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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방은 삼국시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한 공간이다. 어둡고 고요한 복도를 지나면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고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다.
뛰어난 주조기술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고,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근엄한 반가사유상의 모습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고뇌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사유의 방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1962-1),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반가좌(半跏坐)라는 특이한 자세 때문에 얼굴과 팔, 다리, 허리 등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치마의 처리도 매우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반가사유상의 등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조각사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풍부한 조형성과 함께 뛰어난 주조기술을 선보이는 동양조각사에 있어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1962-1)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이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의 자세는 출가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인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대다수가 독립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그 중 석굴암 조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飛鳥), 하쿠호(白鳳)시대의 반가사유상 제작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반가사유상의 존명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미륵보살로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이는 미래에 태어나 성불하는 구세주 미륵보살의 행적이 과거 싯다르타 태자의 그것을 비슷하게 따른다는 경전의 내용과 관련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반가사유상의 조형적 아름다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반가사유상은 우선 화려한 보관이 눈에 띕니다. 마치 탑처럼 보이는 장식이 솟아 있는 이 보관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특이한 형식으로 흔히 일월식(日月蝕)이라고 합니다. 일월식의 보관 장식은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관에서 유래․발전하여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보관으로 차용되었는데, 인도 간다라의 보살상이나 중국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지에서 다양한 예가 나타납니다. 정면에서 이 반가사유상을 보면 허리가 가늘며 여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측면에서 보면 상승하는 힘이 넘쳐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탄력 넘치는 신체의 곡선이 강조되었고 양쪽 어깨로부터 끝이 위로 올라와 날카로움을 한층 더해주고 있는 천의자락은 유려한 선을 그리면서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양 무릎과 뒷면의 의자 덮개에 새겨진 주름은 타원과 S자형의 곡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변화무쌍한 흐름을 나타냅니다.
반가좌의 자세도 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허리를 약간 굽히고 고개는 살짝 숙인 채 팔을 길게 늘인 비사실적인 비례를 통하여 가장 이상적인 사유의 모습을 창출해낸 조각가의 예술적 창의력에서 비롯됩니다. 더욱이 뺨 위에 살짝 댄 오른손 손가락은 깊은 내면의 법열(法悅)을 전하듯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오묘합니다. 한마디로 이 불상의 조형미는 비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종교적 아름다움, 곧 이상적 사실미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고졸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반가좌의 자세,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 조화, 천의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완벽한 주조 기법 등, 우리는 이 금동불에서 가장 이상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이 상은 내부가 흙으로 채워진 중공식(中空式) 주조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크기가 1m에 가까워서 금동불로는 비교적 큰 상임에도 불구하고 구리의 두께가 2~4mm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얇은 두께를 고르게 유지하기 위하여 머리까지 관통하는 수직의 철심과 어깨를 가로지르는 수평의 철심을 교차시키고, 머리 부분에 철못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도의 주조 기술이 뒷받침되었기에 이처럼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 불상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옛 지정번호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의 비교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쌍벽을 이루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반가사유상입니다. 그러나 두 상은 조형적인 면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입니다. 국보 83호 상은 머리에 낮은 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이라고 합니다. 또한 국보 78호 상과 달리 상반신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으며, 단순한 목걸이만 착용하였습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표현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로 보아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국보 78호보다 조금 뒷 시기인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닮아, 우리나라 불상의 고대 일본 전래와 관련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한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제작국과 관련하여 정확한 출토지가 알려져 있지 않아 백제 혹은 신라의 것이라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신체와 천의의 힘찬 기세, 고구려에서 특히 중국의 북위와 동위시대 양식의 불상이 크게 유행한 점,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 양식과 흡사한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 불상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로는 하나의 특정 국가를 지목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는 이 반가사유상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범용적 예술성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金銅半跏思惟像) : 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고대 불교조각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6, 7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불교조각품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 상은 일찍이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형상이 매우 흡사하여 한국과 일본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국보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대개 어떤 주된 불상에 종속되거나 한 부분적인 존재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단독으로 독립되어 예배 대상으로 조성된 예가 드물지만, 백제에 와서는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따라서 반가좌 특유의 복잡한 신체 구조를 무리 없이 소화하여 중국의 반가사유상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자세의 과장과 단순화, 동일한 단위의 옷주름이 반복되는 도식성을 극복하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합니다.
