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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28 상징주의 - - ‘눈’보다는 ‘상상력’ 인간 내면을 그리다,: 견자, 뉘앙스, 나비파, 오컬트, 신비주의, 데카당스, 데포르마시옹,심미주의, 아르누보
28 상징주의 - - ‘눈’보다는 ‘상상력’ 인간 내면을 그리다
: 견자, 뉘앙스, 나비파, 오컬트, 신비주의, 데카당스, 데포르마시옹,심미주의, 아르누보, 분리파 -
‘느껴진 실재’ 중시하고 재현 아닌 ‘암시적’으로 표현
꿈·신화·환상 등 주제…모로·클림트·뭉크 등 대표적
상징주의는 인상주의와 달리 작품의 실체를 중시했다.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과 함께 심리적 진리를 표현하고 새롭고 추상적인 수단을 통해 현실 세계 이면에 있는 정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이들은 꿈과 환상 등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그림으로 보여주려 했다. 따라서 이들은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화풍으로 결집된 사실주의 등의 화파와 달리 개인의 감정, 감성, 생각과 주관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들의 세계를 전개했다.
따라서 화풍은 제각각이며 개인의 이데올로기, 특히 ‘보이는 실재’가 아니라 ‘느껴진 실재’를 중시해 ‘눈’보다는 ‘상상력’을 통해, ‘일상’이 아닌 악몽이나 유토피아 등 화가의 내면의 ‘비전’을 ‘재현’하기보다는 ‘암시’적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주제는 종교적 신비주의나 예언자 즉 ‘견자(Voyant)’에 대한 선망, 에로틱·퇴폐적·변태적·방탕한·병적인 것, 꿈의 세계, 우울, 악과 죽음 등을 다뤘다. 상징주의는 도상학 이전의 개인적인 경험과 진술에 의존한 모호한 뉘앙스의 차이를 드러내며 이를 즐겼다.
‘관념에 감각적 형태’를 입히다
‘상징주의’라는 용어는 1886년 시인 귀스타브 칸(1859~1936)과 모레아스(1856~1910)에 의해 처음 등장했다. 이들은 에밀 졸라(1840~1902)의 자연주의를 버리고 시인 말라르메(1842~1898), 폴 베를렌(1844~1896), 랭보(1854~1891) 등과 함께 ‘관념에 감각적 형태’를 입히고자 했다. 이들은 고갱과 휘슬러(1834~1903), 르동(1840~1916), 뭉크(1863~1944) 등과 친구처럼 지내며 상징주의의 살을 찌워갔다.
모로(1826~1898), 샤반(1824~1898), 르동 등은 1870년대에 이미 상징주의를 시작했다. 여기에 카리에르(1849~1906), 뵈클린(1827~1901)과 영국 라파엘전파의 에드워드 번 존스(1833~1898) 등이 가세했다. 이들은 자신의 작품에 영적인 가치를 담기 위해 성경 속 신비한 인물과 신화 속 환상적인 인물, 괴물 등을 소재로 상상과 꿈의 세계를 그려냈다.
산업화와 물질 만능의 사회는 세상을 도덕적·사회적·종교적·지적으로 혼란하게 만들었고, 영적인 쇠퇴를 가져왔다고 믿은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보들레르(1821~1867)의 낭만주의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우화적인 꿈을 그렸다. 또 미술에서 자연주의를 넘어서는 수단으로 발레와 카바레같이 새롭게 등장한 오락·향락적인 문화도 탐닉했다.
클림트의 ‘키스’. 오스트리아 벨베데레미술관 소장
알베르 오리에의 상징주의 선언
상징주의 이론을 세운 프랑스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알베르 오리에(1865~1892)는 고흐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봤던 인물이다. 오리에는 1886년 발표한 상징주의 선언에서 “이상주의적인 관념(Ideiste)을 그리며, 상징을 통해 아이디어를 표현하며, 합성적이며, 주관적이며, 결과적으로 장식적인 내부 세계를 시각과 기호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영성은 상징주의의 중요한 테마였다. 상징주의 작가들은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초자연적 현상인 ‘신비(Occult)’를 중시하는 신비주의와 반유물론적 입장을 취했다. 또 ‘데카당스(Decadence)’에도 관심이 많았다.
