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간을 넓힌 문명의 기기들...
가끔 맞이하는 아파트나 건물에 엘리베이터 점검시간에는 20층도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올라가본다. 그러다가 문득 엘리베이터같은 수직이동의 수단을 생각하면서 삶의 공간을 넓힌 문명 기기에 감사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뉴욕과 파리의 상징물 하면 제각각 배경지식과 경험에 따라 다르겠지만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 파리는 에펠탑을 손꼽는다. 그렇다면 두 건축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예술성은 제쳐두고 외형적으로 상징물이 높다는 점일 것이다.
○ 승강기
미국의 독립전쟁 승리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선물한 뉴욕의 자유의여신상 내부를 설계한 사람도 에펠탑을 설계한 사람도 '귀스타브 에펠'이고, 또 하나는 두 건축물의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해 설치된 엘리베이터가 같은 회사의 기계라는 점이다.
○ 실패의 아이콘
'엘리샤 그레이브스 오티스'는 1811년 8월 미국 버몬트주 남단에 위치한 작은 마을, 핼리팩스에서 '스티븐 오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티스는 어릴 적부터 돈을 버는데 관심이 많았지만 작은 촌에서 돈을 벌 방법이 없어 답답함을 느끼고 어린시절부터 대도시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19세가 된 오티스는 곧바로 집을 떠나 뉴욕주 트로이라는 곳에 도착해 그 곳에서 마차 운전사로 5년 동안 일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해서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지 하겠단 각오로 열심히 일했다.
일하던 중 그는 '수잔 호튼'이란 여성을 만나 1834년 결혼을 했고 차례로 '찰스 오티스'와 '노턴 오티스'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열정이 넘쳤던 그였지만 왠지 모르게 그에겐 불행한 일만 계속해 발생했다.
첫째 아들이 태어난 직후 오티스는 심각한 폐렴에 걸려 죽을 뻔 했다.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요즘엔 별거 아닌 질병이지만 당시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겨우 살아난 오티스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제분소를 건설해 첫 사업에 도전하지만 사업은 영 신통치 않았고 이로 인해 제재소로 개조해 새로운 사업을 해보는 이것저것 도전해보지만 하는 족족 망했다.
결국 사업 대신 마차를 운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또다른 불행이 그를 덮친다. 그의 아내 수잔이 병에 걸려 사망해버린 거다. 졸지에 홀아비가 된 그는 불행이 항상 그를 따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국 34살이 된 오티스는 뉴욕주의 주도인 올버니로 이주해 재혼과 함께 새로운 일에 나선다.
각종 제조업 회사에 기계공으로 입사해 일을 해나갔다. ‘베드 스테드’라는 침대 공장에서 침대 프레임 제작자로 일하던 그는 종일 매달려 겨우 12개의 프레임을 만들었다. 너무나 힘겹고 지루했던 그는 골똘히 연구한 끝에 기계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터너(turner)를 발명해 단순 반복 작업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특허를 냈다.
이때부터 발명가 오티스의 역량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해당 특허를 활용하니 침대 받침대를 만드는 속도도 4배 가량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기계 설비 제작과 특허에 관심이 컸던 그는 업무 효율성을 높인 성과를 인정받아 특별 보너스를 받기도 했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자신만의 기술을 갖고 사업을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수압을 동력원으로 이용하는 안전 브레이크를 설계하기 시작한다.
빠르게 달리는 기차를 안전하게 멈추거나 자동 제빵 오븐도 위험에 노출 시 곧바로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였지만 이때에도 그에게 불행이 덮친다.
그가 거주하던 올버니 시에서 담수의 공급 방향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손쉽게 안전장치의 동력원을 확보할 수 없었던 그는 이번에도 사업에 실패했다.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1851년,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오티스는 기계공으로 일하기 위해 뉴욕 인근 뉴저지주 버겐시티로 갔다가 다시 뉴욕 용커스로 이동해 침대 공장 관리자로 취직하며 일자리를 전전했다. 공장을 청소하던 오티스는 계단을 이용해 쓰레기 더미와 침대 자재를 옮기는 것이 너무 힘들어 신세 한탄을 했다.