정교함과 잔잔한 미소가 풍기는 숭고미
반가사유상은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이른바 반가(半跏)한 자세에 오른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마치 사유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도의 간다라나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불전(佛傳) 부조 중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太子像)’, ‘사유상(思惟像)’, ‘용수상(龍樹像)’ 등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미래의 부처)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이후 일본의 아스카, 하쿠호 시대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보는 인식은 신라에서 특히 성행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전륜성왕 사상의 유행과 더불어 화랑을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의 화신으로 여기게 됩니다. 당시 신라에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로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으면서 이와 같이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단정 지어 부르는 것은 문헌적 근거가 많이 약하여 ‘반가사유상’으로 칭하는 것이 보다 무난합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 정교하고 완벽한 주조기술, 여기에 더해 얼굴의 잔잔한 미소는 종교의 예배 대상이 주는 숭고미를 더해줍니다.
머리에는 세 개의 반원이 이어진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을 쓰고 있습니다. 관의 표면에 아무런 장식도 표현되지 않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데, 이러한 형식의 보관은 인도나 중국의 보살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 선은 길게 호를 지으며 콧선으로 이어지는데, 작지만 길게 묘사된 눈은 끝이 살짝 올라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풍깁니다. 그러나 이를 무마하듯 단정하게 다문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는 모습은 신비감마저 주고 있습니다.
나형(裸形)의 상체는 가슴근육이 살짝 도드라지고 허리는 잘록합니다. 오른쪽 얼굴에 대고 있는 손가락은 움직임을 표현하여 율동감이 있으며, 이와 대칭되기라도 하는 듯 위로 올린 오른발의 발가락은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린 모습이 생동감을 더합니다. 반가사유상의 제작에 있어 특히 어려운 점은 오른팔의 처리입니다. 오른 팔은 무릎에서 꺾여서 뺨에 다시 닿아야 하므로 길게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상은 오른쪽 무릎을 위로 살짝 들어 팔꿈치를 받쳐주고 그 팔 또한 비스듬히 꺾어 살짝 구부린 손가락을 통해 뺨에 대고 있어 매우 치밀한 역학적 구성을 보여주며,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는 살짝 숙인 얼굴과 상체로 이어집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출토지가 불명확하여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이 상은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합니다. 지금까지 이 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제작지를 근거로 신라작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두 상은 삼면관의 보관 형태, 가슴과 허리의 처리, 무릎 밑의 옷자락과 의자 양 옆으로 드리운 허리띠 장신구 등이 매우 흡사하여 일찍이 양국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에 있어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은 당시 일본 목조불상 대부분이 녹나무나 비자나무로 제작된 것과 비교하여, 한국의 경상도 일대에서 많이 자생하고 있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으며, 제작방법에 있어서도 신체의 각 부분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다음 짜 맞추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리 통나무 하나에 상을 그대로 깎아서 조각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623년조에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이 불상을 목조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류지 상이 우리 상에 비해 정적인 느낌이 강하여 서로 다른 조형감각을 풍긴다는 점도 제기되고 있으며, 미술사적으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형태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 기술로 미루어 백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작국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1962-1)
종목 국보 (옛 지정번호 국보 제78호 :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 1구
시대 삼국시대
소유 국유
위치 : 국립중앙박물관(대한민국)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시대에 제작된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또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로 앉아서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상을 하고 있는 불상을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이라고 부른다.
