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체류 첫날. 공항에 들러 셔틀버스 타고 렌터카 회사 찾아가 차를 받았다. 63시간인가 빌리는 데 5만 8500원. 계좌로 입금해달라고 해서 6만원 보냈는데 1500원 돌려주겠다는 얘기도 없었고 나도 하지 않았다. 우리 쿨하니까. 자차 보험료 8만원 짜리는 완전 면책이 되고 6만원 짜리는 20%를 자기 부담으로 한다고 해서 살짝 불안하지만 6만원 짜리로 했다. 하루 1만 5000원에 80% 정도 안심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여기저기 제법 돌아다녔는데 주유비 딱 5만원 들었다. 렌터카 빌릴 때 계기판 바늘이 세 번째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의 그만큼 상태에서 반납했다. 제주 사람들 쿨해서 미세하게 따지지 않는다.
차를 찾아 지리산과 아브물을 메종드호텔에서 픽업했다. 강정마을 찾아가는데 회장님이 전화해 그냥 횟집으로 가자고 했다. 들어가 손전화 충전 좀 하고나니 희망과용기 형 일행이 들이닥쳤다. 난 노들강이 공항 리무진 타고 온다고 해서 중문단지까지 나가 픽업했다. 강정마을을 벗어나 중문단지로 달리니 노을이 기가 막히다. 후회 막심이었다. 10분만 일찍 나왔더라면 더 근사한 노을을 만끽할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노들강 픽업하고 돌아왔더니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이남기 선배님과 하늘접시 정구선 동문, 박희범 제주지점장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이어 희망과용기 형이 사회를 보며 능수능란하게 분위기를 이끌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배사, 역시 이남기 선배였다. 건 하면 건강하게, 배 하면 배려하며, 사 하면 사랑하며 삽시다 연호하는 것이었는데 쉽고 편해서였다. 그날 약 스무 가지 건배사를 들었는데 분위기를 개망친 내 것과 이 선배님 것만 기억에 남는다.
회장님 집을 낮에 태양 있을 때 보고 싶었는데 밤 10시 가까이 돼서야 보게 됐다. 다음날 아침 이남기 선배님이 이곳에서 주무셨다는 걸 알고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제주 체류 이틀째. 한라산 영실을 다녀오고 질펀한 술판(산에서 고생해서 그런지 여기에서 오간 얘기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들 폭탄주 한잔 마실 때 소주로 그만한 양을 마셨던 것 같다. 네거리식당을 어떻게 나왔는지, 내가 운전을 하려고 해 아톰 형이 뜯어말리고 대리 기사를 불러 왔다는데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을 물리고 회장님 집에서 또 술자리가 어우러졌다.
술이 약한 난 감히 회장님 침대에 머리를 파묻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간간이 산바람 형의 산유화, 회장님의 18번 노래(이 노래 제목은 희한하게 기억할 수가 없다) 소리가 들려왔다.
한 시간 남짓 넘었을까? 최승호 선배가 날 점프하며 덮쳤다. "너 누구냐" 그러면서.
회장님과 나, 최 선배 어울려 씨름도 하고(최 선배가 내 발뒤축을 들어올리려 했다.) 유도도 하고(집 들어가는 나무에 날 메다꽂으려 했다) 택시 기사와 드잡이를 벌일 뻔하기도 하고 등등. 굉장히 긴 시간 동안 기사님과 신경전을 벌이다 택시에서 다시 내려 회장님 침대에 아까 날 덮칠 때 했던 동작 비스무리하게 몸을 던지셨다.
어쩌지? 또 날 덮치면 어떡하지? 머리를 굴리다가 그냥 최 선배가 누운 회장님 침대 옆에 자리 깔고 누웠다.
사흘째인 21일 아침 . 찬란한 제주의 태양이 떠올랐다. 공항에 일찍 나가야 한다는 임병수 선배를 회장님과 함께 리무진버스 정류장에 모셔 드리고 돌아오니 최승호 선배가 코 주무셨던 방문이 걍 열려 있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노들강에게 물으니 몰래 나가시려 했다는 것이었다.
