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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spora(영어) / διασπορά(헬라어)
고전 그리스어로 파종(播種)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남중국계 화교,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 남인도인, 그리스인 등이
세계사 속에서 전세계를 누빈 경우다.
상술한 민족 집단 중 화교와 인도계, 그리스계를 제외하면
본토보다 외국으로 퍼진 후손들이 많아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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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로 인하여 중동 전역에 유대인 집단이 확산되었다.
이전까진 선지자들과 왕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혼합 종교적 관습이나 다신교 신앙이 완전히 수그러들지 않았으나
희한하게도 포로기 시련을 거치면서 이런 관습이나 신앙 양태가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할 정도로 근절되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신앙 분파들끼리 서로 우상숭배자 내지는 다신교도라고 욕하면서
경쟁적으로 일신교 방향으로 갈 정도였다.
이후로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재정착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이주를 반복하게 된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디아스포라는 서기 132년에 일어났는데, 로마 제국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국외로 이주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일대에서만 살고 있다가 강제로 쫓겨났다는 인식이 있지만,
유대-로마 전쟁 이전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이집트나 소아시아 일대로 이주하고 있었다.
애초에 기원전 4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약 500년간 이어졌던
헬레니즘 시대의 분위기 자체가 사해동포주의로 가득 차 있어서 국외 이주를 그렇게 꺼리는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미개발지역이었던 팔레스타인보다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게 먹고 살기에 유리했다.
중요한 점은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제외한 다른 팔레스타인 지방을 포함한
전 지역에서의 유대인 거주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거주가 금지된 것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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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교적 관점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영적인 의미로
죄 많은 세상 가운데에서 본향인 천국을 소망하면서 신앙을 지키며 힘겹게 살아가는 성도들을 상징한다.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기는 70년이었는데,
이 기간은 성경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수명에 해당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즉, 성도들은 인생 자체가 바벨론 포로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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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한민족 역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말 사이에 상당한 규모의 디아스포라를 경험했다.
조선 구한말의 혼란을 피해 1860년대부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연해주와 만주 일대로 이주하였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에는 단순히 경제적인 동기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동기를 가지고 해외로 이주하는 수가 늘어났는데,
일제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0년대 연평균 대략 1만명이 국외 이주를 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이후로는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 해외 침공 등에 동원되어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서
년 광복 당시 통계로 공식적으로만 일본에 약 110만 명, 만주 일대에 120만 명이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이 만주국을 만들고 일본열도와 한반도에서 개척민을 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원래는 일본농민을 조선으로 식민하고 조선농민을 만주로 식민하는 안이었다가 양쪽 모두에서
"만주에 가면 땅을 준다"며 홍보해 이주민을 받았다.
이 계획은 사실 일종의 둔전병제도를 겸하고 있었는데,
정착민들의 마을 단위가 중대급의 민병대 전력이 되어 관동군이 소련군을 막을 때 받쳐준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실상 그 땅은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의 땅을 헐값에 강탈한 것이었고
정착민이 농업시설을 짓고 마을를 이루면서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는 미국으로의 이주가 주를 이루어
1965년 미국 당국이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직계 가족들의 경우 제한없이 초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 미국 이민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져 이민자의 수가 일본계 미국인(150만명)보다도 많은 260만명에 달했다.
미국 이외에도 일본(90만명), 중국(250만명), 중앙아시아(50만명) 등에도 디아스포라가 이루어졌다.
하위 문단의 해외동포는 대체로 이 시기 이주한 한국인 디아스포라 후예들이다.
여몽전쟁 과정에서 생겨난 고려인 디아스포라로, 명나라 시기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재일 한국인, 조선적이 중 일본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은 재일 한국-조선인이 되었으며
그 중 한국의 국적을 보유하지 않는 자들은 조선적이라고 한다.
다수가 광복과 동시에 귀국하였고 법이 개정되면서 남아있는 조선적도 대한민국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북한 정권의 공작에 속아서 일부는 북한으로 들어가게 되어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외만주로 이주했던 한인들은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고려인으로 머무르게 되었다.
사할린에도 한인이 남아있다. 옐친이 1993년 강제이주에 대해 사과를 하며
연해주, 우수리스크, 사할린으로 다시 돌아온 고려인도 있었다.
연구에 따르면, 2002년에 약 470,000명의 고려인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며,
그 중 198,000명이 우즈베키스탄에, 125,000명이 러시아, 105,000명이 카자흐스탄, 19,000명이 키르기스스탄,
12,000명이 우크라이나, 6,000명이 타지키스탄, 3,000명이 투르크메니스탄, 5,000명이 기타 지역에 살고 있다.
일본령 가라후토 시절에 주로 징용으로 이주하게 된 한인들을 뜻한다.