본래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의 불교조각실 (301호)에 국보 반가사유상 전용전시실이 마련되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과 함께 번갈아 전시되었으나, 상설전시관 2층에 '사유의 방'이라는 이름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2021년 11월 12일부터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또한 2017년 6월에는 표면 부식을 막고 균열 부위를 보강하는 보존처리를 마쳤으며, 안정화 처리 과정에서 표면을 덮은 이물질이 제거돼 불상의 새김문양을 한층 분명하게 드러냈다. 오른쪽 어깨 부근 옷자락 일부와 보관 솟음장식의 균열부도 보강하였다.
반가 사유상
반가사유상은 불전(佛典)의 내용 중에서 석가가 태자였을 때 궁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 날 궁전 밖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는 고통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인생에 무상함을 느끼고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중생들은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된 도상이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彌勒菩薩)'로 부르게 된 것은 일본 야츄지(野中寺)에 있는 666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반가사유상에 '미륵상'이라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반가사유상이 대부분 '태자사유상'으로 기록되어 있고 간혹 '용화수사유상(龍華樹思惟像)'이라는 명문도 발견되고 있다. 이 용화수란 석가불(釋迦佛)의 제자로서 미래에 성불(成佛)하리라는 언약을 받고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있는 미륵불이 석가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서 남아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화수 밑에서 세 번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하생(下生)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경주 근교에 있는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중에 반가사유상이 '미륵석상'이라는 명문을 가지고 있으며 또 신라에서는 청년 귀족 집단인 화랑 제도와 미륵신앙을 연결시켜 흔히 '미륵보살반가상' 이라고 불렀다. 특히 삼국 시대인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신라 중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금동 또는 석조로 만들어졌다.
작품 설명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은 머리에 특이한 형태의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 위에 초생달과 둥근 해를 얹어놓은 일월식(日月飾)의 장식이 표현되어 있어 일명 '일월식삼산관사유상(日月飾三山冠思惟像)' 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일월식 보관은 이란의 사산조(朝) 왕관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ㆍ일본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보관 밑으로는 관대(冠帶)가 양쪽 끝에 있는 둥근 고리를 통해 두 가닥으로 나뉘어 어깨 위에까지 내려와 있으며 목에는 가운데 끝이 뾰족한 굵은 목걸이가 장식되어 있다.
얼굴은 약간 네모난 편으로 눈을 가늘게 떴으며 코는 유난히 오똑하게 표현되어 있고 입가의 미묘한 미소 등에서 사색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매우 날씬하게 표현되었는데 좁은 어깨와 가는 허리ㆍ팔 등에서 부드러운 곡선미가 잘 드러나 있다. 얇은 천의(天衣)는 양쪽 어깨에서 넓게 펴져서 양끝이 뻗어 있고 몸 앞쪽으로 내려온 천의자락은 무릎 부분에서 교차하여 다시 양 팔에 걸쳐 내려오다가 대좌 양쪽에서 리본으로 묶여져 있다. 이와 같이 날개처럼 뻗어있는 옷깃은 중국에서는 피건(被巾)이라 하며 북제(北齊) 후기에서 동위(東魏) 초기의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천의 형식이다. 허리에 걸친 군의(裙衣)는 띠 매듭으로 묶여 있는데 두 다리 위에 표현된 층단식 주름이나 대좌를 덮고 있는 Ω형의 옷 주름은 입체감이 없고 형식적이면서도 예리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이 불상은 뒷모습까지도 완벽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특히 천의가 U자형으로 길게 늘어지게 표현된 점이나 의자에 보이는 투각 장식은 매우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이 금동반가사유상에 보이는 날씬하면서도 탄력감 있는 신체표현과 날개와 같은 옷깃, X자형의 천의, 형식적인 옷 주름 표현 등은 대체로 중국 동위 및 서위의 불상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상과 함께 6세기 후반경의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현재 출토지를 알 수 없어 그 제작지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전체적으로 둥근 맛이 적고 평면성이 강조되어 있는 직선 위주의 조형감 때문에 고구려 불상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나왔다.
[문화재비화]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9. 8.
