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서귀포시 중문동 1498-1번지. 중문천주교회
유형 ; 건물 터
시대 ; 일제강점기
일본강점기에 일본개국신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을 모시는 신사가 있었던 자리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 대륙을 침략하던 시기에 우리 민족에게도 일본개국신을 떠받들도록 의식화하였는데 1930년대 당시 면장 외 몇 명이 신사창건을 출원하는 형식으로 유도하여 허가를 내 주는 것으로 하여 신사를 창건하였다.
神社는 일본의 고유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에서 신령을 모시는 곳 또는 신령을 부르는 곳을 말한다. 신사를 중심으로 천황도 신격화하여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지배에도 이용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신도 사원(寺院)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을 신사참배(神社參拜)라고 한다.
원래 신사참배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의해 천황제 국가를 확립시킨 일본은 초기 신도(神道) 국교정책을 거쳐 1882년부터는 제사와 종교를 분리하는 국가신도 비종교정책을 추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즉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하에 전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종교로서 출발한 국가신도에서 종교적 색채를 제거하고 이를 전국민적인 보편이념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국가신도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국가제사를 주관하는 신관(神官)을, 국민을 계도(啓導)하는 관료로서 국가기구 내에 포섭하고 이들이 종교로서 신도행사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국가신도의 모든 시설과 모든 국가신도 종사자들의 활동을 제사집행에 한정했다. 이는 1889년의 제국헌법에 의해 명문화되었다.<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역사적으로 신사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있었으나, 요즈음에는 도심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대규모 복합건물에서부터 눈에 잘 띄지 않는 길가의 소규모 기도소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지만 대체로 신사는 다음 3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① 혼덴[本殿 : 또는 신덴(神殿)] : 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보통 신관(神官)만이 들어갈 수 있다. ② 헤이덴[幣殿 : 또는 노리토덴(祝詞殿)] : 신관에 의해 종교의식이 행해지고 기도를 올리는 곳인데, 이를 통해 가미[神]를 부르고 다시 되돌려보낸다. ③ 하이덴[拜殿] : 경배하고 기도하는 곳으로, 규모가 큰 신사에는 가구라덴[神樂殿 : 의식무용을 추는 곳]·샤무쇼[社務所 : 신사의 사무실]·데미즈야[手水屋 : 경배하기 전 손과 입을 씻는 세면대]·고마이누[拍犬 : 수호동물의 상]·도로[燈籠 : 봉헌에 의해 세워진 석등 또는 청동등] 등과 같은 다른 구조물이 있기도 하다. 신사의 신성한 영역은 도리이[鳥居]라고 하는 출입문으로 구별되어 있다.(다음백과사전)
한국에도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침략이 개시되면서 신도가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신사는 1910년 전에는 일본 거류민들을 위해서 민간에서 건립과 유지를 주도하였지만, 병합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와 육성 아래 신사의 관 ·공립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까지 신사참배와 신도신앙을 강요하였다. 총독부는 1915년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그러나 1925년 조선신궁(朝鮮神宮) 진좌제(鎭座祭)를 고비로 언론과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일단 사립학교 학생들에게까지 강제로 신사에 참배시키는 정책의 실제 시행은 보류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대륙침략을 재개한 일제는,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다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총독부는 신사의 건립을 계속 장려하여 1945년 6월 현재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이 세워졌다. 이것도 부족하여 각급학교 등에는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은 조선신궁 참배자만도 1940년에 약 215만 9000명, 1942년에는 약 264만 8000명에 이르렀다.
일반인들도 일제의 강요에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하거나 가정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기까지 하였으나, 이에 대한 민족적 반감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각 가정에 모시도록 행정기관을 통하여 나누어 준 ‘신궁대마(神宮大麻:가미다나에 넣어 두는 일종의 신주 내지 부적)’도 바로 폐기하거나 형식적으로 벽에 밥풀·압핀 등으로 붙여두는 경우가 많았다. 1944년 가을 일제의 어용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충남지역 농가를 대상으로 이에 대한 실태를 조사한 결과 주민들은 대부분이 ‘왜놈의 귀신’, ‘일본의 귀신’이라 하여 이를 별도로 취급하거나, 방치 폐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감 때문에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마자 대부분의 신사들이 민간인들에 의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이들 신사는 대부분 8월 15~16일에 방화 파괴되었으며 그 터는 대부분 공원이나 학교·교회 등 공공장소로 이용되었다.<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중문에 신사를 설치했던 곳은 원래 ‘중문원동산’이었다. 중문원은 천제연폭포 주차장에 있었다. 전국적으로 설치되었던 신사는 광복과 함께 대개 동네 청년들이 나서서 물메, 망치 등을 동원하여 깨부쉈다고 한다. 이곳 신사 역시 광복 직후에 파괴되었다.
《작성 12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