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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묵상글 ( 연중 제10주일. - 급선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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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급선무
오늘 연중 제10주일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누구와 싸울 것인가?’, ‘무엇과 싸울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나는 정작 싸워야 할 것과는 싸우지 않고
괜히 엉뚱한 것을 붙잡고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과의 두려운 만남을 앞두고
형과 싸우기보다 하느님과 씨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엉뚱하게 다른 사람의 소소한 잘못을 놓고 싸우곤 하지요.
우리 인생은 남의 잘못이나 갖고 싸울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먼저 내 안의 악과 싸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급선무(急先務).
급선무란 급하고 앞서는 일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우리는 급선무 식별과 급선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발이 썩어들어가고 있으면 그것부터 고치는 일이 급선무이지
그 발로 산티아고 걷는 꿈이나 꾸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 한가한 짓이고
남의 눈의 티나 빼주겠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 엉뚱한 짓을 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급선무를 놔두고 한가하고 엉뚱한 짓을 하는 걸까요?
그것은 지난 수요일 강론에서 말씀드렸듯이 비겁함의 영 때문이고,
자신의 죄와 악과 직면한다는 것이 두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일 강론을 요약해 옮기면 이렇습니다.
비겁(卑怯)이라는 한자어를 그대로 뜻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비란 비천이나 노비라고 할 때의 ‘천함’과 ‘천민’의 뜻이고
겁이란 ‘겁나다/두려워하다’, ‘약하다’, ‘피하다’는 뜻으로서
비천하고 약하기에 두려워하고 두려운 것을 피하는 겁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감기조차 두려워하듯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약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악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죄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피하는데
그 피하는 방법 곧 회피의 방법이 다양합니다.
그 첫 번째가 자기 부정입니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죄와 악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이 두려워
일단은 자기는 그런 자기가 아니라고 자기 부정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경우,
그런 자신에 대한 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는 것인데
오늘 독서에서 보듯 아담과 하와가 한 짓이 바로 이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이런 존재였다면 제2의 하와는 그 반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이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는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주님은 악령이 들린 분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신 분이시고 악령과 맞서 싸우신 분이시지요.
그리고 마리아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성령의 정배요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지요.
이런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성령의 정배가 되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라고 초대하시고,
새로운 하와가 되어 안과 밖의 악령과 맞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와 싸우는 것이 제일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래서 나와 싸우지 않고 남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싸우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어 남과 싸운다면
쩨쩨하게 나와 마찬가지로 약한 인간을 악하다고 하며 싸우지 말고
야곱처럼 하느님과 싸우고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악령과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자기 안의 악과 싸우는 것이 영적으로 제일 강한 것입니다.
자기 안의 육의 정신과 싸우는 것이 제일 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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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생로병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이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하지요. 인간이라면 이 네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뜻밖의 사건으로 ‘늙음’을 겪지 않는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모두를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생(生)’에 대해서는 기쁘게 받아들이지만(물론 이 역시 자기의 기쁨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쁨입니다), ‘로병사(老病死)’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하려는 우리입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그 순간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본당에서 봉성체하며 만났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봉성체 갈 때마다 이 할머니는 자기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너무 아파서 못 참겠는데 자녀들이 병원에도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자녀들이 수시로 병원에 모시고 갔지만, 그때마다 의사는 아무런 병이 없다는 대답만 하셨습니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기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이 미웠던 것입니다. 그 미움이 커져서 더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고통, 나 혼자 이를 이겨내야 하니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혼자면 더 아픕니다. 나눠야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만합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기 스스로 외톨이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프다고 가족들을 계속 욕하는데 과연 사랑으로 계속 받아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를 낮춰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낮춰야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겸손하라 명령하신 것은 우리 고통을 조금이나마 낮춰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또 율법학자들은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그들 모두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거부하려는 마음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모독한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과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을 모독한 죄는 모두 하느님께 대항하는 행위이기에 무거운 죄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독한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할까요?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즉, 성령을 모독한 죄는 회개하지 않는 죄, 주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함께하려고도 하지 않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함께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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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탐욕은 모든 것을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한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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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
오늘은 연중 10주일입니다. 봄은 오다가 멀찍이 피해 도망가고, 여름이 과속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오늘의 <말씀 전례>는 ‘믿음’이라는 주제 아래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1 독서>에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대한 불신으로 숨습니다. 그들이 아마 하느님을 믿었다면, 알몸이 두려워 숨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2코린 4,13)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믿고 따르는 제자 중에 열둘을 뽑아 사도로 세우신 뒤, 산을 내려오시어 집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군중들이 그분의 일행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친척도 있었는데,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잡으러 왔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이방인 신인 베엘 제불에 사로잡혔거나 마귀 우두머리(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모함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갈라진 나라와 집의 비유’를 통해서 반박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말을 통해, 당신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혹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대체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단 말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가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요?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학자들이 바로 그런 죄에 걸려든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왜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는 걸까요?
