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방언, 성령인가? 악령인가?
Ben Byrd(벤 비이드) 박사
옛적부터 세상은 샤머니즘(Shamanism)과 정령(精靈)신앙의 영향으로 신비주의 사상이 사람들의 생각에 쉽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 온 그 바탕 위에 복음이 전해지자 오늘날에는 성경에서 벗어난 신비적 신앙 형태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소위 현대 방언(方言)이란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방언이 성령 받은 증거라고 하면서 가르치기도 하고 또 방언을 연습하거나 훈련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신비주의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방언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여러 나라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나라말을 모르는 사도들을 통해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던 하나의 외국언어(사용하고 있는 외국말)였습니다. 처음으로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던 때는 예수님 부활 이후 첫 오순절 절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의 소식을 모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16개국에서 흩어져 살다가 오순절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 왔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향하여 외국 언어를 배운 적이 없는 120명의 제자들의 입을 통해 특별히 역사하셔서 그들이 살던 그 나라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것입니다. * 16개국 = 바대(Parthians), 메대(Medes), 엘람(Elamites), 메소보다미아(Mesopotamia), 유대(Judea), 가바도기아(Cappadocia), 본도(Pontus), 아시아(Asia), 브루기아(Phrygia), 밤빌리아(Pamphylia), 애굽(Egypt), 구레네(Cyrene), 리비야(Libya), 로마(Rome), 그레데(Cretans), 아라비아(Arabs)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각 나라의 말)으로 하나님의 큰 일(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부활하셨다)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기도할 때 가장 잘 할 수 있는 자국어로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래 말이란 사람이 사람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만든 하나의 약속의 수단이자 표현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의 의사를 정확한 말로써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방언(외국 언어)의 은사는 교회가 세워지면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교회들에게 허락하신 은사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고 안정되어 가면서 이러한 방언(方言)은사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헬라 지역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서는 신비주의 주문같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Unknown Tongue-KJV)를 성령의 역사로 인한 방언으로 오인하고 뜻 없이 되풀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훈계했습니다. 사도시대의 방언 은사는 성경이 기록되면서(온전한 것-성경 고전 13:10) 점점 폐해졌습니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방언(Unknown Tongue)기도는 뜻 없는 신비주의 주문에 가깝습니다. 그런 방언들은 불교도, 힌두교도, 회교도, 심지어 티벳의 신비승들까지도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Unknown Tongue)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과 성령님의 빛을 받아 참된 방언(方言)의 의미를 바로 알고 미혹의 영(요일서 4:6)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소위 성령운동을 한다는 은사주의자들이 로마 카톨릭 사제(신부)들과 합동 집회를 자주 갖는 것은 현대의 방언하는 이들의 영이 성령이 아니라 바벨론의 영이라는 것을 증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오랄 로버츠를 비롯해 짐 베이커, 펫 로버트슨, 지미 스와가트 등이 로마 카톨릭과 자주 성령운동집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방언을 한다고 떠들어대지만 수많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종교재판으로 죽인 로마 카톨릭과 함께 성령께서 역사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한국에도 은사주의로 유명한 조용기 목사도 그들과 자주 집회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1. 오늘날의 방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언의 은사"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면서도 가장 오해하고 있는 은사 중의 하나입니다. 오순절교단 (예, 순복음교회)중심의 성령은사 운동을 하는 은사주의자들은 오늘날도 방언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언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오직 성경에 권위를 두는 것이 옳습니다. 방언(方言)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결코 배운 적이 없는 언어이지만 그 나라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은사로 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외국 언어가 아닌 신비한 언어로 간주하고 성령이 충만한 신자에게 주는 은사로 생각하거나 심지어 구원받은 성도의 외적인 표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방언(an unknown tongue)의 은사를 못 받은(?) 사람들에게 심한 영적인 열등감을 갖게 하여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구하려고 엄청난 헛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게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결코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각기 다른 형태로 주님께서 필요에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한편 이와 달리 오순절 교단이 아닌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이나 복음주의자(Evangelical)들은 마가복음 16장을 인용하여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 곧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외국어 방언이라고 말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New tongues)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여기에 나오는 새 방언은 외국어 방언을 통한 복음 전파가 그 목적이며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첫 오순절날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방언 은사는 약 1세기 경까지 지속되다가 점점 사라졌으며 현대에는 필요가 없는 은사가 되었습니다.