일본 국보 제1호를 만들어 낸 신라인의 예술혼과 기예는 하늘의 작품이지 결코 사람의 것은 아니다. 현재 학교나 학원에서 미술의 데생을 배울 때 보통 서양의 비너스 상을 보고 그리는 현실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미를 자랑하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배운다면 젊은이들에게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깨우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자에 「법보신문」에서 이 불상의 모조품을 학교에 무료로 기증한다는 소식은 참으로 고마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세계 최고의 조각품으로 꼽히는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1910년경에 충청도에서 발굴되었다.
그런데 1910년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발표에 맞추어 또 다른 불상이 서울에 나타났다. 이 불상도 상기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다. 높이가 83.2센티미터이고 후치가미 사다스케(淵上貞助)가 입수하여 초대 총독 데라우치에게 기증하면서 세상에 밝혀졌다. 현재 국보 제78호인 이 불상은 국보 제83호와 비교해 한층 고식적(古式的)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6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는 눈을 가늘게 내려 떠서 잔잔히 웃고 있는데, 얼굴에는 광대뼈가 약간 나오고, 어깨에 날리고 있는 날카로운 옷자락, 얕게 새겨진 옷주름 선, 끝이 뾰족한 목걸이, 보관의 치밀한 장식이 돋보인다. 이와 함께 다리의 U자형 선각 주름이나 어깨에서 앞뒤로 내려간 옷자락의 특성적인 처리 등은 세장(細長)한 형태와 함께 6세기 초 이래의 중국에서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형식과 비슷하다.
이 불상은 데라우치가 은밀히 소장하다가 그가 1916년 총리대신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해 지금에 전해진다. 그러나 후치가미 역시 불상의 출토지를 밝히지 않아 현재도 불상의 정확한 출토지를 모르고 있다. 이 불상은 1998년 6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한국실 개관에 맞추어 특별전 출품을 위해 출국하였다. 이 때의 불상 보험 평가액은 3천5백30만 달러로 원화로는 4백80억 원에 이른다. (참고:「한국문화재 비화」․이구열․한국미술출판사)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1962-2)
종목 국보 (옛 지정번호 국보 제83호 :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 1구
시대 삼국시대
소유 국유
위치 : 국립중앙박물관(대한민국)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일제 때 밀반출되어 출토지가 불분명하여 그 제작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삼국 시대 불상 중에서 대표적인 예로서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성도(成道)하기 이전의 태자 시절에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형(太子思惟形)에서 유래한 것이나 불교 교리의 발달에 따라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인간 세상에 나타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중생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하겠다는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의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특히 6~7세기 동양 불교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이 있으며 일본 교토시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해 한일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 큰 주목을 받아 왔다.
작품 설명
측면 높이 93cm.
3 개의 둥근 산 모양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三山冠半跏思惟像)이라고도 한다. 이 불상은 두 줄로 융기된 목걸이 외에는 몸에 전혀 장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전반적으로 단순함을 강조한 둥근 조형감이나 좀 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옷 주름 표현, 움직이는 듯이 조각된 두 손과 두 발의 모습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생동감이 잘 나타나 있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 사유하는 모습이며 양 눈썹과 콧등의 선은 길게 연결되면서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얼굴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종교적인 평온함을 주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준다. 날씬하면서 둥근 맛이 강한 신체에는 천의(天衣)가 몸에 완전히 밀착되어 옷주름이 전혀 표현되지 않은데 비해 군의(裙衣)의 옷 주름은 두 다리를 덮으면서 무릎과 다리의 볼륨감을 강조하고 대좌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또한 허리 양쪽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양다리 옆에 있는 둥근 고리를 통해 늘어져 엉덩이 밑으로 감추어져 있다. 특히 양감이 강조된 두 다리의 형태나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주름 표현 등은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하반신 부분만 남아 있는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석조반가상과 양식적으로 비교된다.
