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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reviewread.nhn?code=88295&nid=2633596
※ 메가톤 스포일러를 주의해주세요! <은교>의 메가폰을 잡은 정지우 감독이 그랬다. 나이드는 것과 젊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요즘 유난히도 '시간'이라는 것과 '죽음'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민감한 밤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은교>가 위로가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한계는 죽음이다. 죽음은 부자에게도 착한 사람에게도 평등하고, 예수에게도 공자에게도 공평했다. 그것은 곧 두려움을 낳았고 종교로, 권위로 또 현세의 욕망으로 분출되었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지금 처럼 발전된 문명을 누릴 수 있었을까? 인류 전체로 보면 죽음은 필연적일뿐만 아니라 필요하다. 60억이 옹기종기 모여 살기도 벅찬 지구에서 죽지 않고 계속해서 태어나기만 한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이 있을까? 그러나 나 개인을 생각해보면 역시나 죽는 것은 싫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는 늙는 것도 매한가지. 문득 시간이 날 슬프게 하는 밤이 많아졌다. 아침이면 이 힘든 하루가 빨리 가길 바라지만, 막상 잠을 청하고자 누우면 오늘 하루도 가버렸구나 하고 속으로 울음을 운다. 그래 이런 나에겐 어떤 '카타르시스'가 필요했다. 아직 새파랗게 어리지만 10년, 20년 그리고 50년 후에 다가올 미래 때문에 벌써 부터 미련한 두려움을 품고 있는 청춘에겐 그것을 배출할 탈출구가 절실했다. 그러던 차에 <은교>에 관한 인터뷰를 읽었고 내심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영화 <은교>는 시시했다. 세월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대단히 실험적인 영화 미학을 구축한 것도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그 기교적인 여운에 잠시 멍했다 이내 떠나 보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 이런 녀석들과의 헤어짐은 이별 축에도 못 낀다. |
그럴 줄 알았다.
사실 소설 <은교>를 먼저 읽고 영화를 보고 싶었으나 정지우 감독의 작품이라는 소릴 듣고 영화부터 보기로 결심했다. 비록 <이끼>가 그의 연출작은 아닐지라도 각본을 담당한 사람이 정지우 감독인 만큼 조심해야했다. 나의 기우가 적중한 것일까? 아니면 박범신 작가의 동명 소설 <은교>가 이정도 밖에 안되는 작품인걸까...? 영화 <은교>는 대충 무얼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으나 그 감정이 와닿지 않는, 그런 애매한 작품이었다. 내눈엔 감독의 연출이상으로 관객이 스스로 채워야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게 느껴졌다. 그래, 내가 정말 그럴 줄 알았다.
좋은 영상 그냥 영화
정지우 감독이 <은교>를 통해 만들어낸 이미지는 정말로 아름답다. 쏟아지는 햇빛과 은교, 그리고 시인 이적요의 집이라는 배경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그러나 영상미를 뛰어넘는 영화 미학이 부족했다. 카메라는 그 아름다움을 다 보여주기도 전에 시선을 이동했고, 멈추지 않아도 될 자리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그 결과 예쁜 영상 말고는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은교>를 보며 세삼 최근에 본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가 떠올랐다.(소설이 원작인 것이 이 두 영화가 가진 공통점의 전부다.) 소설이라는 문학장르는 영상보다 촘촘하고 세밀하다. 독자는 소설을 띠엄 띠엄 읽지만 않는다면, 작가가 그리는 모든 장면과 감성 그리고 정서를 흡수 할 수 있다. 활자이기 때문에. 반면,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다. 시간과 함께 장면이 흘러가버린다. 아무리 감독이 의미 심장한 미장센을 구축했다고 해도 깊은 인상을 주지 못 하면 넘어가는 프레임 속에 묻힐 뿐이다. 예쁜 영상은 초당 24 프레임으로 짜여진 35mm 필름이 영사기를 통해 스크린에 비춰지는 순간 완성된다. 그러나 영화에게는 그 프레임들을 관통하는 정서가 필요하다. 영상에 담긴 순간 순간, 촬영장에서 의도한 한 컷 한 컷을 잘라내고 이어 붙여 완성되는 것이 영화다.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는 원작 소설을 둔 영화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묘사력을 선사했다. 그 먹먹함과 가슴 답답함. 그리고 객석의 공기 마저 그에 동조하는 듯 했다.
