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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때로 아니 계시는 듯하지만, 반드시 우리 신앙 여정을 굳건히 동반하시는 주님!
성향이 다른 여러 형제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살다 보니 참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성격이 세상 느긋한 형제가 있는가 하면, 스팀 보일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급한 형제도 있습니다.
가끔 수도원 건물 화재경보기가 오작동할 때가 있습니다. 크게 알람이 울립니다. 그 순간이 한밤중이라 할지라도 초스피드로 튀어나와 상황을 체크하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절대 문밖 한번 내다 보지 않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작은 거룻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의 앞부분을 이물 혹은 선수(船首)이라고 하고, 뒷부분은 고물 혹은 선미(船尾)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다들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배의 뒷쪽에 누우셔서, 배개까지 베고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기상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다보니, 베드로나 요한을 비롯한 성격 급한 몇몇 사도들이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천하태평이신 예수님을 보며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제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삼라만상의 주인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는데도 제자들은 목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미성숙과 불신앙, 몰이해와 두려움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느릿느릿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호수를 향해 외치십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조금 전 집채만한 풍랑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당신을 향한 믿음도 부족하고, 이해의 폭도 넓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크게 나무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폭풍을 잠잠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이 그분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옛날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겪었던 체험을 고스란히 겪게 됩니다. 이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여정 안에 높은 풍랑과 파도를 수시로 겪게 됩니다.
폭풍우가 다가올 때 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흔들리는 우리 배 안 어딘가에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듯 하지만, 반드시 우리들의 여정에 함께 동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월 성모 신심 미사]
마태오 12, 46-50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핏줄과 나라까지 배신해야 한다면, 그래도 믿을 것인가?
오늘은 2월 성모 신심 미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뜻에 인간의 뜻이 경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핏줄을 넘어 나라로 확대된다면 어떨까요? 자기 핏줄을 거부한 경우는 매우 많습니다.
광암 이벽 성조는 정약용이 존경하던 친구로서 뛰어난 학식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벽 성조는 가문의 반대로 아버지로부터 감금당했고 독살당했다고까지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큰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에 가담한 정약용도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약용이 두 번째 유배를 가게 된 사유 또한 천주교 때문입니다.
바로 조카 사위인 황사영 때문이었습니다. 황사영은 정말 믿음 때문에 가문은 물론 나라까지도 배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황사영 백서는 조선에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중국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 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적은 밀서입니다.
황사영은 토굴속에 숨어지내며 정세를 파악하던 중 교회의 머리인 주문모, 정약종,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이존창, 유황검 형제 등 다수가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접합니다.
이에 이런 탄압의 전말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부각해 청나라 조정의 도움을 끌어낸다면 박해를 종식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엔 청나라 종녀 1인을 공주로 삼아 조선 왕과 결혼케 함으로써 국왕을 부마로 만들면 다음 왕은 청국 황제의 외손이 되므로 자연히 청국에 충성을 바치게 될 것으로 생각을 밝혔습니다.
또는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할 것, 심지어 조선은 2백 년 이래 평화가 계속되어 백성은 전쟁을 모르니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6만 명으로 대포, 군물들을 싣고 와서 선교의 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과 서양 전교대를 조직하여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게 할 것 등입니다.
백서가 중국에 전달되지 못한 채 1801년 9월 15일에 제천 배론에서 체포되었고 9월 26일에 황사영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국청이 열리고 혹독한 심문을 받은 황사영은 11월 5일에 대역죄로 서소문 밖에서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그의 일가족은 물론 종들까지도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또한 황사영이 극형을 당한 다음 날 그의 집을 헐어 버리고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했습니다.
황사영이 정약용 형제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 사태는 심각했습니다.
노론 벽파의 홍낙안 등은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못한 것과 같다.”라며 이번 기회에 정약용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관련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노론 벽파 내 의견이 갈리면서 극형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은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시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정약용이라 생각해봅시다.
기중기를 최초로 이용해 수원성을 만들고 수백 권의 책을 쓸 정도로 국가의 인재였습니다.
그는 분명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문과 국가를 생각하기로 하고 배교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믿음이 없다고 화살을 돌릴 수 있을까요?
