게 컸으나 기계장치를 갖춘 것 같지는 않았고 오케스트라 피트는 갖추어져 있었다. 공연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일 터.
외부의 숲과 내부의 극장을 구획하는 유리판은 긴밀성도 없었다. 사계절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고급공연을 안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국내외의 유명 음악인도 공연을 했다고 하며 꾸리찌바 시민들도 즐겨 찾는다고 했다.
건물 옆 절벽의 암벽에는 이곳을 찾은 유명인사들의 방문 기념패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맨 아래층에는 전시관이 있는데 시 홍보관으로 사용된다고 했다.
숲 속의 극장이라면 그저 건물로 접근할 때만 숲을 느끼지, 공연장 내에 들어서면 숲 속의 건물이든, 도시 한복판의 건물이든 동일한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아라메는 진정한 숲 속의 극장이었다. 다만 비를 맞지 않는, 소리가 흩어지지 않는 숲 속의 극장이었다. 숲과 하나가 되는 실내 공간 연출, 정말 그 절묘한 발상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극장 아라메는 그 자체로 좋은 관광지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라 공연도 없었는데 수많은 관광객을 만났다. 이 도시의 주요 관광자원이었다.
값비싼 대리석과 황동을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은 극장이 나올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성과라 할만하다.
돌아오는 도중 생각에 빠졌다. 만약 이런 시도를 국내에서 했다면, 브리지의 바닥을 뚫어 놓으면 위험해서 되겠느냐, 실내 벽을 유리로 하면 음향이 어떻게 되느냐, 지붕에 빛이 들어오면 여름엔 더워서 못하고 보름밤에는 달빛도 들어올 것인데 어떻게 하느냐, 2층 복도 밑이 트였는데 밑에서 보면 여자 속옷이 훤히 보일 텐데 등등 얼마나 많은 불만과 반대에 부딪쳤을까, 지어지기나 했을까.
□ 지혜의 등대, 도시의 등대
도시의 주거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이 시설은 꾸리찌바 시가 빈민들에게 ‘지혜의 길로 안내하는 도서관’을 제공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등대이다.
이곳에서는 학생과 빈민들에게 아침 8시부터 반 9시까지 도서를 대여해 주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각 등대 당 약 3천여 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으며 책은 한 달에 최고 4만 7천권이 대여된다고 한다.
박용남은 ‘지혜의 등대’를 두고 꾸리찌바 시가 소외된 도시 빈민과 서민의 가슴속에 희망을 싹틔운 ‘문화의 나무’라고 했다. 그는 어느 ‘지혜의 등대’ 책임자의 말을 빌려 표현하기를 ‘지역 주민들에게 이 도서관은 선물이다. 시내에 공공도서관이 있지만 이용하기가 힘들다. 이 지혜의 등대는 초등학생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민들이 이용한다. 책을 빌리고 조사도 하고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다.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주민들에게 이 등대는 문화적 혜택을 골고루 나눠주는 횃불인 셈이다’라고 소개했다.
3층의 철골구조물로 건설된 이 건축물의 기능은 단순했다. 외형은 바닷가의 등대를 모방해 설계했지만 불과 30여 평에 높이 16m의 건물이었다. 1층에는 책이 진열된 선반과 책상 등이 있고 2층에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조용한 방과 몇 개의 탁자 및 다섯 대의 컴퓨터가 갖춰져 있다. 등대를 중심으로 원통을 4분의 1로 자른 형상으로 직면은 채도가 높은 짙은 푸른색의 막힌 벽이, 곡면은 유리로 처리하여 낮에는 채광을, 밤에는 조명효과를 노린, 철골조의 심플한 구성이었다.
자동차로 꾸리찌바 시를 다니는 내내 지혜의 등대를 여러 개 볼 수 있었다. 지혜의 등대는 시내 초등학교의 도서관을 학교 담장 밖으로 끌어낸 어린이와 주부를 위한 공공 문화시설로서 꾸리찌바 시 전체에 5-60개가 있다고 한다.
등대 속에 설치된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면 경찰관 한 명이 밤 9시부터 근무하는 망루가 있고 비상전화도 가설되어 있다. 지혜를 밝혀주는 등대가 밤이 되면 지역사회에 아름다움과 안전을 제공하는 ‘치안의 등대’로 변하는 것이다.
한 조용한 마을의 ‘지혜의 등대’를 찾았다.
토요일 오후라 문은 잠겨있었지만 마침 열 서넛 살 되어 보이는 아이가 한 명 앉아있어서 말을 걸어보았다. 아이는 이곳을 자주 찾는다면서 이 동네 아이들 모두 여기에 자주 온다고 했다. 인터넷을 주로하며 책도 간혹 빌려본다면서 지금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건물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자기들의 놀이터이자 모임장소라고 했다.