떠난 지 5분도 안됐다고 해서 다시 차에 시동을 걸어 쫓아갔다.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선배님이 서계셨다. 상당히 많이 흔들리며 히치하이킹 손동작을 하고 계셨다.
후배들 얼굴을 알아볼 거리가 됐는데도 까마득히 모르시고 "혹시 저 좀"이라고 하신다. 새벽 6시가 안된 시간이었는데 정말 차를 잡겠다는 요량이었을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룸미러로 살피니 낯색이 정말 말이 아니다. 그런 얼굴로 히치하이킹을 하려 하다니, 속으로 끌탕을 찼다.
선배를 제주월드컵경기장 근처 호텔에 모셔다드리고 오니 이번엔 깨어난 선후배들이 화장실 쓰는 문제로 복잡하다. 최 선배가 두고간 손전화가 눈에 띈다. 오늘 가파도 함께 들어간다고 했던 회장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눈치다. 호텔에 득달같이 전화해 객실에 연결해달라고 했더니 사생활 때문에 안된다고 했던 모양이었다. 으르고 달래 끝내 통화하셔서 11시쯤 집으로 택시 타고 오시라고 얘기하는 눈치였다.
전날에 이어 이날도 노들강이 미역국을 끓였다. 좋은 생미역으로 끓여 맛보다는 재료의 뛰어남을 만끽했다. 그렇게 허기를 잠깐 속이고 8시 30분쯤 서울로 떠나는 희망과용기, 그린랜드, 산바람 형 등과 작별했다.(회장님 댁은 쓰레기 수거시설과 거리가 꽤 있어 체류하는 사람이 반드시 처리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깜박 잊고 큰 길 사거리까지 나갔다가 아차, 생각나 다시 돌아와 쓰레기를 처리했다. 우리 참 착하다.)
제주 체류 나흘째 아톰 형의 자 일어납시다, 소리에 눈을 떴다. 난 5시간 남짓, 두 분은 4시간이 빠듯했을텐데 상쾌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주인이 없는 새 집이 엉망 됐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열심히 주위를 정리했다. 빈 병과 휴지 등 재활용 가능한 것들 모아 차 트렁크에 실어 두고 등등. 간밤에 상의한 대로 셋만 돈 모아 봉투에 담아 어제 내가 산 초콜릿 상자 위에 얌전히 올려뒀다. 이 공간만한 곁을 내주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첫날 강정포구횟집에서 60만원을 아마 며칠 전에 미리 결제하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하늘접시 일행이 10만 얼마의 추가 비용만 계산한 것 같다고 노들강이 전해줬다. 그리고 둘째날 서귀포 네거리식당 술자리를 마친 뒤 집에서 맥주로 목이나 추기자고 들른 슈퍼에서 노들강이 계산하려고 했더니 회장님이 호통을 치시더라고 했다.
해서 우리 셋만 성의를 모은 것이었다.(아니나다를까 다음날 '죽을래' 특유의 회장님 문자가 왔다.)
그렇게 집을 나와 쓰레기 다 버리고 서귀포 시내 들렀다. 난 배가 더부룩해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데 두 분은 아침 해장을 해야 한단다. 회장님이 일러주신 식당은 문을 안 열었다. 지난해 가을 가족여행 때 묵었던 선비치 호텔 바로 옆이었다. 그런데도 문을 안 연 걸 보면 월요일 아침 손님이 많지 않다는 경험칙 때문인 듯했다.
아무튼 조금 헤매다가 마침 문을 연 천수장 식당에 둘을 내려주고 난 천지연 폭포 위 산책로를 조금 걸었다. 40분쯤 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엄청 행복한 표정의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해물뚝배기에 큰 전복이 3개나 있어 주인장에게 이래도 남느냐고 했잖아. 정말 가성비 갑이었다는 것이다. 다음에 먹어봐야지 했다.
