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깻잎 / 유점남
시장 한 귀퉁이에서 '노지 깻잎'이라고 쓴 쪽지가 담긴 바구니를 발견했다. 뜻밖에 어머니의 흔적을 만난 것 같아 덥석 집어 들었다. 가을 일을 끝낸 어머니의 손바닥처럼 거칠거칠한 감촉에서 진한 깻잎 향이 났다. 그리움이 입맛을 당기듯 싸한 향기가 나를 부른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 이맘때면 어머니는 노르스름하게 단풍 든 깻잎을 소쿠리에 가득 따오셨다. 더는 내어줄 영양분이 없는 이파리를 서둘러 거두어도 이제 남은 것들은 스스로 알맹이가 되어 영글어 갈 것이었다.
윤기가 빠져나간 얼룩진 이파리는 하나같이 멍들고 찢어져 상처 난 것들뿐이었다. 뜨거운 햇볕에 바래고 비바람에 맞서던 이파리엔 깨알 같은 점들이 모여 있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엔 시련을 이겨낸 사람의 꺾이지 않은 꼿꼿한 결과 기가 살아 있었다. 차곡차곡 포개어 접다 보면 한 장 한 장엔 어머니의 지난한 시간이 보였다. '달그락달그락' 호미질 소리도 들려오고, 가뭄에 하얗게 타들어 가던 어머니의 입술과 이리저리 쓰러지는 깻모종을 일으켜 세우느라 허리 펴지 못한 날들이 지나갔다.
무명실로 묶은 깻잎 뭉치는 된장에 묻거나 소금물에 담가두면 다음 해 여름 우리 집 밑반찬이 되어 밥상에 올랐다. 된장에 묻은 깻잎은 그대로 별미가 되었고, 소금물에 삭힌 깻잎은 알밤을 채 썰어 넣고 갖은양념을 해두면 오래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그것은 쉽게 상하지 않아 내 자취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단골 메뉴였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집을 떠나 읍내로 나가 자취를 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은 몇 안 되었는데 그중에 남녀 공학이 아닌 여자중학교를 가는 것은 나 혼자였다. 집은 전라북도였지만 가까운 경상남도 함양에 있는 여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집 근처 학교를 두고 친구 하나 없는 낯선 곳으로 가기 싫었지만 더 좋은 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시집도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부모님 말씀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경상도 친구들과는 말투도 다르고 놀이도 달랐다. 쉬는 시간엔 '전라도댁'이 라고 놀려 대는 아이들 틈에서 노는 걸 구경만 하는 외톨이가 되었다. 학교생활은 재미없고, 빈 자취방에 돌아오면 공부도 하기 싫었다. 그때마다 이번에 집에 가면 꼭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시켜 달라고 해야지 다짐하며 주말만 기다렸다. 하지만 매번 전학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말았다. 언니들은 중학교에 가지 못한 때라 힘들게 보내 주신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집에만 오면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서 일요일에 가지 못하고 월요일 첫차를 타고 갈 때가 많았다. 혼자 있는 것이 쓸쓸해 하룻밤이라도 더 집에 머물고 싶었던 마음의 병이 아니었을까.
새벽밥을 먹고 어머니와 같이 집을 나섰다. 읍내로 가는 첫차를 타려면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산길인 '매치재'라는 작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혼자 걷기엔 조금 호젓한 곳이었다.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밝아오는 아침 고갯길의 중간에서 어머니는 집을 향해 올라가시고, 나는 건네주신 보따리를 받아들고 버스를 타러 내려갔다. 모퉁이를 돌아 나올 때마다 뒤돌아보면 어머니도 나를 보고 계셨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 땐 고갯마루에 서 계신 어머니는 조그맣게 작아져 있었다.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길로 밭일을 하러 가셨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땐 외로운 마음을 먹는 것으로 달랬던 것 같다.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가 해주신 깻잎 반찬을 꺼내놓고 밥을 먹고 자고 나면 하루가 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면 주말이 오고 차츰 그곳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서도 집에 가는 일은 늘 설렘이고 어머니는 그리움이었다.
그러다 모교에 돌아와 어머니와 지내던 2년은 생애 가장 따스했던 날들이었다.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자전거를 타고 매일 출근을 했다. 아이들과의 학교생활도 즐거웠고 아무 걱정 없이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있었다. 퇴근하면 따뜻한 밥상 앞에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그러나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던 나에게 시골 은 답답한 곳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던 남편을 만났다. 젊은 시절 삶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쉽게 사표를 쓰고 남편을 따라와 시가에서 한 집 살이를 했다. 잠깐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학교에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일로 이루어진 것이 삶이라는 것을 몰랐다. 사는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혹독한 대가를 치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살지 못했다. 늘 허덕이며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 볼 새도 없이 살았다. 시집살이에 힘들어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남의 머릿속 글도 배웠으면서 그깟 살림이나 음식 하나 못 배우겠냐"며 독려했다. 그 말씀이 더 분발하여 살게 했는지도 모른다. 힘들 때마다. 어린 시절처럼 깻잎 반찬을 꺼내놓고 배불리 먹고 나면 다시 힘을 내곤 했다.
내가 결혼하고 8년 후 돌아가신 어머니는 시가에 사는 나를 염려하여 한 번도 내 집에 다녀가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 한번 차려드리지도 못했다. 어느 것 한 가지도 갚을 데가 없는 빚이 되고 말았다. 그중에도 가장 미안한 일은 병석에서 고생하시는 동안 하룻밤도 같이 있어 드리지 못한 일이다.
여름을 지나 가을이 왔다고 모두 실한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초라한 수확을 한 농부의 심정이 생전에 나를 보시던 어머니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어머니의 시간이 내게로 왔다. 푸르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계절이다. 나에게도 더 익어갈 것들은 남아 있을까.
상처도 많고 벌레 먹어 구멍이 숭숭 뚫린 단풍 깻잎을 유난스레 집착하는 것은 이젠 만날 수 없는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그리움 때문인지 모른다. 아이들은 진한 향과 식감이 질겨 싫다며 깻잎 반찬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 어떤 음식도 단풍 깻잎 맛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장바구니에 수북하게 담긴 깻잎 향을 안고 오는 길, 모처럼 마음이 푸근하다. 문득 뒤돌아보면 단풍 빛깔 스웨터를 입으신 어머니가 매치재에서 깻잎 같은 손을 흔들고 서 계실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