그것은 성령의 활동인 용서를 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이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한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방문을 받고서, 새로운 ‘영적 가족’을 선포하십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구체적인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마르 3, 34)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당하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믿고 실행하는 이’입니다. 사실,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마르 3,34)이라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혹은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안에서 이루는 진정한 가족관계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믿고 실행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 뜻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서 이루며 우리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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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소위 ‘열심하다’ 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 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유혹을 받아 봐야 자신을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대를 통해서 거듭 태어날 기회를 챙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활동 초기에 이런저런 소문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일행 주변에는 항시 사람들이 몰려들어 음식을 들 수조차 없다는 없다는 소문이 있었고 심지어 “미쳤다‘는 소문까지 떠돌았기에 친지들은 사람들이 수군덕거리는 것이 듣기에 거북해서 붙잡이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곱지 않게 봤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마르3,21). 혹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3,30)고도 하였습니다. 이런 비딱한 시선은 당시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누려 왔던 율법적, 영적 권위가 약화 되는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도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얻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입니다.” 헛소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본모습이 드러나듯이 험담은 험담하는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 놉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결국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3,30).
물론 주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고의로 죄를 범하고 그것으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행위,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중죄를 범하여 나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느님의 자비를 포기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머물게 되고 그 자체가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의 영원한 죄입니다.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마음이 비뚤어져 하느님께 속한 자비와 사랑, 용서를 고의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벌은? 스스로 거부하여 자비와 용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두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혈연을 떠나 이미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이는 구원 활동과 가르침을 배척하는 적대세력과 구별하여 은총을 누리기 위해 모여든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 주는 말씀입니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뒤로 밀쳐질 처지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섭섭한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군중을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요, 누이요, 어머니의 관계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예수님 가족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어줍니다. 정복하는 것보다는 섬기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내어주는 사랑으로 가족애를 돈독히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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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5월 15일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댈러스 인근에 ‘보현사’엘 다녀왔습니다. 스님도 성탄 때는 성당으로 왔다고 합니다. 보현사에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절의 주지 스님이 ‘여자 스님’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남자 스님인 줄 알았는데 여자 스님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아직 예불 중이라서 법당에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암송했습니다. 그렇게 10분 남짓 기다리면서 성당과는 사뭇 다른 사찰의 예불을 보았습니다. 스님은 끊임없이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웠고, 불자들도 따라 하였습니다. 성당의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사찰의 예불은 목탁과 염불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당은 제대와 신자 석이 있고, 신자 석은 대부분 의자로 되어 있는데 사찰은 아직 의자가 아닌 방석이 깔린 바닥에 앉는 것 같았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과 차를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스님은 공양하고 가라고 했는데 차만 마시고 왔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천주교회가 동양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종교인 불교가 서양에 전해지는데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미국에서는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주일로 옮겨서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드리면서 언젠가 미국에서도 부처님 오신 날이 공휴일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비슷한 질문을 아담의 아들 카인에게도 하십니다.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카인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아담은 어디에 있다고 대답하기 전에 알몸이라서 숨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담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스스로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카인도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카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카인이 스스로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보현사의 지암 스님이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나 어디에 있느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스님이 되라고 하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사제로 33년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찰의 분위기와 사찰의 문화가 제게는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보현사에서 17년을 주지 스님으로 지내고 있는 지암 스님은 전임 신부님들과도 인사했다고 합니다. 스님 또한 성당의 사제가 되라고 하면 어려울 것입니다. 이미 출가해서 30년 넘게 불가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당의 분위기와 성당의 문화가 생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께서도 스님과 제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께서도 스님과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스님이 ‘탐, 진, 치’를 멸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자들에게 전하며 팔정도의 삶을 살아간다면 부처님의 물으심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복음삼덕과 향주삼덕’의 가르침을 교우들에게 전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면 저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저함 없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먼저 묻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의 죄를 묻기 전에, 그들이 뉘우칠 기회를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자매 그리고 부모에 대한 ‘틀’을 새롭게 하십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와 자매 그리고 부모를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는 모두가 불자이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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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 말미에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온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이 소식을 전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가까이는 주님 근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과 제자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복음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바로 형제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바로 주님의 형제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바로 주님의 형제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찬찬히 우리 모습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를 지내며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모습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정말 주님의 형제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는지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향기로 많은 이들이 우리 주님께서 향해오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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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불운이라면….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입사했는데 오래 일하지 못합니다.