‘도시의 등대’란 ‘지혜의 등대’와 모양과 기능은 비슷하지만 규모가 조금 큰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꾸리찌바에 단 한 채가 있다. 동네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토요일에는 오후 1시까지만 운영을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찾은 시간이 아직 일러 관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여성 관리인 ‘호사우바’씨는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였고 익숙한 태도로 건물의 용도를 설명하였다. 등대 이용자는 주로 학생과 주부들이며 한 달에 2천여 명이 사용한다고 했다. 지혜의 등대에는 인터넷과 책이 있지만 이곳은 인터넷과 비디오테이프가 구비되어 있다고 했다.
1인당 하루 1시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으며 3장의 프린트까지 무료라고 했다. 1995년에 건축하였으며 자신은 이곳에서 6년 째 근무 중이고 공무원이라고 했다. 총 6인이 하루 3교대로 두 명씩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근무하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매우 보람 있으며 즐겁다고 했다.
우리가 방문하는 동안, 실내에는 한 모녀가 비디오를 감상하고 있었다.
등대 위로 올라갔다. 생각보다는 높았다. 동네가 한 눈에 시원하게 내려보였으며 동네에서도 이 건물이 잘 보이게 설계되어 있었다.
건물은 쇠와 나무를 이용하여 간단하게 지었으나 건물의 조형성과 공간 구성, 색채를 사용한 것을 보아 매우 수준 높은 건축가가 설계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간단하고 검소하며 건축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시설물, 익히 알고 있었던 꾸리찌바의 도시행정 철학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 복합근린시설 - 시민의 거리
도시를 위한 혁신적인 사업이 개시된 이래, 꾸리찌바 시는 주택, 하수도망, 학교, 보건 및 데이 케어 센터와 같은 다양한 사업에 역점을 기울였다. 그 중 두드러진 사업 중 하나가 하파엘 그레까 시장(1993-1996년)이 추진했던 ‘시민의 거리’였다.
내가 찾은 ‘시민의 거리’는 1995년 3월 29일 최초로 개장된 것이었다.
꾸리찌바 도시 전체에 다양한 형태로 여덟 개나 지어져있는 이 시설은 시내버스의 터미널기능과 공공업무 기능 그리고 근린생활을 위한 시설 등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공간이다.
여러 종류 버스의 종착역 혹은 환승역으로 사용되는 점에 착안하여 건물 외부에 원형 도로가 외부도로를 연결하고 있었으며 원형도로를 로터리로 이용하여 다시 출발할 차들이 원 내부로 들어와서 밖으로 나가는 시스템이었다.
지면에서 원활하게 버스를 출발시키기 위해 절반으로 나누어진 두 건물을 공중(2층)에서 브리지로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로 만들었는데 철골을 이용하여 간편하게 건축했으나 건물이 기대하는 의도는 특별하였다.
한쪽 건물의 용도는 공공서비스의 분산화를 위한 공적인 업무들, 즉 은행, 각종 서류발급, 청소년 상담실 등이 있었고 다른 한쪽의 용도는 부식가게 채소 혹은 과일가게, 슈퍼마켓 등 사적인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농구와 미니축구를 할 수 있는 규모의 실내 체육관이 별도로 제공되고 있었다.
이 시설은 원거리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공적인 업무는 물론 별도로 도심으로 나갈 필요 없이 필요한 것들을 원 스톱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착안이었다.
철판 곡면지붕에 노란 색을 칠하여 건물의 인지도를 높인 점과 간편하면서도 사려 깊게 이용자를 배려하고 있는 경사로, 영역을 구획하는 긴 벽과 체육관의 곡선지붕 등 건축 계획이 탁월했다. 책에서 제공된 사진 외에도 건물이 더 증축되어 있었다.
□ 상 로렌소 창조성 센터
빠이올 극장과 마찬가지로 원래 상 로렌소 공원에 있는 양초와 아교를 생산하는 공장을 1974년에 창조성 센터로 전환시킨 곳이다.
이곳에서는 ‘유아 및 청년 환경교육프로그램’과 지역사회의 빈민 어린이, 일부 학생과 강사들에게 꾸리찌바 시의 전통적인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교육을 시킨다.
마침 토요일 오후라 사용자는 없었고 문도 잠겨있었다. 관리를 맡고 있다는 60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자신도 2개월 전에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른다고 했다.
건물은 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창조성 센터로 전시와 교육을 하며 한 건물은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건물관리는 시에서 하는데 지역 주민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했다. 어린이 놀이터와 몇 개의 보조 건물들이 함께 있었다.
놀이터에 아이와 함께 나온 40대 남자를 만났다. 조그만 건설업체의 직원이라면서 가까운 곳에 살지만 직접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라며 묻는 말에 답을 하지 못했다.
꾸리찌바에는 85년부터 살았다면서 매우 좋은 도시라고는 생각하지만 도시정책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것이 없다고 했다.
□ 환경개방대학
꾸리찌바에서는 도시의 환경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지속적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그 가운데 성인들을 위한 중요한 환경 교육장으로 1992년 환경개방대학(ULMA)이 설립되었다.
자이메 레르네르의 작품인 이 혁신적인 통나무 건축물은 보스께 자니넬리 공원의 환경지구 내에 있는데 기둥은 통나무로 제작된 폐전주를 재활용한 것이다.
