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gito, ergo sum*/ 신경림
바닥을 모를 탐욕이, 천지에 두려움을 모르는 오만이, 이 세상에 오로지 나뿐이라는 무지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고, 코와 혀와 살갗을 무디게 만들어.
마침내 우리는 새와 짐승과 벌레도 다 느끼고 알아듣는 하늘의 노호와 땅의 울음과 바다의 몸부림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말았으니
어찌 허망하지 않은가, 쥐라기 백악기의 공룡도 멸종 직전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며 "Cogito, ergo sum. Cogito ergo sum." 하고 기고만장했을 터이니.
어쩌면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사람이 사는 별이 몇 만 개 몇 십만 개 몇 백만 개가 더 있어, 지진해일 같은 천재지변도 이곳저곳에서 매일처럼 일어나는 한갓 작은 흔들림에 지나지 않을는지는 모르겠으나.
*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시집『낙타』(창비, 2008) .......................................................................
'코기토 에르고 숨'은 방법론적 철학의 출발점이라 할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란 뜻의 라틴어이다. 원래 데카르트는 이를 프랑스어로 말했으나, 데카르트 철학이 상징하는 중세와의 단절을 강조하기 위하여 라틴어 표현이 더 널리 쓰이고 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해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며 진실이기에 그 생각으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생각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합리적 사고와 분별력을 가지고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내가 가장 확실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어떠한 것도 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규칙을 가지고 자신의 철학적 사색을 시작했다. 데카르트는 오만과 편견으로 얼룩진 지식의 한계를 던져버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는 또 이성만이 우리를 인간되게 하는 것으로서 짐승과 구분 짓게 하며, 의심하지 않으면 절대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했다. 이성이란 생각하는 능력,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이다. 즉 이성적 판단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의심은 불완전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적 회의론'의 핵심이 되었다. 근세 과학철학은 데카르트의 이런 자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의 차갑고 차별적인 이성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켰다. 급기야 다른 문명을 정복하고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논리로 변하여 자연 파괴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말았다. 그에 의하면 이성적 판단논리를 상실하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는 파괴되고 짐승 취급을 당해도 무방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결국 그의 지적처럼 인간은 스스로의 지식에 취해 관념과 한계의 울타리 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린 꼴이 되었다.
미셀푸코는 데카르트의 이러한 지나친 이성 편향의 이분법을 비판했다. “광기는 사유의 한 부분”이라고 한 데카르트의 그 광기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성의 이름으로 감금되고 격리됐다고 미셀푸코는 말했다. 인간 소외, 인간성 상실, 전쟁과 테러, 대규모 환경파괴. 대량 기아, 문명의 갈등과 충돌 등 이 시대 수많은 문제의 중심에 이분법적 이성의 논리가 숨어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데카르트 이후 지난 3백년을 지배해온 '이성'이 가장 화려한 문명과 가장 참혹한 비극이란 극한의 이분법적 상황을 동시에 만들어낸 것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경험한 현대 철학은 이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시작했다. 이성의 시대에 대한 종언을 외치며 21세기 문명은 이성의 반대개념인 감성을 다시 부활해내고 있다. '감성의 시대'라고 선언한 사람도 있지만 아직 그 단계까지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성의 차가움에 질린 사람들이 찾아낸 따뜻한 감성,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람을 품어 안는 동양적 감성의 철학이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조금은 겸손해져서 우주에는 지구별 같은 사람 사는 별이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가진다. '지진해일 같은 천재지변도 이곳저곳에서 매일처럼 일어나는 한갓 작은 흔들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천지에 두려움을 모르는 오만'과 '이 세상에 오로지 나뿐이라는 무지'로 똘똘 뭉쳐진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문제들이 풀리지 않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자신만이 옳고 타인의 생각은 틀렸다는 자기 맹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데, 자만과 무지에서 허덕이는 이 나라의 정치인들 때문에 요즘 화가 많이 난다. 총선 후 대통령의 입장 표명은 예의 유체이탈 화법 그대로이고, 야당 지도자 역시 따스한 감성도 도덕적 우월감도 없이 나 말고는 없다는 식의 기고만장과 고집불통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안철수에 대한 매력과 신뢰는 무르팍도사에 나왔을 때, 딱 거기까지였다.
자신은 나쁜 인간일리가 없고, 나쁜 선택을 할리가 없으며, 고귀한 길만을 걸어야하므로 자신이 가는 '마이 웨이'는 무조건 옳다는 듯이 들린다. 전현희 당선자를 기껏 업어놓고서는 돌아서서 등 한번 두드려주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쑥 앞으로 걸어나가는 김종인 대표의 모습에서 2012년 대선 투표 직후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안철수의 뒷모습이 어른거렸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그러고도 요즘 그들의 위풍이 지나치게 당당해 보이는 것이 몹시 거슬린다. 그리고 진보가 우리사회의 주류적 가치로 넓게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문재인도 더 겸손하게 시민들을 향한 따스한 감성의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될 것이다.
권순진
Ain't no sunshine - Eva Cassidy |
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