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인 축성 생활자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인 동시에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시고 올라가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축성 생활자들, 수도자들을 각별히 사랑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들이 더욱 신원에 맞는 걸맞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자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들이 각자 부여받은 고귀한 성소와 카리스마를 기쁘고 충만하게 실현하도록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축성(祝聖, consecration)되다’ 라는 말의 의미는 성화(聖化)되다, 성(聖)스럽게 변화되다, 거룩하게 되다, 신성하게 되다, 봉헌되다, 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은 맞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이 아기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과 미래, 삶 전체를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선별되고 축성된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모든 순간을 거룩하고 향기롭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도 중요하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한 작은 수도자로서, 주님의 겸손한 종으로서, 기도 안에 기쁘고 환한 얼굴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도자들이 자신이 발한 삼대 서원이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거룩하고 맑게 살아 존재 자체로 교회와 세상 앞에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존재’ ‘신원’은 마치 날카로운 날이 서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닦으며, 주님의 종이라는 수도자로서의 신원에 걸맞게 살고자 발버둥 칠 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위한 멋진 이기(利器)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망각한 채, 흥청망청, 빈둥거리며 살아갈 때, 세상의 고통과 절규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우리끼리만 희희낙락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과 교회 앞에 그 어떤 증거도 되지 않고, 그저 놀림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수도자라는 존재 자체, 신원 자체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해치는 흉기(凶器)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구원에 이르는 봉헌은 오직 하나뿐: 용서를 위한 봉헌>
복음: 루카 2,22-40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아프지 않으면 봉헌이 아닙니다. 예언자 시메온은 성모님께서 장차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프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구약에서의 봉헌과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봉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 봉헌의 목적은 첫째, ‘저는 당신 것이고 제가 가진 것도 당신 것입니다.’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바쳤던 제물이 번제와 곡식 제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를 위해 바치는 화목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오고 가는 것이 없다면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세 번째는 ‘속죄’입니다. 빚을 진 상태로는 친교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탕감해주더라도 그분을 바보로 만들지 않으려면 자신도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속죄제나 보상제가 이것입니다.
만약 이런 봉헌으로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신약의 봉헌은 반드시 ‘용서’가 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타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하시며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문신을 한 신부님’(2019)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다니엘이라는 청년입니다. 그는 소년원 겸 교정시설에서 생활하던 중, 우연히 본당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돕게 되면서 ‘사제의 길’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살인 및 폭력 전과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라는 답을 들었고, 결국 다른 직업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출소 후 노동 현장으로 파견되던 중, 다니엘은 시골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고, 우연히 그곳 본당 신부님을 만나야 할 상황이 생깁니다.
다니엘은 내면에 깊은 갈망과 불안, 그리고 죄책감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누군가가 “본당 신부님 맞나요?” 하고 묻자, 그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예, 제가 신부입니다.”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그리고 빈 사제관에 머무르게 되면서, 그 마을의 임시 ‘신부’ 역할을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의외로 진솔한 그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입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는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끔찍한 교통사고가 발생해 여러 주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운전자’ 역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사고 당시 운전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운전자를 철저히 미워했습니다. 마을 곳곳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표시가 있지만, 정작 그 ‘가해자’였던 운전자는 묘지에조차 들어오지 못한 채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다니엘은 처음에는 이 사건에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용서받지 못함의 고통”을 잘 아는 그였기에, 점점 그 가족과 죽은 운전자를 묻지 못한 채 애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신경 쓰였습니다. 다니엘은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이 운전자를 위한 장례를 제대로 치러 주자.” 모든 마을 사람이 반대하고, 심지어 다른 사제나 경찰관도 “장난질이 너무 심하다.”라며 그를 몰아세우지만,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장례식 당일, 분노로 가득 찬 마을 주민들은 장례식장에 몰려와 고성을 지릅니다. 이즈음에 그의 신분도 조금씩 들통이 나기 시작합니다. “가짜 신부가 무슨 장례를 치른단 말이야!” “이딴 식으로 저 인간까지 구원받게 해 줄 순 없어!” 다니엘은 위축되면서도, 용기를 내어 운전자의 관이 놓인 곳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들어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 저 역시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게 된 건,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회를 주셨고, 저도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이 사람에 대한 증오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죽은 이에 대한 복수나 증오는 우리 모두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다니엘은 장례식을 시작하며 조용히 기도문을 읊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묵주기도(또는 해당 지역 미사 의전)를 이어 갑니다. 