‘여기는 나랑 안 맞는 것 같아’하는 생각으로 이직합니다.
그런데 이직한 곳에서도 얼마 못 가고 퇴직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여기도 안 만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회사와 일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성당 단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늘 관계 안에서 상처받습니다.
아픔을 겪습니다.
그럴 때마다 ‘여기는 나랑 안 맞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단체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자기 자신을 봐야 합니다.
혹시 태도가 잘못됐는지.
마음이 삐뚤어졌는지.
나도 모르고 지냈던 깊은 상처는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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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자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수 많은 죄로 얼룩진 세상입니다.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위안하기도 합니다. 불의와 타협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실천하지 않는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화할수록 악의 유혹도 진화해가고 있습니다. 성령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을 부정하고 용서의 근원이시며,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들의 그릇된 신념을 믿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심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주님의 자녀이며 형제 자매입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우리의 이웃인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저희가 용서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저희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것은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 자매를 영원히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악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주님의 나라를 세워 주소서’라는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 주님께서 세상의 사탄과 악마를 몰아내고 사랑의 왕국을 세우실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열린 마음과 따뜻한 마음을 주소서. 그리고 사랑과 동정심과 용서를 알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말씀을 눈과 입으로 읽지 않고 마음으로 읽고 이해하고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뜻을 따르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자만심과 오만함을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순수한 마음을 주시어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이고 성령의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생각해보십시오.
2. 원한이나 편견으로 사람을 평가한 적이 있습니까?
3. 편견과 아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편견과 아집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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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의 자녀답게
“희망하라, 공부하라, 회개하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참 자주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옛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물음이기도 했고, 이렇게 삶의 길을 찾고자 부단히 읽게 되는 위인들의 평전이나 자서전, 회고록입니다. 이 물음은 1992년 1월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미사때 한 강론 제목이지만 3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묻는 질문이고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의식주만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찾는 사람이요 희망과 꿈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길없이는, 희망과 꿈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잃어 방황이요, 희망과 꿈을 잃어 혼란이요 죄도 병도 많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우리에게는 주님의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삶의 좌표가 되어주는 무수한 성인들이 있고, 무엇보다 날마다 미사를 통해 주님은 친히 당신 말씀을 통해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시고 희망과 꿈이 되어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 답을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품위있는 삶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첫째, “희망하라!”입니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말해 주님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희망이 다 희망이 아니라 궁극의 희망, 우리의 영원한 꿈과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희망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곳,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곧장 찾아오는 영육의 병이요 죄의 유혹이요 내적부패와 타락입니다.
신망애, 믿음, 희망, 사랑의 순서로 말하지만 맨먼저 와야 할 희망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방향을, 길을 가리키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희망이 있어야 기다림의 인내도 가능합니다. 사랑의 사도, 기쁨의 사도, 감사의 사도인 바오로요 이보다 희망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오늘 제가 제2독서에서 반갑게 찾아낸 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둘 때 놀랍게 펼쳐지는 내적변화의 현실이 우리에게는 샘솟는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아 우리 현대인의 비극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영적 시각을 잃었습니다. 세속주의, 물질지상중의, 현실지상주의가 만연한 세상이요 이에 중독된 세상입니다. 쉽고 편하고 빠른 것을 찰나적인 것들만 찾는 불나방들 같습니다.
삶의 깊이와 무게가 없어 삶도 날로 천박해 집니다.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너무나 많은 디지털, 인공지능의 문명입니다. 결코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더욱 심각히 묻고 답을 찾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우리의 희망을 북돋웁니다.
