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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11일 ‘99 서울 NGO(비정부기구) 세계대회’ 개막
각국 NGO 대표들이 11일 오전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세기의 NGO 활동을 회고하는 전체회의에 참석,주제발표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99 서울 NGO(비정부기구) 세계대회’가 국내외 1115개 단체 7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11일 오전 개막됐다.
이날 개막식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전-현직 국가원수, 주한 외국공관 대사,유엔과 국제 NGO 대표 등 세계 각국에서 400여명의 주요인사들이 참석했다.
유엔경제사회이사회 NGO 협의회(CONGO), 유엔공보처 NGO 집행위원회,밝은사회클럽운동본부(GCS)가 공동주최한 이번 대회는 ‘21세기 NGO의 역할’을 주제로 5일 동안 전체회의, 주제별 종합회의, 분과별 토론, 문화행사 등을 펼쳤다.
공동대회장인 아파브 마푸즈 유엔경제사회이사회 NGO협의회 의장은 대회사를 통해,“서울 NGO대회는 전 세계의 NGO들이 유엔과의 협력 아래 다음 세기 NGO의 역할과 활동을 다시 규정하는 자리”라며 “유엔도 NGO와의 관계강화를 위해 더욱 힘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은 영상으로 메시지를 보내 대회 개최를 축하했다.
이날 오후 1시부터 올라라 오투누 유엔 사무차장, 우리민족 서로돕기 운동 서경석 대표 등4명의 연사가 참여, 20세기 NGO의 활동을 되돌아보는 ‘20세기의 회고’ 전체 토론회가 열렸으며,이어 유엔 루이스 프레체트 부사무총장, 국제자연보호연맹 라켈 카이트 상임고문 등이 참여해 ‘21세기 전망’을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가졌다.
대회 마지막날인 15일에는 사흘간의 분과별 토의결과를 통해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진로를 모색하는 전체회의와 평화대행진, 폐회식이 진행되며,이날 ‘21세기 NGO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선언’이 채택되었다.
▶2010년미국 게론(Geron)사 세계최초 인간 배아줄기세포 임상시험
▶2010년황인성 전 국무총리 별세
▶2004년성우 장정진씨, KBS 오락프로그램 녹화 중 사고로 28일 만에 별세
고(故) 장정진씨
KBS 오락프로그램 녹화 도중 송편을 먹다 기도(氣道)가 막혀 중태에 빠졌던 성우 장정진(張正鎭·51· 사진)씨가 중환자실 입원 한 달여 만인 11일 오후 6시23분 별세했다.
이대 목동병원은 사인을 ‘기도 폐색에 의한 저산소성 뇌경색’이라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달 13일 오후 7시쯤 서울 등촌동 88체육관에서 KBS 2TV 오락프로그램 ‘일요일은 101%’ 추석특집 ‘골목의 제왕’ 코너를 녹화하다가 사고를 당했으며,산소호흡기로 목숨을 이어왔다.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가학적 코너 진행으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며 KBS의 공개사과와 프로그램 폐지를 요구하는 비난이 빗발쳤다.
특히 ‘일요일은101%’ 게시판에는 수천 건의 비판 글이 올랐으며,글 제목에 검은 리본(▶◀)표시를 붙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강지원’씨는 “시청률에만 급급했던 결과”라며 “당장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국장을 포함한 PD·작가 모두 고인에게 사과하고 유족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석순’씨도 “사장은 대국민 사과해야 할 것이며,
관계자들 모두 징계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고인은 1977년 KBS 성우 15기 출신으로 만화 ‘삼국지’의 장비, ‘달려라 하니’의 홍두깨를 비롯,각종 오락 프로그램에서 목소리 연기를 해왔으며 TBC 성우상, KBS 연기대상 공로상,KBS 연예대상 최우수상 등을 수상하며 국내 대표적인 성우로 활동해 왔다.
빈소가 마련된 이대 목동병원에는 오후 8씨쯤부터 탤런트 성동일, MC 김승현 등 100명의 방송인들이 찾아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전명희씨(50), 아들 세영(25) 주영씨(24)가 있다.