고갱·에밀 베르나르 등 종합주의 화풍
고갱은 프랑스 서북부 퐁타벤에 칩거하면서 그곳에서 활동하던 에밀 베르나르(1868~1941), 샤를 라발(1862~1894), 폴 세뤼지에(1864 ~1927), 피에르 보나르(1867~1947), 모리스 드니(1870~ 1943) 등과 만나 상징주의를 더욱 심화시킨다. 생테티즘(Synthetisme), 즉 종합주의라는 화풍이 그것이다.
이들은 관념적인 상징주의, 장식적인 추상화와 문양에 강한 집착을 보이면서 전체적으로 형태를 단순화하고 그 윤곽을 검고 굵은 선으로 구분하며 입체감이 없는 단순한 평면에 밝고 강렬한 원색으로 칠하는 구성적·장식적이며 평면적인 화면을 구사했다. 이런 면 분할과 색채 때문에 이들은 ‘분할주의(cloisonnisme)’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형태를 변형·왜곡
상징주의는 형과 색의 통합을 목표로 대상을 종합적·상징적으로 파악하고자 인간의 감정을 직접 표현해 대상을 단순화하고 형태를 변형하고 왜곡시키는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을 즐겨 사용했다. 또 색 면의 구성, 색을 통한 감정의 표현, 굵은 윤곽선, 평면성이 강조되는 장식적 효과에 현실과 현실, 현실과 타 예술 작품을 결합하거나 차용해 새로운 현실을 창조했다.
특히 쇼펜하우어(1788~1860)의 “음악은 ‘의지의 직접적인 모사’이며, 이때 음악을 통해 표현되는 의지, 즉 충동과 격정, 감정 등은 개체적이고 인격적인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 감정’이며, 따라서 음악은 ‘보편적 언어’”라고 하는 음악 형이상학을 차용해 시각예술에 접목하려 했다.
따라서 곡 중의 주요 인물이나 사물, 특정한 감정 등을 상징하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v)처럼 반복적인 요소를 사용했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특히 음악의 영적인 힘을 믿고 예술의 전면적 통일을 구상한 바그너(1813~1883)의 음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르동의 ‘사이클롭스’. 네덜란드 크뢸러뮐러미술관 소장
아르누보 운동도 상징주의의 일부
아르누보 운동도 따지고 보면 상징주의의 일부라 할 수 있다. 특히 유기적인 선의 반복과 퇴폐적인 주제가 겹친다. 또 17세기 초 유럽에서 등장했던 장미십자회의 신비주의(Rosicrucianism), 즉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질서가 있다는 영적·문화적 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들도 유물론을 거부하고 가톨릭과 르네상스 시대 예술의 부활을 시도하며 신비로운 종교적 계시를 미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장미십자회에 속했던 아르망(1860~1931)과 마르슬랭 데부탱(1823~1902) 같은 이도 상징주의의 일원으로 본다.
뭉크의 ‘뱀파이어’. 뭉크미술관 소장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상징주의
이렇게 상징주의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벨기에서는 크노프(1858~1921)와 독자적으로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우매함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그림을 그린 앙소르(1860~1949)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은 영국 오브리 비어즐리(1872~1898)의 에로틱하며 퇴폐적인 화면도 상징주의에 포함되나 아르누보에 더 가깝다.
상상력에 이미지를 합성해 자신만의 ‘분위기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낸 스위스의 아놀드 뵈클린(1827~1901)이나 날카로운 윤곽선과 선명한 색채로 환상적이면서도 모델화된 인물을 상징적이면서도 실존적 알레고리로 치환한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도 있다.
하지만 1897년 분리파(Wien Secession)를 결성하고 작품에서 성과 사랑,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사람들을 매혹한 오스트리아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와 인간 내면과 존재로서의 고독과 불안, 공포의 감정을 화폭에 담은 노르웨이의 뭉크(1863~1944)는 ‘상징주의의 마지막 열매’로 상징주의를 완성한다.
[출처]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용어로 다시읽는 미술사> - 28 상징주의- 견자, 뉘앙스, 나비파, 오컬트, 신비주의, 데카당스, 데포르마시옹, 심미주의, 아르누보, 분리파 - ‘눈’보다는 ‘상상력’ 인간 내면을 그리다 / 국방일보. 2019.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