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신문(12월 21일)
노량대첩(露梁大捷)과 이순신(李舜臣)의 순국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정유재란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 음력 11월 18일 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함대를 거느리고 노량해협으로 진격했다. 찬바람이 거세게 불어대는 겨울바다로 60여 척의 조선 함대와 200여 척의 명군 함대가 뒤따랐다. 전함 수는 명군이 많았지만 조선 전함 판옥선(板屋船)보다 배가 작고 전투력도 떨어졌다. 진린(陳隣) 등 명군 장수들이 우리 판옥선에 타고 출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튿날 새벽 2시경. 조명연합함대는 노량바다에 이르렀다. 곧 이어 전투가 시작됐다. 캄캄한 밤바다에서 불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이를 신호로 전고(戰鼓)가 다급하게 울리고 포성이 어두운 밤하늘과 바다를 진동했다. 포탄과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갔다.
이윽고 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적함이 불타고 부서졌다. 관음포에서 도망칠 물길이 막히자 적군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전투는 격렬하게 이어졌다. 이순신은 더욱 힘껏 전고를 울리고 독전기를 휘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홀연히 날아온 탄환 한 발이 이순신의 왼쪽 겨드랑이를 관통하고 심장 가까이에 박혔다. 그는 곧 숨을 거두었다.
그날 정오 무렵이 되자 노량해전은 마무리되었다. 노량해협에 들어온 300여 척의 왜적 함대는 200여 척이 불타거나 부서져 격침되고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전멸하다시피 대패했다. 승전의 함성도 잠깐, 노량해협과 관음포 해상은 이내 통곡으로 떠나가는 듯했다. 전투가 대승으로 끝난 뒤 비보(悲報)가 전해지자 바다는 온통 비통한 울음소리로 울렁거렸다. 조선군은 물론 명군 장수와 군사들도 울었다.
노량해전은 7년간 끌어온 임진왜란에 마지막 쐐기를 박은 대첩이었다.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을 계기로 적군이 철군하려 할 때 그 퇴로를 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한 해전이 노량대첩이었다. 또한 노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장렬한 순국으로써 54년의 파란만장했던 한 삶의 막을 내린 역사적 마침표이기도 했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415년 전 그날이 올해는 12월 21일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환란은 되풀이된다. 임진왜란이란 참상을 당하고도 존재 자체가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던 엽기적 국왕 선조(宣祖)와 얼빠진 대신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탓에 불과 40년 뒤에 병자호란을 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300년 뒤에는 ‘사상최강의 왜구집단’인 일제(日帝)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때 이미 멸망해서 그때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00년 동안 이순신에 관해 우리보다 일본인들이 더 깊이 더 많이 연구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이순신 장군의 고난에 찬 일생을 연구하고, 상승의 전술을 연구하는 것이 적국인 일본에 뒤졌던 것이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근래 얼빠진 자들이 변변치 못한 이름을 날리려고 이순신 장군의 인격과 전공을 폄훼하고, 또 그것으로 돈벌이를 삼고 있으니 그저 기가 막히다. 당치도 않은 원균(元均) 명장 만들기를 위해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황당무계한 작태가 나오니 정말 큰일이다.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를 묘사한답시고 나약한 인물로 그리지를 않나, 거북선이 진수 당일 결함 때문에 스스로 침몰했다고 역사를 왜곡하다 못해 날조하지를 않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한심한 작태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이순신의 키가 145cm에 불과했다느니, 이순신의 진짜 승리는 한산 ․ 명량 ․ 노량해전 3개밖에 없고, 23전 23승의 신화도 거품이라고 나서는 터무니없는 자도 나왔다. 또 얼마 전에 서점에서 보니 어떤 자가 원균이 사실은 명장이고, 이순신은 원균의 공을 가로챈 소인배로 만든, 참으로 혹세무민하는 황당무계하고 엽기적인 잡서(雜書)를 펴낸 것을 보았다, 이렇게 정신상태가 비뚤어진 자들이 설쳐대서야 국운의 융성은커녕 어찌 나라가 바로 서겠는가.
대체로 국운의 융성은 국리민복(國利民福)과 부국강병(富國强兵)에서 오고, 망국의 위기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서 온다. 정치, 경제, 사회, 국방, 문화 등 각계 지도자들은 눈물의 기록, 구국의 비망록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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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충무공은 그야말로 더하고 뺄 것도 없는 분이시지요.
개별 소설 속에서 어떤 식으로 각색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충무공의 체구에 관해서는 그 무렵의 기록에서 이미 '크다'고 말하는 것이 있으므로 작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개별 논의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았던 바로는.... 이순신의 키가 작다는 이야기는 선조실록의 기사(선조34년 1월 17일)의 다음 구절을 근거로 드는 경우가 많아 보였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이경준·이시언(李時言)이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을 때 대간(臺諫)들은 그들이 키가 작다고 논하여 태거(汰去)하였는데, 그때 웅위(雄偉)한 사람들은 모두 공을 이룬 것이 없는 반
면 논박을 당한 자는 오히려 공을 이루었으니, 대체로 겉모양으로만 사람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李慶濬、李時言, 爲宣傳官時, 臺諫以身體短小, 論之汰去。 當時雄偉之人, 皆無成功。 被論者如此, 凡人, 不可以容貌取之也。)
이 구절에서 키가 작다고 폄하되었던 사람이 오히려 공을 세웠다는 선조의 발언 충무공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보는 이야기가 가끔 보이긴 했는데 이것만으로 그리 말하기는 어렵울 겁니다. 반면, 충무공의 키에 대해서는 『백호전서』(통제사 이충무공 유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은 큰 체구에 용맹이 뛰어나고 붉은 수염에 담기(膽氣)가 있는 사람이었다.'(公長軀精勇赤?髥膽氣人也)
위인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키가 커야 한다는 법은 없고 키 작은 영웅도 물론 존재할 수는 있지만, 충무공의 경우에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키가 작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충무공의 키가 작다고 하는 말은 일단은 무시해도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