차를 몰고 중문단지 안 투썸 플레이스로 갔다. 나 혼자 브런치 세트-늘 크로크무슈를 먹는다. 최고다-를 먹고 셋이 멀리 한라산 정상을 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공간의 안락함이나 널찍함, 전망의 탁월함, 번잡스럽지 않아 이 곳을 강추한다. 바람 많은 날 야자나무 흔들리는 것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공항 가는 길. 사실 전날-제주 체류 이틀째-아침에 두 분 선배님 모셔드릴 때-이따 뒤에 사연이 나온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당 분수대 주변을 빠져나왔는데 세 번째 -우리는 사려니숲길로, 나머지 일행은 공항 가는길- 운전대를 잡았는데 집 계단 담을 살짝 들이받았다. 몇 군데 기스가 나고 슬쩍 들어간 곳도 있었던 것 같았다.
공항 가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렌터카 회사에서 클레임 걸어 보상 요구하면 어쩌지 하는 심정이었다. 가슴을 토닥이며 반납 장소에 차를 대니 직원이 다가오길래 트렁크 열어 뭘 찾는 척 딴청을 했다. 3분 남짓 차 주변을 열심히 돌던 직원이 그런다. "네 반납 완료됐습니다. 공항 가세요"
셔틀버스에 올랐더니 문자가 왔다. 반납 절차 완료. 노들강에게 물었다. "이러고도 나중에 다른 얘기 없겠지?" 노들강은 답했다. "글쎄요. 혹시 보험회사에서 전화 오지 않을까요?"라고 겁을 준다. (그날이 22일이었는데 오늘 31일까지 전화 한 통화 없었다. 제주 렌터카는 기스나 슬쩍 들어간 사고는 사고로 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야호)
그렇게 우리의 3박4일 제주 여행은 막을 내렸다. 회장님이 무슨 커다란 계획을 갖고 우리를 민폐 여행의 함정으로 몰아넣었는지 뱁새 같은 우리가 알 도리가 없다. 그저 오라니까 갔고 자라니까 자고 먹으라니까 먹었다. (초등학생 일기장 쓰는 느낌으로) 정말 훌륭한 여행이었다.
첫댓글 재미나게 잘 읽었네.애썼네. 부럽기도 하고
형. 민폐라는 말 쓰지마세요. 저도 여러번 회장님께 이말씀을 드렸는데 싫어하시더라구요.
여러가지로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습니다. 용서없는 술자리와 13~14명이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시끌벅적함, 멋진 한라산 산행...
무엇보다도 다른 동문들이 떠나고 난 후 남은 3인이 함께 한 하루 일정. 먼저 서울 가신 분들은 분명 아쉬워할 알찬 일정이었습니다.
재밌게 읽었네..산행기 쓰느라 애쓰셨고, 임 국장이 계속 운전하느라 미안했는데, 담에 가면 번갈아 운전하세나.
제주도에선 대리 불러야 하니 3명이 가는게 가장 낫더라고..ㅋㅋ,
첫날 강정포구횟집에서의 계산은 이남기 선배님 일행이 하시려고 했으나 회장님의 선불로 무산됐고요,
십몇만원의 추가비용은 최종일이가 계산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마침 제주도에 있었기에 이런 기회도 마련한 것이고,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됐지. 다른 말이 필요하냐. 그리고 산바람이 떠나면서 다들 돈을 모아서 줬어. 괜히 부담 준 것 같아서 미안하네, 이렇게 우리의 5월 산행은 막을 내리고 6월을 기약합시다. 알은 산행기 쓰느라 수고했다. 노들강도 떡국과 미역국 끓이느라 수고했다. 근데 알아. 카페 대문 사진은 바궈야 할 텐데...ㅎ
희한하게 기억이 잘 안 나는, 회장님 애창곡 제목은 혹시 <여행기 1> 포스팅 사진에 나오는....ㅎㅎ 재밌는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