이전에 근무하던 침대 공장에서 특허를 냈듯이 이번에 오티스는 어떻게든 좀더 쉽고, 효율적으로 이 일을 해낼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하 그 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아이디어가 바로 엘리베이터였다.
○ 세계 최초 엘리베이터
사실 사람이나 화물을 수직으로 이동시키는 승강기 개념 자체는 기원전부터 존재했다. 밧줄을 매달아 사람의 힘으로 끌고 당기기도 했고, 물이나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지렛대 삼아 쓰기도 했지만 안정적으로 동력원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데다 특히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중화되지 못했다.
○ 오티스의 안전브레이크
고민에 빠진 오티스는 소위 안전 전문가였다. 과거 안전 브레이크 설계 사업을 해보기도 했던 그는 이 브레이크를 승강기에 달면 어떨까 생각해냈다. 오티스는 2개의 기둥 사이에 상하로 움직이는 판을 넣어 침대 자재나 쓰레기를 옮길 수 있는 안전 엘리베이터를 개발해낸다. 이는 만약에 승강기를 지탱하는 지지대가 부서지거나 승강 로프가 끊어지거나 풀리더라도 곧바로 멈출 수 있어 사고가 날 가능성이 없는 게 특징이다.
당시 오티스는 해당 기술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다 특별한 것이 없다는 이유로 특허를 내거나 상사에게 보너스를 받을 생각조차 안 했지만 그가 개발한 안전 엘리베이터는 짐을 옮기는데 유용했고 그는 마지막이란 각오로 엘리베이터 사업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그 사이 침대 공장은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고 또다시 일자리를 잃은 오티스는 1853년 야심 차게 자신의 이름을 따 '오티스 엘리베이터'라는 회사를 만들지만 창업초기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제품 판매조차 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도전은 또 실패로 막을 내리나 했다.
그러던 1854년, 오티스는 벼랑 끝 심정으로 뉴욕에서 열리는 만국산업박람회에 참석해 제품 홍보에 나선다. 절실했던 그는 관중들 앞에서 직접 9m 높이에 멈춰선 승강기에 올라타 고정된 밧줄을 끊으라고 명령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고 줄이 끊어지자 5cm 가량 떨어진 오티스의 엘리베이터는 곧바로 멈췄다.
오티스는 외쳤다.
“안전합니다, 여러분. 안전해요!”
이는 안전 엘리베이터의 탄생을 대중에 각인시키는 사건이었다.
이후 오티스 엘리베이터는 승승장구 매년 2배씩 주문량이 늘어났고 그는 엘리베이터를 더 신속하고 안전하게 정지시킬 수 있는 밸브 엔진 등을 개발해 기술력도 발전시켰다.
그렇게 1857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위치한 5층 높이의 E.V호와트 백화점에 최초 승객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된다. 바로 오티스의 제품이다. 본격적인 고층빌딩의 시대를 열게해준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오티스는 1861년 뒤늦게 해당 안전 브레이크 특허 기술을 승인받았고 특허를 낸 1861년 오티스는 당시 유행병이던 디프테리아에 걸려 4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막 꽃을피우기 시작했던 오티스의 사업은 그의 두 아들 찰스와 노턴에 이어졌고 찰스 오티스는 회사를 이어받은 뒤 세계 최초의 승강기 유지관리 서비스 계약을 맺고 사후 관리에도 만전을 기한다.
이후 산업화 시대가 본격화되며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고 일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1887년엔 파리 에펠탑에 오티스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꼭대기까지 갈 수 있도록 했다.
○ 오티스 승강기
국내 최초의 엘리베이터도 설마 오티스에서 만든 것일까? 당연히 맞다. 국내 최초의 엘리베이터는 1910년 조선은행에 설치된 오티스의 엘리베이터이다. 또한 1914년 조선호텔에 국내 최초의 전동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역시 오티스사에서 개발한 혁신적인 기계였다.
○ 공간을 확장시킨 발명품
인간의 수평적 생활반경을 늘려준게 마차나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등 발전된 이동교통수단 이였다면, 엘리베이터는 인간의 수직공간을 획기적으로 확장시키며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렸다.
아파트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대한민국도 엘리베이터가 없었다면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빌딩도 아파트같은 주거의 혁명도 엘리베이터가 없다면 가능했을까? 이래저래 고맙고 감사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