일제의 패망 이후 사할린은 소련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공산권인만큼 한국과의 교류는 단절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지속적인 귀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만주(간도)에 이주한 한인들은 광복 이후에도 절반 이상이 현지에 머무른다.
귀국 대신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하면서 이들은 국공내전에 참전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며 활동하였다.
1952년 만주에 독립국가가 아닌 자치구인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만들어졌다.
1950년대 후반부터 중국공산당에서 홍위병을 자처하며
한민족 내셔널리즘과 조선족 종족에 대한 숙청 활동을 펼치면서
조선족 사회에 중화 내셔널리즘 교육이 더욱 강화되고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 우상화 교육이 실시되었다.
같은 시기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공산당에서 당의 뜻에 반하면
모든 것이 반동 취급당하면서 이후로 중국과 중국인의 생활방식에 가깝게 살아가게 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에 조선족이 많이 유입되었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중국 동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구권에 정착한 한국계 디아스포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단으로,
근대에는 독립운동이나 생계를 목적으로, 현대에는 출세나 생계, 전략적 이민 등 다양한 이유에서 미국으로 정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부분 남한계지만 드물게 탈북한 이후 한국으로 가지 않고 미국에 정착하는 북한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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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 디아스포라의 역설
| 디아스포라: 흩어진 러시아 정교회 세게속의 러시아 정교회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정교회는 전례 없는 박해에 직면했다. 교회들은 폐쇄되거나 파괴되었고, 수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재앙은 러시아 정교회를 세계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수십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조국을 떠나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로 흩어졌다. 그들의 트렁크에는 값비싼 물건 대신 성화와 기도서가 담겨 있었다. 떠돌이 망명객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정교회 전통의 씨앗을 온 세계에 뿌리는 선교사들이 되었다. 파리학파: 망명지에 핀 신학의 꽃 혁명 직후 파리로 망명한 러시아 지식인들은 1925년 생 세르주 정교신학원을 세웠다. 파리 외곽의 낡은 건물,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교실, 넉넉지 않은 재정 형편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신학교는 곧 20세기 정교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망명 신학자들은 빵을 나누며 토론했고, 추운 겨울 밤 손을 호호 불며 원고를 썼다. 그들은 러시아를 잃었지만, 세계를 얻었다. 세르게이 불가코프는 이 파리학파의 중심인물이었다. 혁명 전 그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분석하고 혁명을 꿈꾸던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교회 신앙으로 회심했고, 사제가 되어 망명길에 올랐다. 파리에서 그가 붙잡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하나님과 세상이 만나는가?” 그의 소피아론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불가코프가 말하는 소피아는 단순한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품고 계셨던 세상에 대한 사랑의 청사진이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기 전부터 그 아이를 사랑하듯, 하나님은 소피아 안에서 세상을 이미 사랑하고 계셨다. 이 신비로운 개념은 정교회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모스크바 총주교청측에서 비판받았다. 일부는 그를 이단이라 비난했다. 하지만 불가코프는 굴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로스키는 불가코프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새로운 신학을 만들기보다는 잊혀진 보물을 발굴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들, 14세기 헤시카즘 수도사들이 체험하고 전한 신비를 현대어로 번역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그의 대표작 『동방 정교회의 신비 신학』은 서구 독자들에게 충격이었다. 서구 신학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집중한 반면, 정교회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없는가에서 출발했다. 로스키는 이것을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이라 불렀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념으로 담을 수 없을 만큼 크시다. 그분을 아는 유일한 길은 지적 이해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연합이다. 파리에서 망명자로 살았지만, 로스키의 신학은 동서양의 신학적 대화를 여는 다리가 되었다. 알렉산더 슈만 신부는 파리에서 태어난 2세대 망명자였다. 그는 러시아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지만, 정교회 전통의 깊이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1951년 미국으로 건너간 슈만은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라디오 자유(Radio Liberty)를 통해 소련 내부의 러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또 출근길 자동차 안에서, 주방에서 설거지하며, 평범한 미국인들이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려운 신학 용어 대신 일상의 언어로 말했다. “주일 아침 교회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눌 때, 우리는 단순히 옛 의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그의 책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는 예배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했다. 