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이 문답록은 지봉 이수광이 1597년 명(明)나라 황실의 황극전(皇極殿), 중극전(中極殿), 건극전(建極殿) 등의 소실(燒失)을 위문하는 진위사(陳慰使)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館)에서 50여 일 동안 머물면서 함께 유숙하였던 안남국(安南國.베트남)의 사신 풍극관(馮克寬)과 서로 창화(唱和)한 시와 필담으로 문답(問答)한 내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조완벽(趙完璧)이 일본 상선을 따라 안남에 세 차례 드나들었다가 조선으로 돌아옴에 따라 안남 사람들이 지봉의 시문을 칭송하고 그곳의 유생들이 전사(傳寫)하여 애송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위의 자료를 통하여 사행이 끝난 이후에 당시 풍극관과 창화한 지봉의 시문이 안남에서 유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안남국’은 오늘날의 월남 즉 베트남을 가리키는데, 안남이란 명칭은 당대(唐代)에 월남 땅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내가 경인년(1590)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差出)되어 경사(京師.연경)에 가서 황제의 성절(聖節)을 경하할 적에 안남국(安南國) 사신을 만났는데, 각기 다른 객관에서 머무른데다 서로 통교(通交)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탓에, 단지 조회(朝會) 때에만 한두 번 얼굴을 봤을 뿐이었다.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옴에 미쳐, 문견(聞見)한 사건(事件)에 대해 대략 기록하여 보고하였는데, 상(선조임금)께서 나를 승정원(承政院)으로 불러 안남국 사신의 의복(衣服) 제도와 그 나라의 풍속이 어떠한지 하문하시고, 혹시라도 창화(唱和)하여 지은 글이 있다면 아울러 써서 아뢰라고 하셨다. 이에 안남국 사신과 서로 문답하거나 창화하지 못하여 성상의 하문에 우러러 대답할 말이 없음을 더욱 한스럽게 여겼다.
정유년(1597) 겨울에 이르러, 진위사(進慰使)로 재차 연경에 갔을 때 또 안남국 사신과 서로 만났는데, 마침 동지(冬至)를 하례(賀禮)하기 위해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매우 많아 객관마다 가득 찬 덕분에, 다행히도 안남국 사신과 한 객관에서 함께 묵으며 50여 일을 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남국 사신과 몹시 친숙하게 대할 수 있었으며, 아주 자세하게 문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를 수창(酬唱)한 것은 당시 나라가 왜란(倭亂)을 겪고 있어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으니, 감히 붓을 잡고 시구를 지어 과시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단지 안남국 사신의 문체(文體)가 어떠한지 보려고 해서일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중국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중국은 안남국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 거리를 계산해 보면, 두 나라의 사이가 1만 리 남짓이 될 뿐만이 아니다. 더욱이 안남국에서 조공(朝貢)을 바치러 오는 것도 일정하지 않아서 몇 년에 한 번씩 중국에 오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신이 안남국 사신을 거의 만날 수 없다. 더구나 안남국 사신과 같은 객관에서 머물면서 시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안남국 사신을 두 차례나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거기에 운수가 작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창화집도 전고에 없었던 것이다. 글이 비록 몹시 비루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일만은 혹여 전할 만하기에, 우선 이 창화집을 보존하여 박아(博雅)한 군자가 행여 여기에서 취함이 있기를 기대한다. 이수광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