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 디아코노스(심부름꾼) 했습니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찬양)
지난 주말 저녁 무렵 도착한 한통의 카톡입니다.
“목사님! 혹시 크론병으로 고생하시는 원 목사님 소식은 어떠한지 알 수 있을까요?”
“요즘 가정교회로 사역중이고 두 가정과 함께 열심히 사역중인 것으로 압니다.”
“몸은 좀 어떠신지 알고 계신가요” “육개월에 한번씩 입원 치료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근데 자세히 묻기는~~”
“이번 명절에 아이들 옷이라도 따뜻하게 사서 입히시라고 제가 조금 보내드리고 싶어서요. 전달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잠시후 제 개인 계좌로 백만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다음날 이분으로부터 다시금 연락이 왔습니다.
다음은 그분의 메시지입니다.
“자녀가 셋인 약한 교회 가정의 자녀들에게 명절에 따뜻한 옷과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요. 전달해 주세요. 또한 화재로 고통받는 명천교회에도 조금 보냅니다.
작은 금액이지만 그곳 목사님께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메시지와 함께 각 백만원씩 입금이 되었습니다.
나라 상황이 여의치 않는 시절이고, 경기 침체의 장기화 여파가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시국임에도 일면식 없는 시골교회 목사를 믿어주시고, 귀한 옥합을 깨뜨리며 약한 이들의 손을 잡아 주시는 귀한 가정의 섬김을 대하며 먹먹함과 따스함이 교차합니다.
약 칠년 전부터 뜻하지 않게 시작한 오지랖 사역이라는 깃발을 흔들면서 참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사역을 행해오면서 가장 의미를 느낀 점이 있다면 구약성경 열왕기상 19:18절에 나오는, 칠천 명을 남겼다는 말씀을 체득했다는 점입니다.
구약성경의 일관된 흐름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남은 자를 통하여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은 그러한 남은 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디아코노스의 역할이라 하겠습니다.
헬라어 디아코노스 (διάκονος)의 여러 의미 중 <고용된 것에 "기뻐하는" 자>라는 뜻도 있다 합니다. 보통은 섬기는 자, 심부름하는 사람을 칭하는데 사용됩니다.
이러한 디아코노스의 구체적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과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시골교회 목회자임에도, 오지랖 넓게 어려운 이웃들을 향하여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길 파렴치할 정도로 요청하는 목사의 호소를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요청으로 받아 들여 주시는 신자 분들을 만나는 기쁨은 형언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시골 마을에 자리한 교회 목사이지만, 읍내 거리를 다닐 때 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요즘 자영업자분들이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의 고통이 가늠되기 때문입니다.
양구에 처음 왔을 때, 당시 자영업을 하시던 교우 분의 모친께서 교회로 전화를 하셔서 아들이 처한 형편과 상황을 알려주시며 기도해 주기를 요청받은 경험은, 그 이후 자영업 하시는 분들을 주목하게 된 계기라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면 해보고 싶은 사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이름으로 자영업자분들을 위로하고 조건 없는 힘을 주고 싶다는 막연한 꿈일 수도, 또 기도 제목이기도 합니다.
향후 십년 뒤를 생각하면 때로는 끔찍한 상상이 들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쉽게 세상을 살아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태산처럼 높은 “고개턱이 제 아무리 높아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가오랴”라는 찬양을 부르며 믿음의 선진들은 가야 할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상황이 어렵고 문제가 크냐 보다, 어쩌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느냐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한 가정의 귀한 헌신과 섬김을 통해 지치고 낙심한 세 가정(교회)을 섬길 수 있는 디아코노스를 실현하게 해 주심에 개인적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은혜의 통로 이 목사님과 국토정중앙교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지...^^
이런 귀한 분들 때문에 하나님이 이 나라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시는 것 같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