반면 <은교>는 실패했다. 소설을 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다. 심리와 감정을 다루는 영화가 비유와 은유에 소홀했다. 나뭇가지, 눈이 내린 사다리, 이적요의 빈 책상 등등 수 많은 장면이 떠오르지만 예쁘다 이상의 정서를 이르키지 못한다. 수용자인 나의 능력이 부족해 영상이 전달하는 메세지를 잡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어딘가 템포가 안맞았다. 쓸쓸함을 느끼기엔 너무 빨랐고, 어떤 감정을 고조 시키기엔 너무 느렸다. 게다가 영상과 따로 노는 음악 편집... 시도는 좋았으나 최근에 내가 푹 빠져버린 필립 마틴 감독의 작품에 비하면 한 참 멀었다. |
넌 무엇을 이야기할 것이냐?
이미지를 통해 심리를 묘사하는 것에 실패한 <은교>는 샛길로 빠지기 시작한다. 우선 영상으로 쉽게 풀어내지 못 한 감정은 70대 노인을 박해일이 연기했다는 점에서 한 번 더 한계에 봉착한다. 박해일의 노인 연기는 인상적이다. 몸짓이며 표정이 정말로 노인 '같지만'... 눈을 씻고 봐도 노인은 아니더라. 내가 왜 영화를 보는 내내 노인이구나가 아니라, 저 사람은 노인이다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수고를 겪어야 하는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랬을텐데... 정지우 감독의 선택은 고작 1분도 채 나오지 않는 이적요의 젊은 시절이 전달하는 감성을 위해 나머지 1시간 반을 포기한 미스 캐스팅이었다. 그가 아무리 언론과의 인터뷰에 나와 '이 작품은 배우 박해일의 인내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위대한 도전'이다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영화를 보는는 관객은 '이적요를 연기한 노인을 연기한 박해일'을 만날 뿐이다. 그리고 그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의 노고와 감독의 실험 정신은 팬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을 일이다. 그러나 배우 백해일, 감독 정지우가 아닌 영화 <은교>를 원하는 나에게선 박수도 환호도, 미소도 얻을 수 없다. 클로즈업 샷에서 움지이지 않는 얼굴 주름들은 나에게 끊임 없이 '이 사람은 배우 박해일이오'라고 말해줬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일부로 관객으로 하여금 극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분명하게 구별되는 분장을 사용하거나 대 놓고 무대장치를 무대위에 올려 놓기도 하는데, 그것과 비슷한 건가? 이것이 영화판 '낯설게 하기'인가? 그리고 그 실패의 결과물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불안불안한 폭탄 돌리기를 거듭하더니 서지우(김무열 분)와 이적요(박해일 분)가 다투는 장면에서 폭발한다. 감정이 고조되어야하는 부분인데 박해일의 화난 연기에 객석 여기저기서 실소가 끊이질 않더라.
이왕에 박해일이라는 연기자를 8시간이 넘는 노인 분장을 시킬거였으면 '젊음과 늙음'이라는 주제의식을 살리기라도 했어야하는데 감독은 그마저도 실패했다. 젊음과 늙음을 동시에 지닌 '이적요'라는 케릭터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다. 노스승과 젊은 제자의 '애증'이라는 밀도 있는 감정을 그저 로리타 컴플렉스와 복수 이상의 것으로 승화시키지 못 했다.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과 분위기를 보고 '어떤 말을 하고 싶은 데 잘 안됐구나...' 추측할 뿐이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라는 명대사가 무색해진다. 영화 <이끼>를 작업하면서 정재영이 노인연기를 담당한 것이 정지우 감독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내 눈엔 <이끼>도 <은교>도 무모한 도전으로 보일 뿐이다. |
난 이해가 안된다.