“우리의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삶도 바로 여기 희망의 샘, 주님으로부터 기인됨을 봅니다.
둘째, “공부하라!”입니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주님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만의 지식공부가 아니라, 평생 주님의 학생이 되어 평생 주님을 배워 닮아가는 공부입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이, 역시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학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후반부가 우리의 주님 공부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 공부가 짧아, 무지로 인해 만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로 하니 저절로 실소가 나옵니다. 무지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련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니 이들 역시 주님 공부가 한없이 부족한 무지에 눈먼 자들이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무지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다음 말씀 역시 우리의 경각심을 촉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성령의 역사를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주님을 모시고 평생 주님의 학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평생 배움의 여정에, 겸손과 경청, 순종, 섬김의 자세는 필수입니다.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미사에 참석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우리 모두를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정말 한결같이,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공부가 참된 공부이며 이런 공부에 충실한 자가 진짜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 이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공부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셋째, “회개하라!”입니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주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참된 회개가, 영적혁명같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나 날마다 회개하면서 하느님 방향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회개의 용기, 회개의 진실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지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비상한 회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자여스럽게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바로 제1독서 창세기의 말씀 서두부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주님의 물음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창세기에서 나무열매를 먹은 사람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는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대답합니다. 이때라도 회개할 때인데 그는 이걸 놓쳤습니다. 죄를 지으니 두려움이, 부끄러움이 어둠처럼 그 마음에 스며든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이, 두려움없이 살았던 사람인데 죄로 말미암아 숨게 된 사람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할 수 있도록 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제대로 다하는 회개의 삶에 충실할 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어지는 결과가 이를 보여줍니다. 이들의 죄를 추궁했을 때 회개는커녕 책임 전가에 바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주기에 먹었습니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 저 여자와 저 여자를 아내로 주신 하느님 당신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뱀에게 죄를 전가하는 무책임한 여자입니다.
죄의 결과는 관계의 파괴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고, 아담과 하와의 부부관계가 파괴되었고, 이어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어 힘껏 노력해야 살 수 있는 험하고 거친 땅이 되었습니다. 환경이 좋아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관계의 회복에, 복원에 진정한 회개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보다시피 죄의 도미노 현상처럼 세상에 만연되기 시작한 죄입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지금 지옥은 텅 비어 있다 합니다. 모든 악마들이 지옥에서 나와 세상 곳곳에서 활개치며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끊임없는 회개가 절박한 때입니다. 말그대로 회개의 선택이요 회개의 실천 훈련에 회개의 습관화입니다.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위한 기도와 노동과 성독이 균형을 갖춘 일과표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비록 수도원같은 일과표는 아니더라도 회개의 일상화를 위해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권합니다. 기도시가은 동시에 회개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 물으실 때, “예, 저 여기 있습니다.”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언제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책임을 다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1.주님을 희망하십시오!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신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꿈을 두는 것입니다.
2.주님을 공부하십시오!
부단히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공부입니다.
3.주님께 회개하십시오!
끊임없이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회개의 선택, 회개의 훈련, 회개의 습관화, 일상화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참가족, 한가족입니다. 혼자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의 삶입니다. 더불어의 삶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는 말마디이기도 하며 어제 교황님의 사제들에게 한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혼자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참으로 많은 사제들이 ‘소속감’(sense of belonging)으로 대변되는 ‘생명선’(lifeline)을 잃고 있음을 주목하자! 사제들은 ‘편안히’ 느끼는 것이 본질적이다(It is essential that priests feel ‘at home’).”
