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64]연일 밤 줍기, 밤 까기 그리고 적선積善
가족묘지가 있는 뒷산 1정보(3천여평)에 오래된 밤나무들이 아직도 많이 산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너도나도 제 열매를 떨어뜨리기 바쁘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밤송이들과 저절로 떨어진 밤톨이 천지삐까리인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소싯적에는 밤나무나 감나무 한 그루 있는 것도 ‘재산’이었다. 있는 집 자식들은 추석 언저리에 밤을 줍거나 털고 떨어진 알밤들을 줍기에 바빴다. 없는 집안의 자식들은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주인이 버젓이 있는데, 대놓고 털거나 주울 수는 없는 일. 그런 밤을 연 사흘내내 털 필요는 없어 줍고 까느라 제법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밤은 아무리 잘 보관한다 해도 이삼일안에 밤 속에서 벌레가 생겨 먹을 수 없게 되는 것이 큰 흠이다. 그러니 깎아먹거나 곧바로 삶아 먹어야 한다. 그 고충을 토로하니, 한 선배가 보관비결을 알려줬다. 밤을 일단 물에 깨끗이 씻고 소금물에 1시간여 침전시킨 후 냉동실이 아닌 냉장실에 보관하면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 그런 방법이? 금시초문, 믿지 못한다고 '한소리' 들었다. 비닐봉지에 60-70개 담아 이리저리 인근 지인들에게 나눠주기 바빴다. 두어 달 전에는 저수지 민물새우를 잡아 말려 종이컵 하나씩 나눠주면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역시 아무 조건없이, 그것이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나눠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주변에 무엇을 나눠준다는 것도 일종의 버릇, 나눠줘 본 사람만이 계속 나눠준다는 것이다. 이것도 적선積善의 하나일까? 적선지가 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 했거늘.
엊그제는 두어 시간 품을 팔았더니, 척 봐도 '한 말斗'은 된 듯했다. 씻어 조금 말린 후 비닐봉지에 2개씩 50번을 세어 담으면 100개이지 않은가. 10봉지도 더 만들어, 마침 친구 취재를 온 기자들에게 한 봉지씩 주었다. 100개씩 넣다고 하니까 한 선배가 빠앙 터지듯 크게 웃었다. 밤톨을 세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 보통은 그냥 한 주먹씩 집어 대충 주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눈대중으로 할 수 있고, 많고 적고가 문제는 아니지만, 웬일인지 나는 세어서 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럴 때마다 꼭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다. 시인 김준태의 <감꽃>이 그것. 시의 전문은 이렇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그는 광주항쟁을 겪으며 <민족의 십자가여>라는 절창絶唱의 시를 읊었다.
진짜로 어릴 적엔 감꽃을 세어 동그랗고 긴 목걸리를 만들어 훈장처럼 걸고 다녔다. ‘감꽃 목걸리’를 한번도 걸쳐보지 않은 친구들은 그만큼 추억이 없기에 불행하고 불우하다. 전쟁때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셌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지만, 더 씁쓸한 것은 ‘돈을’ 센다는 ‘지금’이다. ‘엄지에 침 발라’라니? 생각해보면, 서글픈 일이다. 내일은 무엇을 셀까? 달력이 몇 장 남았는가? 올해는 며칠 남았는가? 아니면 팔십을 넘길까 안넘길까를 손가락으로 셀까?
아무튼, 밤에 대한 추억이 제법 있다. 추석이나 설 차례상에 또는 방안제사를 지낼 때 제상에 올릴 밤을 ‘치는’ 것도 그중의 하나. 어쩌다 나를 시킬 때면 ‘그것도 못치냐’며 구사리(꾸중)를 많이도 들었다. 물에 몇 시간 담가놓은 알밤을 칠 때는 위아래 살을 과감히 쳐내고 옆의 살을 각지게 쳐내야 밤을 제기에 쌓을 수 있는데, 나는 도무지 ‘밤살’이 아까워 반듯하게 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 ‘아픈 추억’이다. 이제는 차례상이나 방안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그리고 또 하나, 아까시아꽃 향내가 죽을 때쯤인 5월말이나 6월초, 온 산에 풍기던 이상한 밤꽃 냄새. 과부들이 잠을 못자고 설친다는 어른들 말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안다. 그것이 무슨 냄새와 비슷한지. 그러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에 매년 그때쯤만 되면 희미하게 웃곤 한다. 벌써 40년이 넘은 것같다. 형, 조카와 함께 남이섬 밤줍기대회에 출전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일도 까마득하다. 예전엔 벌레가 금세 생기는 밤을 보관하려고 토굴에 밤송이째 묻고는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꺼내 까 썼는데, 그것도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같다. 산자락 밤나무 아래를 허적허적 뒤지고 다니면서 든 이런저런 알밤줍기 단상이다.
첫댓글 말린새우 군밤
잘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