이곳은 비단 꾸리찌바 뿐만 아니라 브라질 내에서도 환경의식과 환경보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환경교육의 메카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개인은 물론 모든 단체에 개방되며 도서관도 마련하여 환경관련자료 및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지속가능한 개발에 관한 연구와 친환경적인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환경산업 부분의 시장조사와 기술자문도 수행하고 있다.
우리를 태우고 다닌 택시운전기사도 이곳에서 일주일 간 교육받은 적이 있다면서 교육의 내용도 좋지만 교육공간이 아주 좋은 곳이라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환경교육 공간답게 입구부터 달랐다. 좌우에 키 큰 열대림으로 꽉 찬 약 100m 정도의 꾸부렁한 작은 협곡이 진입로였는데 폭이 미처 2m 밖에 되지 않았다. 이 협곡의 바닥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위로 판자를 깔아 길을 만들었다.
내가 경험한 것 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환상적인 진입이었다. 서늘한 기운을 받으며 더위를 잊은 채 걸었다.
진입 후 나타난 첫 장면은 채석으로 깎여진 절벽과 그 아래의 큰 연못이었다. 절경이었다. 채석장이었던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물가에는 가족과 연인들이 몇 쌍 조용하게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운전기사가 뭐라 말하며 황급히 손짓해 가보니 오리 한 쌍이 갓 부화한 새끼 대여섯 마리와 숲 자락에 웅크리고 있었다.
석산개발이 끝나 버려진 땅이 되어버린 장소가 사람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명소로 바뀐 것이다.
기둥으로 받쳐 공중에 지은 몇 개의 작은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순 목조였다. 건물을 빙빙 돌면서 오르는 경사로를 몇 바퀴 돌아서 오르면 입구에 도착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자그마한 강의실과 사무실을 갖추어 놓았으며 건물의 관리와 운영은 환경단체에서 한다고 했다. 가장 친환경적인 건축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있었으며 시설 자체가 좋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 전신전화국 전망대
시내의 북쪽에 위치한 이 전망대는 꾸리찌바 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전망대에서 다섯 개의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중심상권과 고층 건물이 형성된 꾸리찌바 도시체계를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단독 주택지에 얼마나 숲이 많은지 도시 스카이라인이 얼마나 잘 보호되고 있는지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도시의 경관 관리가 왜 필요한지 말없이 설명하고 있었다.
□ 대중교통체계와 원통형 버스 정류장
꾸리찌바를 이해하는 열쇠는 도시의 도로망과 대중교통체계를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
꾸리찌바의 도시성장은 5개의 주요 간선교통축을 따라 이루어졌다. 애당초 꾸리찌바 시의 계획에 따르면 간선교통축의 도로는 다른 가로와 달리 폭이 60m나 되는 광로였다. 그런데 이런 광로 계획은 도로 폭의 확장과 신설을 위한 토지수용에 막대한 재정을 투자해야만 한다. 그래서 꾸리찌바 도시계획연구소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고비용에 대해 효율적인 대안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꾸리찌바 시가 국제사회에 자랑할만한 ‘3중 도로시스템’이다.
‘3중 도로시스템’이란 평행한 도로 3개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사용되는 것으로서 중앙도로는 중심부에 2개의 급행역류버스 전용차선이 있고 양측에는 자동차 차선이 배치되어 있으며 중앙도로 양쪽으로 각각 한 블록씩 떨어진 2개의 도로에는 승용차, 일반버스 그리고 트럭을 위한 고용량의 일방통행로가 운행되고 있다.
이 세 도로가 하나의 교통시스템으로 관리되는 것이다.
대부분이 일방통행로인 꾸리지바의 창조적인 교통시스템은 우리나라의 도로체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효율적이다. 꾸리찌바 시내 모든 교차로의 교통신호는 철저하게 2단계로 운영돼 우리의 3-4단계에 비해 교차로 용량이 거의 1.5-2배이고 신호 대기 시간은 불과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꾸리찌바는 지하철이 없다.
엄청난 재원과 오랜 시간 그리고 역 근처의 일부 시민만 혜택을 입는다는 이유로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들은 지표면 위에 있는 버스를 어떻게 하면 지하철과 동일한 효력을 갖추게 할 수 있을까하는가에 집중적으로 관심했다.
그런 고민 끝에 이미 20여 년 전, 버스 전용차선을 도입했으며 나아가 이용 효율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원통형 정류장을 개발했다.
꾸리찌바 하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원통형 정류장이기에 이 시설을 길에서 보는 순간 ‘아, 내가 구리찌바에 와있구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승객이 버스에 승차하기 전에 운임을 지불하는 형식의 이 정류장은 자이메 레르네르 시장이 캔을 눕혀 놓은 형상에서 착안한 것이다. 맑은 곡면 유리로 단순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로서도 가치가 있었다. 버스 바닥 높이와 맞춘 정류장 바닥은 두 단의 계단으로 오를 수 있었으며 수시로 도착하는 버스 출입구에서 정확하게 바닥판이 튀어 나와 버스와 정류장의 바닥을 연결시켜 주었다. 버스를 타고난 뒤 요금 내는 시간과 버스를 타기위해 계단 오르는 시간을 절약한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승하차의 동선도 구분되어 있었다.