사제들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보금자리 공동체의 울타리가 사라져 소속감의 생명선이 사라질 때, 방황이요 혼란이요 사람은 살아남기 힘듭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한가족 교회 울타리 안에서 더불어 주님을 희망하며, 주님을 공부하며, 주님께 회개하며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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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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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어머니이고 형제가 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이지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서 말씀에 바탕을 두고 침묵 가운데 기도와 묵상의 삶이 몸에 베어 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하는 순간마다 자신이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바로 판단이 서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확실할 때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 수모, 비난과 같은 것이 두려워해지 않고 모든 것을 신앙안에서 견디어 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해 주는 침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며 하느님과 대화하는 마음이고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말씀을 듣는 마음, 대화하는 마음, 하느님의 뜻을 찾는 마음 등은 침묵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뜻을 확고하게 해 줍니다.. 이 확실성 없이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주저하게 되고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확고히 받아들이고 결연히 실행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믿음을 끊임없이 쇄신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실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깨닫는 것은 성서말씀과 기도입니다. 모든 풍요한 정신적인 원천과 실행의 힘은 성서에서 비롯됩니다. 성서를 통해 하느님께 자신에게 말을 건네 오게 하시고 이렇게 체험함으로 만난 말씀을 묵상하여 그분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하려 하는지 이를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지 알게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우리가 성서를 얼마나 읽어야 하는 것보다는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성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성서에서 읽은 것을 바로 삶으로 실천했던 안토니오 성인 처럼 성서를 읽었기 때문에 수도생활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게되었습니다.
기도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식별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기도하다 보면 내면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실천의 힘이 솟아 나오게 됩니다. 일이나 행동에 있어서는 항상 기도하는 정신으로 혹은 기도의 상태에 머물면서 살아간다면 실현 가능하다는 믿음이 굳건하게 됩니다.
침묵안에서 성서 말씀과 기도의 바탕 없이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할뿐더러 성 프란치스코의 말처럼 육의 정신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육의 정신은 말을 하는 데에 많이 노력하고 애쓰지만 실천에 옮기는데에 있어서는 노력을 적게 합니다. 그리고 내적으로 신앙과 성화를 얻으려 하기 보다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신앙과 성화를 얻기 원하고 열망합니다.
반면 침묵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기도의 삶을 살아 갈 때 우리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뜻을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실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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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후에스카(Huesca)의 성합
스페인 -1648년
그리하여 두 사람은 즉시 함께 그 곳으로 가서 현장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 곳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그 이상한 빛이 거름더미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몇 분 동안 그 곳을 파자, 어젯밤에 도난당했던 성체가 담긴 성합이 나타났다.
말할 수 없는 기쁨에 그들은 서둘러 성당으로 돌아와 주임신부에게 여태까지의 일들을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위안을 주는 이 소식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떼를 지어 성체가 발견된 밭으로 몰려갔다. 모두들 깊이 감동하여 하느님을 모독한 도둑의 손으쿄 굴욕적으료 다루어진 그 성체를 가지고 성당으로 돌아왔다.
주임신부는 언제까지나 매년 11월 30일마다 장엄한 대미사와 장엄미사를 바쳤다. 이 때에 성체를 현시하고, 성체를 모독한 일에 대해 주님께 속죄했으며 또 성체를 다시 찾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려기 위해 “떼데움(Te Deum)”을 합송하기로 맹세하였다. 후에스카의 신심 깊은 주민들은 주님께 감사의 보답으로 그 성체가 발견된 장소에다 훌륭한 기념 성당을 건립하였다.
지극히 아름다우신 주 예수님, 만물의 창조주시여
하느님과 성모님의 아들이시여,
내 당신을 사람하고 싶나이다. 내 당신을 흠모하고 싶나이다.
이는 내 영혼의 기쁨이며 환희이옵니다.
천상과 지상의 아름다움이
모두 오로지 당신께 있나이다.
이 세상 어느 것도 당신보다 사랑스럽지 않나이다.
지극히 사랑하올 내 주 예수님,
예수님, 당신은 진실하옵고 여기 성체 안에 계시오니,
내 당신께 비오니, 당신의 축복을 이제와 그리고 언젠가의
내 마지막 날에 내게 내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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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연중 제10주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율법 학자들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완고함을 비난하시며 다음과 같이 이르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사람이 짓는 모든 죄는, 심지어 신성을 모독하는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성령의 활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의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지니고 계시는 분으로서(1,10 참조) 성령의 힘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성령으로 병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데, 그 행위의 근본적 의미는 죄의 용서입니다.
곧 성령의 행위는 죄의 용서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죄를 용서하는 성령의 행위를 거부합니다.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자비를 청하며 용서를 구하면 언제든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 용서하시는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의 행위를 거부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성령의 행위는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는 행위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의 용서와 구원을 믿지도 받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모독한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용서를 거부하고 우리를 죄의 상태에 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비를 청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어떤 죄든 모두 용서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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