▶2000년이영섭 전 대법원장 사망
▶1999년서울 NGO(비정부기구) 세계대회’ 개막
▶1999년귄터 블로벨, 세포내 단백질기능 규명으로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선정
▶1998년‘뚱뚱이와 홀쭉이’의 뚱뚱이 역을 맡은 코미디언 양훈씨 별세
1950년을 전후해 가장 인기높았던 코미디언으로 양석천, 양훈을 손꼽을 수 있다. 양석천은 체력이 깡마르고, 왜소해 '홀쭉이'라고 불렸고, 반대로 양훈은 몸집이 비대한 편이어서 '뚱뚱이'로 불렸다. 약간 모자라는 듯한 바보스러운 모습을 한 뚱뚱이와, 반대로 깔끔하고 세련된 신사 양석천이 함께 나타나면 언제나 폭소가 터지게 마련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양석천과 양훈을 '천생연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았다. 우선 21년 서울 태생 동갑내기였으며, 두 사람 모두 악극 단원으로 첫 활동을 시작한 공통점을 가졌다. 또한 당시 사회에서 지식층으로 인정받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것도 닮은 점이다. 양석천은 이문고등보통학교(5년제)를, 양훈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광복이 되고 두 사람은 함께 활동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헤어졌다. 양훈은 육군 제7사단 정훈부에 소속되어 3년 동안 일선장병 위문공연을 했다. 전쟁이 휴전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쇼 무대가 큰 인기를 얻어 가는 곳마다 인파로 들끓었다. 이 때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시국을 풍자하는 코미디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양석천이 팝송을부르고, 양훈이 악기소리를 흉내내는가 하면, 두 사람이 '만요풍(漫謠風)'으로 함께 부르는 '시골영감 기차노래' 등도 큰 인기를 모았다.
55년 HLKA라디오가 공개방송을 처음 시작하면서 이들 콤비를 집중 조명했으며, 56년 한국 최초의 상업방송국 HLKZ TV의 개국 프로에서 이들은 한국 최초로 TV MC를 맡기도 했다. 같은 해 한영모 감독의 '청춘 쌍곡선'에 캐스팅되어 영화에 데뷔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홍콩영화사와 합작한 '천지유정'에도 인기스타 최무룡, 김진규 등과 함께 출연했다.
58년에는 권영순 감독의 희극영화 '오부자'에서 김희갑, 구봉서, 이종철, 박옥초 등 코미디언과 함께 출연했으며, 이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쓴 '홀쭉이와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 등의 영화도 제작됐다. 두 사람은 1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는데, 우정이 남달라 항상 함께 출연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이후 양훈이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체류하는 바람에 이들의 콤비 전성기도 막을 내렸다. 홀로 남은 양석천은 가끔 야간업소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지병에 시달리다 84년 세상을 뜨고 만다.
▶1996년마이클 잭슨 첫 내한 공연
1996년 10월 11일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첫 공연은 천재적 아티스트와 테크놀로지가 엮어낸 환상의 무대였다. 이날 저녁 8시40분부터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펼쳐진 팝스타 마이클 잭슨의 서울 공연은 말로만 전해 듣던 `금세기 최고의 쇼`를 눈으로 확인시켜준 초대형 엔터테인먼트였다.
잭슨의 공연은 대중음악 콘서트라기보다 음악-춤-드라마-비디오아트-조명 등이 철저하게 계산된 연출에 따라 한데 어우러진 하나의 종합예술이었다. 잭슨은 이날 공연에서 형제들과 함께 노래하던 어린시절 `잭슨 파이브`때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노래인생과 환경보호, 반전 등 자신이 주창해온 메시지들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무대를 펼쳐보였다.
그러나, 공연이 성사될 때까지는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1996년 9월 프라하를 시작으로 부다페스트, 모스크바, 바르샤바 등을 거친 후 아시아에 들러 공연하는 `히스토리` 세계투어계획을 발표하면서 알려진 서울공연은 일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의 반대에 막혀 무산될 뻔 하기도 했다. 잭슨은 이번 공연으로 2백20만달러(약 18억원)를 개런티로 받았지만 공연을 주최한 태원예능은 객석 판매율이 부진해 적자였다.