당초에는 없었던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시스템은 추가로 조성하고 있었으며 ‘사회적 요금’이란 이름 아래 이용거리 상관없이 단일요금체계도 확립했다.
버스는 직행, 지구간, 지선, 급행 등 노선과 기능이 차의 색깔로 구분되고 있었는데 이들 중 급행이중굴절버스는 직행버스로 별도의 버스전용구간으로만 다니기 때문에 속도가 아주 빨랐다. 실제로 같은 거리를 택시로 나갔다가 들어 올 때는 굴절 버스를 탔는데 속도가 택시보다 느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빠른 듯 했다. 500m에 정류장이 하나 씩 있었기 때문에 자주 정지했지만 타고 내리는 속도가 워낙 빨라 지체하는 시간을 느끼지 못했다.
지하철 건설비 80-100분의 1 정도로 저렴한 시설비용만으로 매일 180만 명의 승객이 이용함으로써 꾸리찌바 보다 인구가 훨씬 많은 히오데자네이루의 지하철 승객과 비슷하고 뉴욕의 버스 승객보다 더 많은 승객을 수송시키며 워싱턴보다 더 많은 승객을 1㎞ 당 100-200배 더 싼 값에 수송한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볼보자동차회사에서 제작한 붉은 색의 굴절버스 안에는 친절하게 붙여 놓은 스텐레스 쓰레기통과 함께 이용자를 배려하여 손잡이가 많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이즈는 꾸리찌바의 도로 사정에 맞추어 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꾸리찌바의 혁신적인 버스교통시스템은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지하철이나 경전철 그리고 모노레일의 필요에 대체할 수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수년 전에는 뉴욕시의 ‘지구의 날’ 행사 초청으로 원통형 정류장과 굴절버스 등이 옮겨져 5일 만에 그 시스템을 설치하고 2개월간 일정 구간을 왕복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이야기-
우리나라의 컴퓨터 보급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 그러나 브라질의 그것은 우리에 비해 형편없다.
그런데 얼마 전 마산의 시내버스 요금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자 마산시는 지역의 대학에 버스요금 적절성에 대한 연구용역을 시켰다. 버스 요금 산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데이터는 승객의 숫자. 그래서 연구를 보조하는 조사원이 승객 수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시내버스가 출발할 때 버스를 타고 일일이 승객을 센 적이 있다.
하지만 꾸리찌바에서는 승객 수는 물론 타이어 관리, 연료사용량 등 시내버스에 관한 모든 자료가 100% 전산화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정보통신망이 발달해 있고, 인구 일인당 이동전화 소유율이 가장 높으며, 인터넷 이용율과 속도가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정작 사회적으로 중요한 시내버스의 관리는 수작업으로 하는 반면, 동일 분야에서 아직 우리보다 한참 아래 수준인 브라질의 한 도시에서 시내버스 관리 전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 진 사실의 의미를 되새겼다.
인터넷이 상업화 개인화된 우리에 비해 공공의 이익에 우선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작 필요한 곳에는 시설수준이 앞서있다는 사실이 이국 여행자를 부끄럽게 했다.
□ 파벨라
파벨라의 어원은 우리가 ‘리우’라고 부르는 히오데자네이루의 언덕에 있는 ‘파벨라 브랑까(흰 파벨라 나무)’라는 아름답고 낭만스러운 고유명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무허가 판자촌이 난무하기 전까지만 해도 히오의 언덕은 탐스런 하얀 꽃을 피우는 콩과식물 파벨라 브랑까로 뒤덮인 아름다운 곳이었다. 꽃동산이던 히오의 해변 언덕이 판자촌으로 탈바꿈하게 된 시기는 대략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6년 바이아 주에서 발생한 무정부주의자들의 반란을 평정했던 공화국 군대가 당시 브라질의 수도였던 히오로 철수하여 이 해안 언덕에 하얀 천막을 치고 머물기 시작한 것을 두고 하얀 파벨라 브랑까와 비슷하다 하여 파벨라로 불렀다. 그 이후 도시를 찾아 농촌을 떠난 이농민이 군인들이 떠나고 없는 이 해안 언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는데 그 이후 파벨라는 나무 이름 대신 빈민촌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굳어지면서 전국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파벨라를 보고 싶다는 여행자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택시 운전기사는 파벨라에서 걷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엄살을 떨었다.
때 마침 우리가 찾은 파벨라에는 많은 사람들과 경찰이 웅성이고 있었다. 택시기사는 아마 총기사고가 난 것 같다고 하면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했다. 순간 덜컥 겁이 나 운전사가 권하는 대로 내리지 않고 천천히 택시로 동네를 돌았다.