성찬례는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는 우주적 사건이었다. 슈만에게 예배는 일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상을 성화해 가는 통로였다. 미국 선교 1867년 알래스카가 미국에 팔렸을 때, 러시아 정교회의 대부분의 알래스카 선교사들은 러시아 본토로 떠났다. 하지만 1898년 티혼 대주교가 샌프란시스코로 옮기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미국 전역으로 확장했다. 혁명 이후에는 수많은 러시아 망명객들이 유입되면서 교회는 급성장했다. 1970년, 모스크바 총주교청은 미국 정교회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어머니가 성장한 딸에게 독립을 허락하듯, 러시아 정교회는 미국 정교회를 축복하며 내보냈다. 1970년 자치권(Autocephaly)을 부여받은 ‘미국 정교회(OCA)’는 더 이상 이민자들의 향수를 달래는 ‘러시아인의 교회’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과감하게 예배 언어를 영어로 바꿨고, 미국 문화라는 토양 위에 정교회의 영성을 심기 시작했다. 알래스카 선교사들이 원주민의 언어를 존중했듯, 이제 그들은 현대 미국인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정교회는 흥미로운 변화의 정점에 서 있다. 혁명기 망명객들의 후손뿐만 아니라, 서구 신학의 한계를 느낀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들이 정교회로 발길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회심자(Convert)’들의 유입이다. 이들에게 정교회는 고리타분한 옛 종교가 아니라, 2천 년간 변치 않은 초대 교회의 원형을 간직한 신비로운 교회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2020년대에 들어선 오늘날, 미국 정교회는 새로운 도전과 마주하고 있다. 2018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가속화된 ‘모스크바 총주교청’과 ‘콘스탄티노폴 세계 총대주교청’ 사이의 갈등은 미국 땅에서도 보이지 않는 균열을 만들었다. 러시아에 뿌리를 둔 OCA와 그리스계 교단들 사이의 행정적 통합은 여전히 먼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교회는 전 세계 정교회 중 가장 역동적이다. 뉴욕의 성 블라디미르 신학교는 전 세계 정교회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학문의 요람이 되었고, 이들이 펴내는 영문 서적들은 현대 신학계의 중요한 도서가 되었다. 비록 행정적으로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으나, 주일 아침이면 수많은 미국인이 영어로 된 비잔틴 성가를 부르며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찬례에 참여한다. 1794년 알래스카의 얼어붙은 땅에 뿌려진 작은 씨앗이, 이제는 거대한 북미 대륙을 품는 울창한 숲으로 자라난 것이다. 서울 아현동 언덕의 황금 돔: 한국 정교회 한국에서 정교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900년이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최초의 정교회 예배가 드려졌고, 이듬해 한 젊은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이 작은 씨앗은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일제 강점기가 왔고, 한국전쟁이 휩쓸고 지나갔다. 교회는 거의 소멸 직전까지 갔다. 이 사안은 뒤에 <한반도에 상륙한 이념전쟁>이라는 제목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할 것이다. 1955년, 그리스인 신부 소티리오스 트람바스가 한국에 파견되었다. 폐허 위에 선 그는 하나씩 교회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알래스카의 이노센트처럼, 일본의 니콜라이처럼, 그도 복음이 한국인의 언어로 울려퍼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30년 넘게 한국에서 사목하며 그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을 건립했고, 전례문(예배 의식서)을 한글로 번역했다. 서울 아현동 언덕 위에 황금빛 돔이 솟아올랐다. 비잔틴 양식의 이 성당은 서울의 고층 빌딩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조화로웠다. 천 년의 전통이 한국 땅에 부드럽게 착지한 것이었다. 주일이면 한국어로 비잔틴 성가가 울려 퍼진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시고 강하신 분...” 그리스어도 러시아어도 아닌, 한국어로 같은 멜로디가 다른 언어로 노래되며 새로운 아름다움을 낳았다. 한국 정교회는 여전히 작다. 전국에 신자가 3천여 명, 성당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하지만 이 작은 공동체는 중요한 진리를 증언한다. 천년의 전통이 새로운 언어와 문화 속에서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귀한 일이다. 흩어짐이 만든 보편성 디아스포라는 단순히 흩어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가 민족 교회의 틀을 벗고 보편 교회로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파리의 신학자들은 정교회 사상을 세계 신학계에 소개했다. 알래스카의 선교사들은 복음이 모든 언어로 노래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미국 정교회는 다양한 민족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델을 제시했다. 한국 정교회는 정교회 전통이 아시아 문화 속에서도 꽃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794년 발라암 수도원을 떠난 열 명의 수도사는 11,000Km를 여행했다. 그들의 배낭에는 선교 전략서도, 성공 지표도 없었다. 오직 자신을 비우겠다는 결단과, 크리스토를 닮아가겠다는 소망만이 있었다. 헤르만 수도사는 알류트어를 배우지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 사랑의 언어로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노센트는10년을 들여 문자를 만들었다. 니콜라이는 일본에서 50년을 보냈다. 트람바스는 한국에서30년을 헌신했다. 혁명의 폭풍은 러시아 정교회를 조국에서 뿌리 뽑았다. 하지만 그 씨앗은 전 세계에 뿌려져 새로운 열매를 맺었다. 파리의 신학원, 알래스카의 토착 교회, 서울의 황금 돔. 흩어짐은 축복이 되었고, 상실은 새로운 발견의 기회가 되었다. 그것이 러시아 정교회 디아스포라의 역설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