▶1996년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출생
▶1994년북한, 단군릉 복원 준공
▶1993년로버츠-샤프 박사, 절단유전자 발견으로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선정
▶1991년소련 KGB 해체
▶1990년남북통일축구 1차전 평양서 개최
▶1989년항공우주연구소 발족
▶1976년신안 앞바다서 중국 송(宋)-원(元)대 유물 인양
전남 신안군 지도면 방축리 서북쪽 2km 바다 밑에서 중국 송(宋)-원(元) 대 도자기 등의 유물이 인양됐다. 유물은 어부 최형근씨가 1976년 1월 9일 끌어올린 그물에 청자병 등 6점을 건져내 당국에 신고하면서부터 알려졌다.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올려져 6백년 만에 햇빛을 본 송-원대의 도자기 유물들. 오랜세월 바다밑에 있어선지 조개껍데기, 해초뿌리, 개펄흙이 뒤엉켜 있다
이 무렵 유물을 발견한 지점 부근에서 도자기 122점을 불법 인양한 사람이 검거돼 유물 122점 모두를 압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유물의 보존관리가 시급을 요하게 되어, 국내 학계는 급기야 같은 해 11월 문화재위원회의 의결로 조사단을 긴급 파견, 예비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량의 유물이 매장돼 있는 것을 확인,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착수했다.
유물 인양작업은 2차에 걸쳐 진행됐다. 청자류(靑磁類) 1,253점, 백자류(白磁類) 441점, 잡유류 40점, 흑유류 56점, 철유류 7점, 천목류(天目類) 4점, 공기류(工器類) 105점, 청동기류(靑銅器類) 12점, 엽전(葉錢) 6,088점, 기타 68점으로 총 8,084점을 인양하여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도굴꾼에 의해 불법 인양된 자기 3백57점과 어부들이 신고한 7점을 합하면 해저보물은 모두 8천4백48점이나 된다.
▶1974년일본,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선출
▶1973년문화예술진흥원 개원
▶1969년소련, 소유즈 6호 발사
▶1968년미국, 아폴로7호 3인승 우주선 발사 . 궤도진입 성공
▶1963년유엔총회서 남아(南阿) 인종차별 비난결의안 가결
▶1963년프랑스 시인 장 콕토 사망
프랑스의 시인 장 콕토가 1963년 10월 11일 74세로 사망했다. 1889년 파리 근교의 메종라피트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가정을 배경으로 파리 사교계를 일찍부터 드나들었다.
17살 때 ‘콕토 시 낭송의 밤’을 열어 시단에 데뷔했으며, 20살 때 처녀 시집 ‘알라딘의 램프’를 냈다.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활동 범위는 소설가, 극작가, 안무가, 평론가, 영화감독, 재즈 연주가 등 다양했고 재능도 뛰어났다. 사교 범위도 넓어 발레 프로듀서 디아길레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화가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세속의 명예를 한껏 즐겼다.
레종도뇌르 훈장, 옥스퍼드대 명예박사,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칸 영화제 명예회장 등 그에게 부여된 명예도 그의 관심만큼이나 폭 넓었다. 호기심이 강해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으나 지나친 기교로 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받았다. 오늘날 칸 영화제에서 공식 로고로 쓰이는 ‘종려잎’은 콕토가 1955년 그린 것이다.
▶1963년에디트 피아프 사망
길가에서 태어난 것 부터가 에디트 피아프의 굴곡진 삶의 시작이었다. 3류가수였던 어머니는 그를 낳은지 두달 만에 사라졌고 곡예사 아버지는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세 살때 걸린 각막염으로 몇년동안은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10대 때 낳은 딸은 두 살에 죽었다. 도대체 끝을 알 수 없는 불행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노래 몇곡에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으로 그날그날 살고 있던 에디트 피아프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8세 때였다. ‘작은 참새’라는 뜻의 ‘피아프’란 이름으로 카바레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작고 초라한 외모, 그러나 청중들은 상처받은 영혼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노래에 매료됐다. ‘샹송의 여왕’을 향한 출발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랑을 꿈꿨다. 사랑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럴때면 슬픔을 노래로 달랬다. 그의 삶은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를 찾는 여정이었다. 헤비급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이야말로 그가 느꼈던 진정한 첫 사랑이었다. 그러나 세르당 마저 비행기사고로 그의 곁을 떠나자 죽은 연인을 위해 직접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사랑의 찬가’였다.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은 ‘장미빛 인생’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잇따른 자동차 사고와 마약 중독은 서서히 그의 몸을 망가뜨려 결국 1963년 10월11일, 48세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시간 뒤 평생의 친구였던 시인 장 콕토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조금전 피아프의 죽음에 “그녀는 방랑의 여로를 다한 배”라는 애도의 말을 남겼던 콕토였다.
같은 날 눈을 감은 평생의 친구 에디트 피아프(오른쪽)와 장 콕토
"나는 키 작은 사람들을 위해서, 뚱뚱한 사람들을 위해서, 소심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느날 그들에게도 사랑이 찾아 올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나에게 있어 샹송과 사랑은 하나이다. 나는 사랑에 빠진 여자이다. 나는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 . 그것은 불가능 하다."