여느 빈민촌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 더러운 하천, 좁은 골목길, 윗도리를 벗은 아이들과 남자들, 씻지 않은 얼굴, 지저분한 빨래, 꾸리찌바에도 파벨라는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다.
두 번째 찾은 파벨라는 ‘빌라 데 오피시오스(Vila de Oficios)’라 불리는 주상복합 주택단지가 있는 곳이었다.
꾸리찌바 시가 빈민의 주택공급과 그들이 일하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서 일층에는 가게를, 이층에는 살림집을 넣어 만든 주상복합 건물인데 중세시대의 도읍으로부터 이 프로젝트의 영감을 받아 시행한 것이라 했다. 2층에는 부엌, 목욕탕과 두 개의 침실을 갖춘 40㎡규모의 주택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건축했다고 하는 이 주상복합단지는 지금도 당시의 건설의도를 잃지 않고 사용되고 있었다.
대출을 이용한 자비 부담이어서 감당할 수 있는 서민들만 입주했다고 하는데 일층 가게의 종류는 제빵, 카펫제작, 전기제품 수리, 자전거 수리, 양복, 미용 등 실제 필요한 가내수공업종의 점포가 들어있었다.
이곳에서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전기료와 관리비 등 최소한의 비용만을 지불하면서도 아내와 남편이 같이 일하므로 불필요한 통행수요를 유발치 않는다는 이점까지 있다고 건립목표를 세웠으나 막상 건립 후 모든 것이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IPPUC의 리아나 벨리쉘리씨의 설명에 의하면 설립초기에는 그들의 생활과 관계없는 주점을 개업했다가 터무니없이 실패한 후 지금의 용도로 바꾸었는데 조금씩 나아진다고 한다.
이를 두고 흠집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계획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이메 레르네르는 이런 지적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을 미리 알려고 하지 않고 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작이 반입니다.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실패 없이 일을 실천할 수 없듯이, 실패는 창조의 한 부분입니다. 시민들을 통해 알게 되는 도시의 잘못된 점과 시행착오를 꾸준히 고쳐나가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 공업단지
1970년대 들어서면서 꾸리찌바는 경제적 혜택을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해외투자를 적극 유치해 공업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시의 남부에 위치한 광활한 지역에 IPPUC의 계획에 의해 1973년부터 공단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공업단지로 선택한 이유는 지형, 물, 배수와 풍향을 감안하였고 특히 정유공장과 가깝다는 이유도 작용하였다.
1975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이 공업단지는 ‘공단이 하나의 공원이자 정원이어야 한다’는 자이메 레르네르의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으로서, 한마디로 ‘자연공원 안의 공업단지’이다.
공단에 입지한 대부분의 회사들은 시가 제공하는 높은 삶과 교통의 질 때문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자료에 의하면 꾸리찌바 공업단지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상 파울로의 노동자보다 출퇴근에 3시간이나 적게 소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1주일에 20시간, 1년에 1,000시간, 연령을 72살로 볼 때 평생으로 치면 9년이나 적게 소비하는 것이다.
공장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광활한 지역이라 걸을 수도 없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가 때때로 차에서 내려 관찰한 정도다.
예상했던 대로 이곳 공단은 눈에 익은 우리의 공단과 달리 각 공장들이 녹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정책도 정책이었겠지만 광활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라고 하는 자연조건이 더 큰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수목으로 담장을 조성한 것이나 기존의 수목을 보호하면서 조성한 공장시설은 바둑판 식의 삭막한 우리 공단과는 많이 비교되었다.
□ IPPUC (도시계획연구소)
IPPUC의 리아나 벨리쉘리(Liana Vallicelli)를 만난 것은 1월 18일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건축가이며 도시계획가인 그녀에 대해서는 ‘꿈의 도시 꾸리찌바’ 255쪽에 잘 묘사되어 있다. 단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도시전문가가 아니라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삶의 질에 관해서까지 진지하게 접근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직접 만나 꾸리찌바 도시정책의 계획과 결과, 그리고 비전에 대해 설명하는 자신감찬 목소리와 눈매를 보고 그녀가 매우 능력 있는 전문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제작되어있는 파워 포인트 자료를 이용해 약 두 시간 동안 설명하였다. 이미 책을 통해 읽었던 내용이라 설명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매우 진지하게 설명했으며 20년 이상 IPPUC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꾸리찌바 시가 빈민복지와 도시환경 둘을 동시에 겨냥한 지역 화폐 성격의 전표의 사용 상태를 물었더니 현재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지역화폐란 주민들이 환경쓰레기 혹은 폐기물을 수거해 오면 그 양에 따라 전표를 주는데 그것으로 식품을 교환할 수 있도록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그녀는 이 제도가 빈민들의 식생활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면서 브라질인은 쌀, 팥, 야채 등이 주식인데 빈민들은 이 외의 것을 먹을 기회가 없지만 이 프로그램으로 과일, 감자 등을 비롯한 다른 영양소가 있는 음식물의 섭취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효과 외에 쓰레기 수거로 환경개선도 되고 환경교육도 된다고 했다. 한 방법으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꾸리찌바의 문제점으로 인구와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도시 사정이 열악해 질 미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이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한편 역사 및 문화 보존에 주안점을 둔 도시 관리를 하고 있는데 도시가 급격하게 변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도시의 정체성이 상실될 수 있다는 것도 우려했다. 그 예로 함부로 나무를 베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꾸리찌바에서는 좋은 나무가 있는 지역은 특별한 인센티브를 주어 나무를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나무가 아니라 유적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했다.