1. 말도 안 되게 높은 정사신의 수위는 <은교>의 불투명한 주제를 한층 어지럽힌다. 91년생 배우 김고은을 그렇게 발가벗겨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벗을 필요 조차 없었다. 정지우 감독의 시선이 은교의 다리를 훓고 그 소녀의 몸이 이적요의 품에 안기는 순간 이미 영화가 전달하려는 이미지는 충분히 설명되었다. 은교 가슴에 헤나 문신과 이적요의 가슴팍에 그려지는 헤나. 그 상황과 분위기 만으로도 충분했다. 이후 애로물을 연상시키는 성행위 묘사는 등장했을 때는 너무 불편해서 짜증이 났다. 서지우와 은교의 정사신은 비단 노출 수위의 문제가 아니다. 왜 그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연기를 시켰는지 이해할 수 가 없다. 영화 속 다른 장면은 허점도 많이 보이던 영화가 정사신에서 그토록 노골적인 표현을 서슴치 않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이적요의 비극적인 모습을 극대화 시키기엔 너무 천박했다. 외설과 예술은 한 끝 차이지만 감독은 그 묘한 줄타기를 실패했다. 어린 여배우가 가졌을 심적 부담감을 생각해보면 화가날 지경이다.
2. 단지 '야하다'고 비난 하는 것이아니라 야할 필요가 없고, 야해야할 이유가 없는데 필요이상으로 야한 것이 문제다. 원작을 안봐서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서지우와 은교의 정사를 보면서도 눈을 떼지 못 하는 노인 이적요의 카타르시스르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제자와 은교에 대한 배신감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서지우에게 자신을 대입 시키는 모습과 같이 다차원적인 해석이 있었다면 정말 감탄했을 텐데.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이적요는 평소에도 서지우를 보며 생각했을 것 아닌가? '아 내가 30년만 젊었어도...' 그리고 서지우와 은교의 관계 역시 노출 씬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좀 더 세심하게 다뤘다면 좋았을 것 같다.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지 아세요? 외로워서요' 라는 의미 심장한 대사는 파격적 노출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밀려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3. 앞뒤 꽉 막힌 공대생에 열등감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럽고, 스승이 써준 책으로 돈 벌어 먹고, 도작에 은교까지 빼앗은 서지우. 영화를 보며 열심히 큰 그림을 그리면 '아 스승과 제자의 애증 관계를 담은 케릭터구나'하며 이해 할 수 있는다. 그러나 솔직히 영화 보는 내내 서지우의 과도한 감정이 와닿지 않는다. 그의 죽음을 슬로우모션으로 돌려가며 비장미를 더해 보려해도 '권선징악'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자신은 더 이상 껍데기가 아니라고 소리지르는 그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위해선 관객들의 숭고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히도 은교는 생각보다 잘 표현 된 것 같다. 17세 여고생의 순수함과 불안 그리고 외로움을 적절하게 담아냈다. 그리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신비감이 좋았다. 그런데 감독이 은교를 좀 더 독자적인 케릭터로 끌어낸다고 시도한 것이(원작 소설에서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눈으로 관찰되는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오히려 심도 있게 그려졌어야할 서지우와 이적요의 관계를 소홀하게 한 원인은 아닌지... 결국 영화 <은교>는 내 기대가 컸던 만큼 큰 실망으로 다가왔다. 영화 전체를 아우르지 못 하고 들쭉날쭉하는 색감과 어안 렌즈라도 사용한 것 같은 클로즈업 신들은 흐름을 툭툭 끊어 버린다. 고귀한 실험 정신과 창의적 연출은 영화에 섞이지 못하고 겉을 맴돌기만 할 뿐 이다. 노인의 사랑은 뭘까? 70세 노인과 17세 소녀의 사랑 그거 정말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보지 않는다. 사랑엔 국경도 나이도 없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적요와 은교의 사랑은 참으로 재밌는 주제다. 사랑을 시작하기엔 어리고 상대방은 사랑을 할 것 같지 않은 나이인 두 남녀. 사실상 은교가 이적요를 사랑했는지, 혹은 서지우를 원했는지... 영화 <은교>만 보고 섣불리 답을 내릴 수 없다. |
<은교>
영화가 성공적으로 일관된 정서를 품지 못 했다 해도 원작과 설정 그리고 시놉시스 만으로도 대충은 감을 잡을 수 있다. 젊음에 대한 욕망과 세월의 벽이라는 허망함이 영화 <은교>가 전달하려는 모티프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은교>가 이적요와 은교의 가슴 먹먹한 멜로로 보이진 않았다. 서지우와 이적요는 서로를 갈망한다. 이적요는 서지우의 젊음을 탐하고 부러워 했으며 시기했을 지도 모른다. 한편 서지우는 존경하는 스승에게 누구보다 인정 받길 원했고 그 강한 열망은 이적요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삐뚫어진 방식으로 분출된다. 더 이상 껍데기이고 싶지 않아하면서도 스승의 작품이 너무나 아름다워 자신의 이름을 달고 출판해 버린 행위는 그가 품은 일그러진 동경을 잘 보여준다.