- 프랑스 샹송의 여왕 에디트 피아프(Edith Giovanna Gassion) 1915.12.19. - 1963.10.11.
길가에서 태어난 것 부터가 굴곡진 삶의 시작이었다. 3류가수였던 어머니는 그를 낳은지 두달 만에 사라졌고 곡예사 아버지는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세 살때 걸린 각막염으로 몇년동안은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10대 때 낳은 딸은 두 살에 죽었다. 도대체 끝을 알 수 없는 불행과 절망의 연속이었다.노래 몇곡에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으로 그날그날 살고 있던 에디트 피아프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8세 때였다. ‘작은 참새’라는 뜻의 ‘피아프’란 이름으로 카바레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작고 초라한 외모, 그러나 청중들은 상처받은 영혼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노래에 매료됐다. ‘샹송의 여왕’을 향한 출발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랑을 꿈꿨다. 사랑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럴때면 슬픔을 노래로 달랬다. 그의 삶은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를 찾는 여정이었다. 헤비급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이야말로 그가 느꼈던 진정한 첫 사랑이었다. 그러나 세르당 마저 비행기사고로 그의 곁을 떠나자 죽은 연인을 위해 직접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사랑의 찬가(Hymne AL'amour)’였다.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은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잇따른 자동차 사고와 마약 중독은 서서히 그의 몸을 망가뜨려 결국 1963년 10월11일, 48세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시간 뒤 평생의 친구였던 시인 장 콕토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조금전 피아프의 죽음에 “그녀는 방랑의 여로를 다한 배”라는 애도의 말을 남겼던 콕토였다.
일찍이 카바레의 지배인 루이 드프레에게 노래를 인정받아 그의 카바레에서 데뷔하였으나 그가 피살되자 살인혐의를 받고 은퇴를 합니다.시인 레이몽 아소,여류 작곡가 마르그리트 모노등의 격려로 다시 일어선 그녀는 1940년 J.곡토가 그녀를 위하여 쓴 희곡을 독연하여여배우로 인정받고 그녀 자신의 작사에 의한 <장밋빛인생>,<사랑의 찬가>등 히트곡 외에도 <파리의 기사>로 1951년 <파담파담>으로 1952년 디스크 대상을 받아 유명해집니다. 이브 몽탕을 사랑하여 그를 인기 연예인으로 만드는 뒷바라지를 하며 23세의 젊은 남편이 지켜보는 가운데 48년의 일생을 마칩니다.그녀는 사랑없이 살 수 없다고 하였으며 권투선수'마르쉘 세르당'을 사랑했습니다
마르셀 세르당은 유부남이였지만 그녀는 그에게 그 어떤 요구(이혼,별거)하지 않았으며 항상 진실된 사랑을 바랍니다.
1949년 뉴욕에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그녀는 마르셀 세르당에게 보고 싶다고 당장 뉴욕에 오라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보러 오는 도중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합니다.(에어 프랑스의 최초의 사고) 슬픔에 잠긴 그녀는 긴 웨이브 머리를 과감히 자르고 도저히 무대에 설 기분같지않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올라서 신들린 노래 실력을 보여줍니다.
고인이 된 마르셀 세르당을 위해 만든 노래가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입니다.
Edith Piaf - L'Hymne à l'amour 사랑의 찬가
▶1962년제2회 바티칸공의회 개최
▶1962년인도네시아 군중, 아시아경기대회 문제 불만으로 일본대사관 습격
▶1960년4·19혁명 유족과 부상 학생, 국회의사당 점거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진지 거의 6개월이 지나도록 ‘반민주 사범’ 처벌도 ‘혁명입법’도 지지부진하여 학생들과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0월 8일 오전에 ‘장면부통령 저격사건’ ‘4·19발포명령사건’ ‘경기·서울 선거부정사건’ ‘제3세력 제거음모사건’ 등 이른바 6대 사건의 1심 언도공판이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열렸다.
