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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6일(월)
* 시작 기도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주님...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주를 따르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라 원어상으로 신들의 아들들로서 이는 강한 자 용사 권세자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딸들은 셋의 후손들로서 노아 시대 사람들의 완악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6:4절에 네피림(거인), 용사, 명성이 있는 유명한 자들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을 오늘 우리들이 다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홍수로 다 쓸어버리셨고 오직 여호와께 은혜를 받은 노아와 그의 가족만 남기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력한 자가 되고자 무진 애를 쓰는 자들은 결국 거대한 홍수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방주에 속하여 물 위에 둥둥 뜨게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이 종 역시 예수라는 방주에 속하여 세상의 홍수 위에 둥둥 뜰 수 있도록 은혜로 덮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의 힘과 의가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로만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2:1-12
제목 : 연회장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하인들은 알더라.
1 사흘 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서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 나의 묵상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난 지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의 가나라는 동네에 결혼식이 있어서 제자들과 거기에 가셨다.
거기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도 참석하였다.
그런데 결혼식장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
당시 연회에서 포도주가 차지하는 중요도는 말할 가치가 없을 정도다.
만일 포도주가 부족해서 손님들에게 내어주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초청한 손님들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결혼식이나 연회 자체를 망치는 행위이다.
따라서 결혼식을 주관한 연회장의 입장에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어머니가 알고 예수께 다가가서 저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하기를 ‘어머니, 나에게 왜 이런 부탁을 하십니까? 아직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예수께서 너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너희는 순종하라고 하였다.
그곳에는 각각 물 두세 통이 들어갈 수 있는 돌로 만든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정결예식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자 하인들은 물을 아귀까지 가득 채웠다.
채운 후에 바로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다.
이에 하인들은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다.
그 물을 받아든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물을 채우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떠다 준 하인들은 알았다.
연회장이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을 불러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값싼 포도주를 내는 것이 상식인데 당신은 지금까지 정말 좋은 포도주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예수께서는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서 머무르셨다.
오늘 본문 9절에서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하인들은 알았다.
(9a)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여기서 ‘알다’라는 말이 나온다.
연회장은 ‘알지 못하였고’, 하인들은 ‘알았다’.
알다(know)는 말은 헬라어 ‘오이다’로서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지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연회장은, 나중에 가져온 포도주의 맛이 처음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지만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적어도 음식 맛을 감별해내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 최고 전문가였으나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는 무지하였기 때문에 그저 신랑을 칭찬하는 정도의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났는지’로 번역된 헬라어 ‘포덴 에스틴’은 기원 및 원천을 나타내는 말로, 무엇으로부터 났는지 혹은 어디로부터 났는지의 의미이다.
연회장은 좋은 포도주의 기원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인들은 그 기원 곧 출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영적 생활에도 굉장한 통찰력을 준다.
포도주의 기원을 연회장은 알지 못하였지만, 하인들은 알 수 있었던 이유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그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화학적 변화이다.
하인들은 이런 화학적 변화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모를지라도 적어도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분명 알았다.
사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이 기적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런 기적들은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다.
(요 6:40a)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그런데 처음부터 무조건 아들을 믿을 수는 없다.
따라서 아들이 행하는 기적들을 보고 믿게 되며 그 믿음은 결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예수님의 처음 표적을 본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하였다(11절).
그런데 그 믿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본 것으로 믿는 단계이며 이는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믿음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내신 이 곧 아들을 보고 믿어 영생을 얻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은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은 영생의 자리이다.
영생의 자리란 곧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리이며 이는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하여 교제와 사귐을 갖는 자리이다.
본문에서 연회장은 뒤에 가져온 포도주가 그저 맛이 훨씬 좋은 포도주인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 맛 좋은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하인들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그 근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하인들이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곧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치는 표적을 보고 따라온 수많은 무리들에게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신다.
그 다음 날에는 또다시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에게 ‘이제는 너희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시며 ‘그 양식은 인자가 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 6:27).
눈에 보이는 표적이나 성령의 은사라도 모두 썩어지고 없어질 쇠락의 법칙에 적용을 받아 결국 없어지고 마는 썩을 양식이다.