나이팅게일은 간호학이라는 새로운 간호의 비전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그녀 덕분으로 간호 학교들이 최초로 생겼습니다. 부상한 군인의 40%가 사망했지만, 그녀가 간호 시스템을 정비하자 4%로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그녀는 아군만 살린 게 아니라 다친 적군도 살려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행위는 전쟁에서 역적이 될 수도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생명’ 앞에서 핏줄이나 나라, 이념 따위는 의미를 잃습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원수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면 바라만 봐야 할까요?
아버지에게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구하는 게 도리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어떤 가치도 그 믿음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경쟁자로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시며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을 합리화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보면 역적이자 매국노라 불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굳이 어떤 나라에 지배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오네시모라는 도망친 노예를 돌려보내며 주인에게 충실해지라고
권고합니다.
링컨은 노예제도를 폐지해서 존경받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만 유익하다면 체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종교가 현세화 되어갑니다.
종교가 가문이나 나라의 뜻에 배치되면 조선시대 때처럼 사교로 박해당합니다.
마치 이 세상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살 세상은 천국이지 이 지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언제라도 이 지상의 핏줄이나 애정, 혹은 나라가 믿음의 발목을 잡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문의 원수나 매국노라도 불려도 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핏줄이나 나라를 사랑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참믿음을 잃은 나라는 현세에서부터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4,35-41: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여기서 저쪽이라고 하면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을 향하게 하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깨어나시어 호수를 꾸짖으시자 돌풍이 잔잔해졌는데, 호수를 꾸짖으신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구원되어 주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그 모습은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의 모습과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그분은 그들을 두려움 속에 내버려 두신 채 주무신다. 닥쳐올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려는 뜻이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 그러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 이렇게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신 분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은 이 풍랑의 기적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처럼 교회와 신앙인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조그만 풍랑에도 절망하며, 원망하고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2019년, 호주 전역에 대형 산불이 났습니다. 산불이 나자마자 어떤 사람이 100만 호주달러(약 8억 5천만 원)를 구호 기금으로 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로 사람들은 이 기부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칭찬을 받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차 없이 엄청난 뭇매를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부자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가 바로 아마존 CEO로 최고 부자인 제프 베조스이었거든요. 그가 기부한 돈은 그가 5분마다 버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일반 사람에게는 분명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가 버는 돈에 비할 때 너무나 성의 없는 기부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제프 베조스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면서 봉헌하는 모습, 자기 어려움이 더 크다면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나서 봉헌하겠다는 모습, 세상을 도울 힘이 있음에도 상관없다는 듯 외면하는 모습 등등….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님께 많은 것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 삶 안에서 계속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기보다는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도 못하고, 주님의 계명인 사랑 실천에 늘 소극적인 것입니다. 혹시 사랑을 입으로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건너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의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을 깨우면서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기적을 떠올렸다면 그래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불안에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겁을 내고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이 상황에서 제자들의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께 무엇이든 다 해 달라는 식입니다.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탓만 하는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에 우리의 노력을 더 해서 주님의 일을 이 세상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어렵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히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세네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 11,8)
순종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나는
영적 여행이라네.
믿음으로
그렇게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을
이사악과 야곱이 걸어간 길을
가다 보면
주님의 별을 만나
하느님의 도성에 이르게 된다네.
순종은
불임의 세상에서
희망을 잉태하러 떠나는
침묵의 길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포기가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힘들고 귀찮고 하기 싫은 걸 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파스카 사건도 건너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건너감에서 비롯되며
건너가는 수고로움이 없이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대개 말로만 신앙을 운운하는 교우들은
불리한 상황이면 절대 손해 봄 없이
슬쩍 책임을 회피합니다.
이러저러한 핑계와 합리화로 자신을 포장합니다.
용기와 결단이 없어
눈치만 보며 남 뒤만 졸졸 따르는 신세로 살아갑니다.
용기와 결단이 없는 따름은
늘 내 삶 안에 기쁨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내가 좋아서 따를 때 내 안에 두려움도 사라지고
사즉생의 마음으로 투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따르는 데서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1,1-2.8-19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