설명이 끝난 후 내가 미리 준비해간 20여 개의 질문서를 이용해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녀는 도시의 물리적 문제 외에도 환경개방대학, 빈민을 위한 주상복합 주택단지(Vila de Oficios)의 운영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업무와 관심의 폭이 아주 넓었다.
3시간에 걸친 설명과 토론이 모두 끝난 후, 가지고 있던 책 ‘꿈의 도시 꾸리찌바’를 보여주었더니 책의 저자를 알고 있다면서 표지를 복사하고 싶다고 했다.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던 터라 한국으로 돌아가 책을 한 권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리아나 벨리쉘리와의 오전 미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잠깐 쉰 뒤, 오후 2시에 다시 IPPUC를 찾았다. 이번에는 URBS(도시공사)의 연구원인 이스마에우 프란사(Ismael França) 씨를 만났다. URBS는 IPPUC 건물 내에 있었다.
그는 먼저 꾸리찌바의 교통체계를 소개하는 비디오테이프를 한 개 틀어 주었는데 한국어로 제작된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제작한 것이라면서 작년에만 해도 한국에서 160여명이 다녀갔다고 했다. 테이프는 URBS에서 제작한 것이라면서 내게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교통전문가인 이스마에우 프란사는 주로 자신의 연구 분야인 교통문제에 대한 이야기했다. 꾸리찌바의 버스체계는 철저히 전산으로 계량됨으로써 버스요금이나 관리비, 효능 등에 차질을 없앤다고 하면서 전날의 수입금은 다음날 오후 2시까지 정확히 보고 된다고 했다.
특히 그는 수년 전부터 꾸리찌바 시가 집중적으로 관심가지고 있는 장애인과 노약자에 대한 배려에 대한 설명을 많이 했다.
노약자는 모두 시에 등록하고 시가 발부한 사진이 부착된 증명서를 소지하고 있으며 장애인 택시도 1991년부터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장애인을 위한 공공차량을 42대 준비하여 어린이 장애인은 집에서 학교까지 언제나 무료로 데려다 주며 정기적으로 시내에도 태우고 가는데 이 차의 이용자는 2,200명 정도라고 했다.
버스를 무료로 사용하는 시민은 65세 이상 노인, 장애인, 장애인의 동행인, 우체국 직원, 제복을 입은 경찰, 법원 직원 등 20만 명이며 학생은 절반을 받는다고 했다. 만약 무료탑승을 없애면 지금의 버스 요금 1.6리얄에서 1.4리얄로 내릴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현재는 2.5인 당 자동차 1대이지만 날로 늘어나는 자가용에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다면서 현재는 중산층도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IPPUC 연구원들도 대부분 버스를 이용하고 자신도 마찬가진데 그 이유는 버스가 훨씬 편하고 빠르고 싸기 때문이라 했다. 초기에는 자가용 타기를 원한 적도 있으나 버스 시설이 점점 좋아지면서 사정이 바뀌었다고 했다.
자전거 도로는 전 도시에 120 킬로미터 있지만 출퇴근용보다는 주로 레저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날씨 및 지형 때문에 레저 외에 출퇴근에 자전거를 이용하는 교통체계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와도 리아나 벨리쉘리와 마찬가지로 설명이 끝난 뒤 미리 준비해간 질문지를 이용해 질문과 답변 식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끝나기까지는 역시 3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는 나의 꼬리를 문 질문마다 세심하게 성실하게 응했다.
꾸리찌바 시민들은 도시계획전문가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초기에는 시민들에게 의심받는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최종 질문을 던졌다. 기존 도시들, 특히 한국의 도시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고.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도시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라고 답하면서 ‘거시적으로 정확하게 계획을 세워야 하고, 일단 세운 계획은 시장이나 담당자가 바뀐다고 해서 수정해서는 안 된다, 꾸리찌바는 30년 전의 계획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담당자가 자주 바뀌어도 안 된다, 나 역시 20년 이상 이곳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
IPPUC(도시계획연구소)는 그 이름에 걸맞게 품격을 갖춘 건물과 정원이 갖추어져있었다. 정문 입구에서는 미리 예약된 방문자들만 출입을 허용하고 방문자임을 확인하는 스티커를 한 점씩 발부했다.