금동반가상의 왼쪽 다리는 별도로 마련된 연화족좌(蓮花足座) 위에 놓여 있는데 왼쪽 발과 족좌의 앞부분은 후에 수리된 것으로 원래는 크기가 조금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으로 받침대 위에 둥근 방석이 놓여 있는 특이한 등나무 의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제작 시기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보이는 균형잡힌 신체 비례나 생동감 있고 안정감 있는 불신(佛身)의 모습 등은 중국 동위에서 북제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대체로 7세기 전반 경에 조성된 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상 전체에 나타나는 둥근 맛이나 단순한 조형감 등은 백제적인 요소로 백제 무왕대(武王代; 602년-641년)에 조성된 반가사유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 삼국에서 모두 조성된 것으로 보아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서 다수 제작되고 예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에서는 청년 귀족 집단인 화랑 제도와 연관되어 미륵 신앙이 크게 유행함에 따라 미륵의 화신으로서 반가사유상의 의미가 부각되면서 많이 조성되었다.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도 양식상 매우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되나 침울한 얼굴 표정이나 입체감이 적은 두 다리와 옷 주름 표현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목조반가상은 많은 부분이 보수된 상태로 변형되어 있으나 수리 이전의 모습을 보면, 얼굴 표현에서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더욱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에 대해서는 백제와 신라의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고류지를 창건한 진하승(秦何勝)이 신라계의 도래인이었다는 사실이나 신라에서 온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하는《일본서기》의 기록은 이 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류지의 목조반가상이 한국, 특히 경상도에 많은 적송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시 삼국과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통해서 볼 때 한반도, 특히 신라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고류지 반가상은 목조상으로 서로 재질은 다르나 형태상으로나 양식상으로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한국 반가사유상의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어진다.
해외 전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해외 전시 횟수는 1960년 이후 총 7차례에 달한다. 가장 최근에는 2013년 미국 뉴욕시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황금의 나라, 신라' 전에 출품되었다. 당시 문화재위원회와 변영섭 문화재청장 측이 '해외로 반출되는 문화재가 너무 많다'며 전시 불가 심의를 내렸으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측의 요청과 문화관광부의 개입으로 출품될 수 있었다.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하여 83호 반가사유상과 일본 고류사의 반가사유상의 상호 교환 전시를 추진한 바 있었다. 그러나 고류사 측 주지가 '목조반가사유상의 해외전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내비치면서 83호 반가사유상의 일본 전시 역시 무산되었고, 대신 국보 78호 반가하유상과 일본 국보 23호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의 교환 전시로 변경되었다.
[문화재비화] 세계 최고의 조각품,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9. 8.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돈자형 의자 위에 미륵보살이 삼산관을 쓰고 반가한 자세로 앉아 있다. 1910년경에 충청도에서 일본인 가지야마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미륵반가사유상(金銅彌勒半跏思惟像. 93.5cm, 국보 제83호), 이 불상은 돈자형(墩子形) 의자 위에 미륵보살이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앉아 있는 형태로 삼국 시대 말엽(7세기 경)의 대표적 미술품이다. 이 불상을 보고 어느 독일의 박물관 관계자는 ‘십 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진품이다’라고 극찬을 했다.
오른손 끝을 뺨에 살며시 대어 명상에 잠긴 보살은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에 얹은 반가상의 모습이다. 또 얼굴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명랑한 표정이고, 천의를 목뒤로 돌려 어깨를 감싼 형태는 부피감과 함께 탄력적이면서 부드러운 율동이 느껴진다. 소박한 삼산 보관, 벗은 상체, 간결한 목걸이에서는 단순함이, 가늘고 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머금은 입에서는 자비로움이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한편으론 부드럽고, 한편으론 섬세하여 사실적인 느낌에 숨이 막히는 감동을 전해 준다.
십 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우리나라 국보 제1호가 ‘남대문’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럼 일본의 국보 제1호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7세기 초 신라에서 전해 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상기의 불상과 매우 흡사하다. 다만 일본의 불상은 한 그루의 나무로 조각한 목조불이고, 우리 것은 금동불인 점이 다를 뿐이다.