그것을 보고 믿은 자는 그 정도 수준의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히 6:1-3)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신앙의 수준은 여러 단계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신앙의 수준일지라도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곳은 완전한 곳이다.
그 완전한 곳은 다름 아닌 영원한 생명이 있는 영생의 자리이다.
그곳은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하여 날마다 말씀과 성령으로 교제와 사귐을 가지는 곳이다.
성령 안에서 아들이 아버지와 더불어 복종과 사랑의 법을 이루셨던 그 자리가 바로 오늘 우리가 누려야 할 영생의 자리이다.
그곳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여 주신 영광의 자리이며 또한 ‘아버지 집’이요 ‘나 있는 곳’이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나는 믿음이 있노라 하였지만 실제로 믿음이 없는 자였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로 나의 믿음을 표현할 뿐이었다.
믿음이란 그 기원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 기원을 알지 못하고 그 믿음의 실재를 이 땅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기적이나 은사가 있는 것을 보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확신하였다.
방언이나 병고침의 은사들이 있는 것은 분명히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하지만 이를 통하여 믿음이 생기면 그런 현상적 믿음에 머무르지 않고 더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나는 더 완전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믿음, 믿음 했던 것이다.
믿음에서 영생의 교제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성도로서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이를 알지 못하니 남의 다리만 긁을 뿐이다.
연회장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단지 신랑을 칭찬하는 수준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하인들은 좋은 포도주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사실을 알뿐, 진리를 알지 못하니 그들 역시 신기함에 놀라는 수준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첫 번 표적을 보고 믿었지만 그 후에도 얼마나 천방지축으로 날 뛰었는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자기들은 그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자신을 뽐내며 얄궂은 자리다툼을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급기야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말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내가 이들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나 또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오늘 이 말씀 앞에 나 자신을 겸손히 내려놓는다.
예수님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했기에 육신의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이용하여 나 잘 되게 하려는데 이용하려던 죄인 중의 괴수임을 고백한다.
말씀을 향유하는 자가 아니라 이용하는 자로 살아왔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땅의 지체를 버리라고 하셨음에도 나는 그런 땅의 지체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이나 악한 정욕과 탐심 등을 버리기는커녕 그것을 은밀하게 누리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할 자가 영생의 거주지를 알지 못하기에 이 땅에서 내 육신의 만족을 위하여 땅의 지체들을 맛보고 누렸던 자였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는 심판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복음을 주셨다.
나는 이 복음을 알고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열심히 이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 복음을 전하면서 은혜가 넘치는 곳에 죄의 세력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지식으로는 알면서 너무 쉽게 간과하고 말았다.
따라서 내가 전한 복음은 지식으로 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연회장이나 하인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을 탓할 수가 없는 이유이다.
광야의 무덤은 거칠고 사납지만 그 무덤에서 나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 말씀으로 나아갈 때 그곳은 나의 무덤이 아니라 주님의 무덤으로 변할 줄 믿는다.
그 주님의 무덤에서 새 생명으로 나아갈 때를 잠잠히 기다리며 오늘도 주님이 비쳐주시는 아버지의 영광의 빛을 내 심령에 가득히 채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도 주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는 자였나이다.
표적을 보고는 그 현상에만 주목하여 그 기원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자입니다.
창세전, 아버지 품속에 계시던 우리 주님.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아 태어난 생명으로, 또한 우리에게 그 생명을 주시고자 창세전부터 오시기로 작정되셨던 우리 주님을 나는 몰랐었습니다.
그저 육신의 예수를 보면서 나 잘 되게 하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사용했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이런 나를 심판하심은 주님의 공의입니다.
주님의 공의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고도 그것이 무너지지 않게 해달라고 얼마나 빌고 또 빌었는지요?
하나님은 참고 참으시다가 결국 당신의 공의를 행하셨나이다.
오늘 그 공의의 심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주님의 행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벌거벗겨진 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부끄러울지라도 우리 주님 앞에서는 가장 순전한 자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 되게 하소서.
여전히 연약하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있사오니 오늘 하루도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의 얼굴에 비쳐지는 그 자리, 영생의 자리에 거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