오전과 오후 두 번 씩 IPPUC를 찾았는데 그 때마다 택시기사들이 한번의 설명으로 별다른 표시간판도 없는 이 연구소를 쉽게 찾아가는 것으로 보아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IPPUC-
무계획적으로 성장해 온 꾸리찌바에 근대적 도시계획이 처음 시도된 것은 1943년 프랑스의 유명한 도시계획가이자 건축가였던 알프레드 아가쉬에 의해 입안된 일명 ‘아가쉬 계획’이었다. 주거지에 둘러싸인 중심지역을 핵으로 환형도로에 방사형 도로를 연결한 교통체계를 제시한 이 계획의 기본 원칙은 중심상업업무지구를 강화한 고전적인 개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브라질에서 일기 시작한 자가용 붐과 공공자금 부족으로 이 계획에서 제시한 물리적 경계가 지켜지지 못하고 도시는 무분별하게 교외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가쉬 계획은 그 이후에도 도시의 골격을 만들어 가는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1964년 아가쉬 계획을 수정한 ‘예비도시계획’이 마련되었고 이것을 기초로 ‘꾸리찌바 종합계획’이 입안되었는데 이 계획을 집행하면서 도시개발 사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65년 도시계획연구소(IPPUC)가 창립되었다.
도시학자 자이메 레르네르 소장과 우수한 기술자들이 한 팀이 된 이 연구소에서는 ‘꾸리찌바의 내일’이라는 지역 순회, 주민 참여 형의 공개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 이렇게 완성한 꾸리찌바의 종합계획은 우리의 도시계획과 접근방식에서 차이가 많다.
교외에 베드타운이라 부르는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하고 도시의 외연적인 확산을 유도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교통체증을 비롯한 수많은 도시문제는 도로의 규모로서 해결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다. 그러나 꾸리찌바는 중심 도시의 물리적 확장을 제한하고 상업․서비스와 주거기능은 중심지로부터 ‘구조적 교통축’을 따라 선형으로 확대되도록 도시발전 기본방향을 잡았다.
또한 이러한 계획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다수 개발도상국의 도시들이 토지이용계획에 따른 성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정확하고 올바른 원칙에 따라 계획을 마련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감으로써 성공에 이르러 현대 도시사에 길이 남을만한 사례를 남겼다.
□ 땅구아 공원
원래 채탄장이었던 이곳의 소유주가 공원으로 복원할 것을 시에 제안하여 조성하게 된 곳이다. 오페라 데 아라메 극장처럼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린 채 설계한 공원으로 꾸리찌바 공원사에 있어서 새 지평을 연 장소로 평가받고 있다.
입구 지역에는 전망대 기능과 휴게시설을 갖춘 커다란 전망용 건축물과 분수대가 있고 그 밑 절벽 아래의 호수에는 오리가 노는 수상카페가 있으며 호수 물을 끌어 올린 인공폭포가 있다. 또한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잘 개발되어 있었다.
개발 직 후 높은 위치에 자리 잡은 공원의 입지조건을 이용하여 주변의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전망대가 만들어지자 꾸리찌바 시민들은 즐거이 이곳을 찾았지만 최근에는 처음보다 많은 사람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전망대는 반원형의 회랑식 2층 건물이었는데 이곳에서 연못과 숲 그리고 도시를 바라 볼 수 있었으며 건물 양 끝에 탑을 세워 더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고 싶은 이를 배려하고 있었다. 적은 비용으로 만든 것이 인상적이
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채석으로 깎여진 까마득한 절벽 아래의 큰 못 위에 수상카페가 떠 있었다. 본 사람이면 누구나 내려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만한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점심을 그곳에서 우아하게 해결하기로 하고 내려갔더니 햄버그와 음료, 맥주 등만 취급하는 패스트푸드 식당이었다. 어디서 먹으나 햄버거 맛은 왜 그리 같은지.
□ 식물원
커다란 공원에 인공적으로 가꾸어 놓은 꽃밭 사이의 대각선 길로 사람들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 정점에 유리로 만든 식물원과 이 건물을 위요한 반원형의 유리전시장이 시설의 전부였다. 식물원은 초라했으며 유리전시장도 조각물의 내용과 달리 건축적 장치는 초라했다.
유리를 통해 나오는 밤의 불빛이 화려하여 내부조명이 마치 동화 속의 유리 궁궐처럼 보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황홀감을 준다는 설명과 함께 꾸리찌바를 소개하는 각종 유인물에 수록되어 있지만 여유로이 밤을 기다릴 수 없는 여행객이라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꾸리찌바 시에서는 ‘꾸리찌바 만세(Leve Curitiba)’라고 부르는 시 직영가게를 운영했다. ‘꾸리찌바 만세’란 ‘유아 및 청년 환경프로그램(PIAs)’에 의해 지역사회의 빈민 어린이, 일부학생 그리고 강사들에게 꾸리찌바의 전통적인 기술과 공예 즉, 채그릇 세공작업, 세라믹, 책 덮개, 종이기술, 무늬 놓은 두꺼운 천 만들기 등을 익히게 한 후 직접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으로서 시에서 직영하는 상점이다. 바로 그 ‘꾸리찌바 만세’가 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를 가진 여행자가 관리인에게 물으니 오래 전에 철거되었다고 답했다. 시의 모든 시도가 성공하지는 못했을 터.