재판 결과에 분노한 4·19 혁명 유족과 부상학생 3백여명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하고 있다
장준택 부장판사 주심으로 진행한 이 재판은 첫 공판 이래 이미 95일이 지나 늑장 재판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공판 결과, 경무대 앞 발포 책임자인 유충렬에게는 사형, 정치깡패 임화수에게는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했으나 이익흥, 김종원(장면부통령 저격사건 배후), 조인구, 곽영주(4·19발표 사건), 신도환(정치깡패 사건)은 모두 증거 불충분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같은 재판 결과에 분노한 4·19 혁명 유족과 부상학생 3백여명은 10월 11일 오전 11일 30분 경 국회의사당에 난입, 지팡이로 국회의원석을 내리치며 의장석을 점령했다. 의사당 밖에서도 시민 1만여명이 모여 “특별법을 제정하여 반민주 원흉들을 처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국회는 ‘민주반역자 처리법안’ 등 각종 혁명입법을 서둘러 제정했다.
▶1958년미국 달 로켓트 파이오니어 발사
▶1957년북한, 휴전선서 남북교역을 제의
▶1955년라오스 정전협정 성립
▶1953년필리핀 대통령에 막사이사이 당선
▶1950년중국군, 티베트 진군 개시
▶1949년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원폭실험 중지 제안
▶1939년아인슈타인 등 미국에 원폭개발 촉구
원자탄 개발 역사에서 오펜하이머와 함께 개운치 않은 존재를 드러내는 또 한 사람의 천재는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이다. 미국이 원자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45년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폭이 떨어지기 6년 전이었다. 1939년 10월 11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받아 본 아인슈타인의 편지 한 통이 미국 정부에 핵 개발을 `진언`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왼쪽)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아인슈타인
사실 이 편지에 아인슈타인이 사인한 날짜는 8월 2일이었다. 그 초고를 쓴 것은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였다. 아인슈타인은 질라드와 유진 위그너, 에드워드 테라 등 3명의 헝가리계 물리학자들의 간청을 받고 편지에 사인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박해를 받아 미국에 이주한 유태인이었던 이들은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원폭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의 반응은 신속했다. 즉시 상임위원 3명으로 우라늄 자문위원회가 발족했다.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아 원폭 개발에 전면적 노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 세워진 것은 1941년 12월 6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하루전 일이었다. 원자폭탄의 산실은,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미국 뉴멕시코 산타페 앨러모연구소였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는 1942년 말 이곳 소장에 임명돼 노벨상 급 물리학자들을 이끌며 원폭 개발을 성공시켰다.
▶1928년독일 비행선 대서양횡단 성공
▶1916년원불교 개교
▶1915년프랑스 곤충학자 파브르 사망
▶1912년영국-프랑스, 해군군사협정 성립
▶1909년진고개에 가스관 매설공사 착공
▶1904년민속학자 송석하 출생
▶1899년보어전쟁 발발
1899년 10월 11일 네덜란드 계 남아프리카 이주민으로 구성된 보어군이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나탈주를 전격 침공했다. 3년간에 걸친 보어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전투에 대비하는 영국군 진지의 병사들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아프리카 남단의 케이프 식민지를 획득했다. 이곳으로 대거 진출하기 시작한 영국인들과 일찍부터 이곳에 정착,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 이주민인 보어인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지자, 보어인들은 충돌을 피해 남아프리카 북쪽 지방으로 집단이주, 그곳에 트랜스발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세웠다.
영국이 이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자 보어인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제1차 보어전쟁 (1881-1884)이다.
전쟁결과 영국의 종주권과 트랜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함께 인정하는 런던협정으로 양국관계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1886년 트랜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이를 차지하려는 영국의 내정간섭이 차츰 노골화됐다. 수차례의 협상에도 원만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계속 갈등을 빚자, 마침내 트랜스발국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전쟁결과 보어군은 총병력 7만여명 가운데 7천여명이 전사했고, 집단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2만3천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영국도 불명예스러웠다. 인구 50만명에 군병력 7만여명 뿐인 보어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영국이 동원한 군병력은 45만명이었고 이 중 5천7백여명이 전사했으며 부상으로 목숨을 잃은 수만 해도 1만 6천여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1896년민비, 뮈델 주교에게 세례 받음(민 마리아)
▶1885년프랑스 작가 모리아크 출생
▶1592년임진왜란 진주대첩
▶1453년수양대군의 계유정란 발발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난이다. 조선 세종을 이은 문종이 일찍 죽고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 및 그를 보좌하던 김종서ㆍ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안평대군을 축출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정인지ㆍ한명회 등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으며,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 등 소위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은 실패하였다.
▶1335년조선 태조 이성계 출생
https://youtu.be/1ASRdLfT70M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블로거 안젤라,블러그 반가운의 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