이 순간, 관 앞에서 울부짖는 운전자의 가족을 보고 몇몇 주민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사제가 아닌 저 사람(다니엘)이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까지 마음 돌리게 하나…” 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미 그의 진심을 느꼈던 사람들은 묵묵히 참여하기 시작하지요. 장례식을 마치고 다니엘은 신자들 앞에서 사제복을 벗고 문신이 새겨진 몸을 드러낸 채 그들을 조용히 떠나갑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그가 먼저 사제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하지 않은 우리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곧 에덴동산에서의 가죽옷을 선물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제복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위한 봉헌을 의미합니다. 그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 합당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용서하고 덮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봉헌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봉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기 자신을 대신 감옥에 갇히도록 내어놓겠다고 말한 장면(창세기 44,33 참조)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모습을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했지만, 되레 그들을 살리기 위해 양식을 베풀었고(창세기 50,19-21 참조),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벌주시는 대신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창세기 3,21 참조). 누군가의 죄를 덮어 주기 위해 다른 생명이 희생된 것은 최초의 봉헌을 상징합니다. 신약에서는 의로운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깨닫고도, 세상의 조롱 속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려고 몰래 파혼하려 했습니다(마태오 1,19 참조).
구약의 유다와 요셉이 살아 낸 봉헌과 희생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완성해 주신 속죄와 사랑으로 이어지며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의 봉헌은 더 이상 의무적 제사가 아니라 서로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봉헌’이 됩니다. 이 봉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롭고 영원한 봉헌입니다. 나는 이웃의 죄를 덮어주는 봉헌을 하며 미사에 참례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참다운 신약의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2,22-4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것이나 큰 기쁨,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율법에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의인 시메온은 아직 아기를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한나가 등장한다. 한나 역시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한나는 일찍이 사별하였지만,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았다.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2000년 초반,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광고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은 성공에 집착했습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세속적인 성공은 아니더라도 나의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았고, 특별히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엄격하게 시간 관리를 했습니다.
엄격한 시간 관리 안에서 커다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생활이 경직되는 것입니다. 틀에 갇혀 인생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마음의 여유와 즐거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큰 틀을 짜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방학 중 하루 일과표를 만들어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하루를 산 적이 있습니까? 분명히 또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실제로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큰 틀을 짜고 저만의 루틴을 만들어 가며 삽니다. 굳이 몇 시간 책을 읽고, 1시간 운동하고, 기도 시간 2시간…. 이런 식으로 배분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세상은 틀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 주님의 뜻을 잃어버리면 목표 없이 살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간직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봉헌을 바라보면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은 아기, 파혼해야 마땅할 것 같지만 꿈에서 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일, 예수님의 탄생 후 동방박사의 방문,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한 일 등…. 믿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큰 틀에서 일치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 예언자와 한나 예언자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들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큰 틀에서 벗어나, 세상의 틀에서만 바라봤다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볼 수도 그래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틀에만 매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의 사랑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철저히 하느님의 뜻이라는 틀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결실은 없다(발타자르 그라시안).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삶을 봉헌한다는 것은 나의 뜻과 의지와 생각 등을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때문에
내려놓고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제가 의지할 것은
세상의 권력, 명예, 인정, 돈과 재물 등이 아닙니다.
이런 것에 의존하고 매어 있고 집착하는 삶은
분명 행복한 삶이 아니라 불행한 삶입니다.
이미 그러한 세속적인 것들은
내 삶과 함께 주님께 봉헌되어야 합니다.
봉헌되지 않은 채 내 삶의 일부분이 되면
사제는 복음 선포의 열정은 사라지고
마음은 곧 산란해져 기쁨이 우울함으로 바뀝니다.
사제에게 가장 큰 무기는 기도입니다.
내가 말하는 그분께 기도하고
내가 선포하는 그 말씀을 묵상하고
내가 직접 축성한 빵이 되어 먹힐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봉헌된 사제의 삶의 본질입니다.
온전한 봉헌으로 어디든
기꺼이 떠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오늘 한마음에 사는 작은 사제의 삶이
그러하기를 갈망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