가족과 함께 산책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조깅하는 이들과 벤치에서 긴 입맞춤으로 사랑에 열중하는 젊은 연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 바리귀 공원
꾸리찌바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공원이다. 꾸리찌바 시에는 빠라나 주의 젖줄인 이과수 강과 아뚜바, 벨렝, 바리귀, 빠디아, 빠사우나와 같은 이과수 강의 지류가 흐른다. 꾸리찌바 지역에 사람들이 모이면서 도시로 변한 것도 이 강들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인구가 집중 증가하면서 사정이 변했다. 무질서한 도시성장은 배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주변 교외지역의 신규개발을 촉진시켰으며 대부분의 하천을 복개하여 인공적인 지하수로로 바꿈과 동시에 습지와 계곡 및 수자원지역을 침식했다. 이처럼 무지한 도시 확장은 이윽고 강과 하천을 범람토록 했고 홍수가 도시를 강타하여 하천개발문제가 이도시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사안으로 등장하게 했다.
시가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인 꾸리찌바의 하천 정책은 많은 수변 공원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꾸리찌바를 세계에서 가장 생태적인 도시 중 하나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바리귀 공원도 이때 만들어졌는데 동물원, 자연림 등 다양한 시설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서 꾸리찌바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공원이다.
이 공원은 파벨라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한 공무원들이 불과 20일 만에 개발해버린 경이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 마치 단기간에 군사작전을 하듯 빠르게 기반공사를 마무리했지만 꾸리찌바에는 우리네와 같이 공사 감리의 허술함이나 부실공사는 거의 없다고 한다.
마침 토요일 오후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공원 외곽을 도는 자동차 길이 잘 나 있었으며 차로를 따라 숲 속 곳곳에는 바비큐를 즐길 수 있는 간단한 시설이 준비되어 있었다.
호수를 중심으로 주변에 수령이 많은 키 큰 나무와 그 사이사이로 잔디밭이 깔려 있었고 각종 레스토랑, 놀이터, 자전거 길 등이 잘 짜여져 있었다. 잔디 그늘에는 가족 과 연인들이 주말 오후를 느긋이 즐기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오리 모양의 작은 배를 타면서 즐거워했다.
수상 카페에서 찬 맥주를 한잔 마신 후 천천히 공원을 걸었다. 호숫가 키 큰 나무 그늘 아래 잘 가꾸어진 잔디 위를 걷는 맛이 일품이었다.
간혹 연인들의 선탠과 자전거를 세워 놓고 털썩 잔디 위에 주저앉은 아이들도 군데군데 눈에 띠었다.
공원을 찾은 한 가족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베드로’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41세의 남자는 아내와 고등학생인 아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딸과 함께 잔디 그늘에서 오붓한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부부가 모두 치과의사라고 했다.
도시로서의 꾸리찌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브라질의 경제적 인구분포를 보면 빈민이 자장 많고 그 다음이 중산층, 소수가 부유층이지만 다른 도시와 달리 꾸리찌바는 중산층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하면서 이런 현상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했다.
시가 빈민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많이 물리지는 않느냐고 물으니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문제 삼지 않는다고 했다.
부인은 특히 꾸리찌바의 버스 제도에 대해서 자랑을 많이 했다. 그래서 두 분도 버스를 이용하느냐고 물었더니 전에는 많이 탔으나 최근에는 타지 않는다고 하면서 고등학생인 아들만 탄다고 했다.
두 부부는 꾸리찌바 시가 도시를 가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북쪽 도시에 살다가 11년 전에 꾸리찌바로 이주했는데 아주 만족한다고 했다. 한가하게 공원 그늘에서 주말을 즐기는 네 가족의 만족감 속에는 아름다운 도시환경이 일조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원 곳곳에서 조깅과 배구 등 주말 오후를 운동으로 즐기고 있었다.
단지 가벼운 지적 호기심만으로, 비행기를 네 번씩이나 갈아타며 집 떠난 지 37시간 만에야 겨우 도착하는 이 낯선 도시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내가 살아야할 우리 도시를 생각하며 시작한 걸음이었다.
‘도시의 비전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해보기 위해 스스로 택한 여행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에서 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꾸리찌바가 우리네 도시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꾸리찌바 역시 말로 들었던 것처럼, 책과 그림에서 보았던 것처럼 ‘꿈의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 속의 모든 인간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언제나 ‘내일의 도시’였듯이 꾸리찌바는 내일을 기다려볼만한 ‘희망의 도시’였음은 분명했다. 이 도시를 디자인하는 사람들과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물리적인 평등뿐만 아니라 인간적 사회적 평등까지 도시 속에서 찾고 있었고 도시정책을 통해 시민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사명감과 비전을 품고 있었다.
그 비전은 이 도시에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시민의 가슴에 담겨 있었고, 2-30년 이상 한 가지 일을 한다고 하는 교통전문가의 담담한 말 속에 묻어나왔다.
거기에는 우리가 쉽게 넘지 못할 경계가 있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