이적요의 경우는 어떨까? 서지우가 은교와 관계를 맺는 장면을 굳이 확인하려고 사다리까지 놓고 그 위를 오르는 순간, 그에겐 두 눈 으로 그 파렴치한 행위를 반드시 목격해야 겠다는 분노만 존재했을까... 이적요는 밖에서 둘의 관계를 엿보며 서지우가 된다. 그래서 난 영화 <은교>의 해피 앤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적요의 욕망이 정말로 은교에 대한 사랑이었나? 오히려 서지우의 젊음에 대한 갈망이었고 은교가 가진 젊음에 대한 욕망이 아닐까. 은교와 이적요가 20대들이 즐겨가는 카페에서 '헐'과 '할'을 되풀이하는 순간이 인상 기억에 남는다. 그는 그 순간 젊어진 자신의 모습에 행복했을까? 그렇다면 은교와 헤어진 후 자신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에는? 은교는 이적요에겐 달콤한 독이 아닌가.
서지우에 대한 생각도 해본다. 그가 은교와 관계를 맺은 것이 은교에게 성적 매력을 느껴서일까? 아니면 스승에 대한 도전일까? 혹은 스승에게 인정 받고픈 욕망일까? 일단 영화 <은교>는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서지우였다면 이적요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늙은이가?! 내가 늙은이한테 그냥 당할거 같아'가 아니라 먼저 하염 없는 눈물이 흘렀을 것 같다... 은교의 의도와 상관없이(아니 사실 은교에게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는 그 모호함 자체가 매력이다.) 파멸로 향하는 두 남자. 그건 분명 독배다. 스승에 대한 잘 못된 사랑과 제자의 젊음에 대한 시기가 만들어낸 파국 속에서 영화 <은교>가 들려주는 은교의 마지막 고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 은교 GV라도 한다면 한 걸음에 달려가 정지우 감독에게 묻고 싶다. 사진에서 김고은에게 마지막 장면에 대해 디렉션을 내리고 있는 것 같은데 뭐라고 했을까...?
생각만해도 숨이 턱 막혀 오는 두려움을 스크린으로 옮기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영화 <은교>가 많은 것을 놓쳤지만 그래도 사무치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 '젊음과 늙음' '나이를 먹어 가는 것' 이라는 주제가 갖는 힘이 대단하다.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온 뒤 소설 <은교>를 주문했다. 소설에선 다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길 바라며. 책을 주문한 후에는 네이버에 '나이에 관한 시'라고 검색도 해봤다. 영화 속 서지우의 대사가 떠오른다. '시? 그래 시가 가장 위대하지' 1시간 반에 달하는 영상이 전달하지 못 하는 세월의 덧 없음과 나이 먹는 것의 두려움 그리고 젊음의 만용과 갈등이 몇 행 되지 않는 글에 모두 담겨 있었다.
스무 살
(이운학·시인)
(이재무·시인,
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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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개인적으로 느꼈던 점들이 이 리뷰에 그대로 적혀 있어서 가져왔는데,
이건 원작을 잘 살리고 말고를 떠나서 감독의 역량이 너무 부족했던 것 같다.
진정으로 그 책을 이해하고 만든 영화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 원작의 본질 자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느낌임.
그게 아니고서야 사고나기 전 서지우의 눈물을 어떻게 그런 싸구려 분노로 표현하고,
이적요와 서지우의 그 깊은 애증관계를 살리지 못하고 단순한 질투와 복수극으로 그려낼 수 있나 싶음.
다 벗기고 정사장면만 자극스럽게 그려내면 다인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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