일본 교토(京都)의 코류지(廣隆寺)에 봉안된 이 불상은 높이가 123.5센티미터로 일본에서는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寶冠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라 부른다. 불상을 친견한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Jaspers, 1883~1969)는 세계 최고의 걸작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대 그리이스의 신(神)들을 조각한 조각과 로마 시대에 만든 수많은 기독교의 예술품은 아직 완전히 인간적인 냄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불상은 지상에 있어서 모든 시간적인 것의 속박을 초월해서 이루어 낸 인간 존재의 가장 맑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이 코류지에 봉안된 것은 603년의 일이라고 한다. 성덕태자(聖德太子)가 교토의 지도자였던 신라인 진하승(秦河勝)에게 전해 주고, 진하승은 곧 코류지의 전신인 봉강사(蜂岡寺)를 창건하며 이 불상을 모시게 되었다. 이 불상이 신라인이 만든 불상이라는 과학적 근거는 재질이 적송(赤松)이란 점이다. 1980년 대 초, 불상의 미소에 반한 일본인 대학생이 자기도 모르게 불상에 접근했다가 실수로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큰 소동이 일어났지만 다행스럽게 정밀 조사를 통해 재질이 한국에서 난 적송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불상은 한국에서 적송을 들여다 일본 내에서 조각한 것인지, 아니면 신라에서 조각을 완성해 현해탄을 건너간 것인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다만 어느 쪽이든 한반도의 장인에 의해 조각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 완성된 형태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절에는 또 다른 신라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균형도 잘 잡히고 기교도 뛰어나지만 어쩐지 우는 아이의 모습 같아 그곳에서는 ‘우는상투미륵상’으로 부르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그러나 재질은 장목으로 616년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며 전해 준 것이라 한다.
이 땅의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경술국치가 있던 1910년 어느 날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이 땅을 침입한 악질적인 도굴 앞잡이 가지야마 요시히데(梶山義英) 는 충청도 어느 산골에 버려진 석탑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속에는 숨이 막히도록 빼어난 예술품이 천 수백 년의 잠에서 깨어나 침략자를 보고는 얼떨결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악질은 예술 혼이 빼어난 이 불상을 보고 어떠한 미소를 지었을까?
일본인은 집에 아담한 연못을 두고 비단 잉어를 기르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일본 대신의 환심을 사야 하는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은 그들이 정원을 꾸밀 마땅한 석등과 탑을 찾아 내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마침 한국의 깊은 산에는 언제 없어진 지 모르는 폐사지가 널려 있었고, 잡초 속에는 탑이며 석등, 부도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 일본인 골동상의 표적이 되었다. 탑이나 부도는 고승의 사리나 불경을 봉안한 무덤의 또 다른 형태이다.
이 땅의 백성들은 선조가 만든 예술품을 지독히도 즐기지 못하는 민족이다. 특히 효 사상이 뛰어나 조상의 묘를 파헤치면 죄를 받는다고 생각했고, 특히 그 속에 간직된 부장품을 꺼내 집안에 두면 부정이 탄다고 해 터부시하였다. 잡초에 뒹구는 탑이나 부도 또한 신앙의 대상으로만 경외시 했을 뿐 그것들을 마당에 설치해 감상하려고는 생각지 않았다.
계룡산에 살면서 백제 불상과 유물을 많이 연구한 이나다 순스이(稻田春水)는 이 불상을 보고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고만 발표했다. 그래서 이 불상은 백제불상으로 간주되고 정확한 출토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불상을 획득한 가지야마는 1912년, 이왕가박물관장으로 있던 스에마쓰 마히코(末松熊彦)에게 접근해 이 불상을 2천6백 원(圓)을 받고 팔았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보통 5원 정도 했으니, 거의 5백 가마가 넘는 거금이다. 그러나 그 돈은 온전히 이 땅의 백성들이 낸 세금이었다.
고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토가 창경궁에 지은 이왕가박물관은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도굴한 문화재를 조선 백성이 낸 세금으로 합법적으로 구매해 주는 루트였다. 그 후 이 불상은 이왕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전해 오다가 1915년 이왕가 박물관이 총독부박물관으로 개칭되고, 해방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칭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2층 시설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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