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현대 오순절 계통의 방언을 사단적이고 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오순절 교단 계통의 성령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성경의 중심적 은사로 보고 구원을 위한 중요한 체험단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하는 사람을 못하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방언은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외국어 방언이 아니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도무지 인격적이고 이성적인 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소리"입니다. 그것도 무의식중에 내뱉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그들은 방언으로 하는 기도를 강조하기 위해 유다서를 인용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praying in the Holy Spirit-KJV)"(유다서 1:20)에서 "성령으로 기도하며"가 바로 "방언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praying in the Holy Spirit-KJV)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praying in the unknown tongue)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은사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의 흐름을 나누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의 또 다른 방언기도의 근거로는 로마서 8장과 고린도 전서 14장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의 기도"를 곧 "방언기도"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성령의 기도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고린도 전서 14장의 말씀을 그들의 편리에 맞게 사사로이 풀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2절의 말씀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자가 그 영으로 비밀(mysteries), 즉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의 전체적인 상황을 볼 때 사도 바울은 지금 두 가지 방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에 의해 나의 영이 드리는 기도와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기도가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은사주의에서는 유창한 방언기도를 더욱 사모합니다. 그러나 유창하지 못한 기도와 유창한 기도의 차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기도의 외적인 화려함과 속도보다는 기도하는 자의 진실된 영의 자세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이상과 같은 방언기도에 대한 이해 또는 오해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평범한 성도들은 판단하기 어려워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의 혼란이 그대로 현대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2. 고린도 교회에는 알 수 없는 신비주의 방언(an unknown tongue)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고린도전서가 그 동기와 목적상 신앙의 모범이 되는 교회를 보여주는 지침서의 기능보다는 잘못된 교회의 표본을 보여주어 바른 교회로 교정시키기 위해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임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우선 그들의 무지로 인해 많은 분파가 일어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바울이 그들 교회의 미숙함과 육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어지는 뒤의 장들에서도 고린도교회의 많은 오해와 잘못된 신앙생활의 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중요한 무역, 상업 중심지였던 이 고린도 도시는 이교주의와 신비주의에 의한 전통적 습관이 깊숙이 배어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곳에 살고 있었던 고린도의 성도들은 그들의 생활 습관 속에 헬라지역의 특수한 신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러한 습성들이 교회까지 혼합되어 들어왔던 것입니다. 고고학, 역사 자료 등에 의하면 고린도교회가 있었던 이 도시는 초대교회 당시 이교도 신앙, 사단적 신비주의가 범람했고, 그런 이교 신비주의에서는 현대의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과 같은, 뜻모를 소리들의 주문과 기도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고린도에서 수마일 떨어진 델피(Delphi)는 거대한 신전이 있는 그리스의 최대우상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우상숭배는 다름 아닌 바벨론 사단숭배의 신비주의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그 신전에는 신탁(信託, Oracle-계시를 받는 사람, 또는 그 장소)이 있어 그들 신(사탄)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데 그 신탁은 여사제로 구성됩니다. 물론 그 신전(Shrine)에서 그들은 사악한 우상숭배를 행하여 왔습니다. 델피의 신전에서 여사제와 상담하려는 사람은 먼저 양이나 염소나 수퇘지 그 밖의 다른 동물로 희생제사를 행합니다. 그 때 예언과 징조가 좋으면 그들은 신전 안쪽 밀실(Adytum) 또는 아폴로 신전으로 들어갑니다. (이 과정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부터 성막에 들어가서 희생제사를 드리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흡사합니다. 사단은 항상 하나님을 모방하여 왔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반복적인 주문을 소리내며(이를 통역하는 자들도 있었음) 모종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들은 대개 애매모호한 표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델피 신전에서의 신탁은 당시 그리스에 보편적인 것이며 사도 바울 시대에도 팽배했던 우상숭배 행위였습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인 주후 394년경에 와서 델피의 신전은 파괴되고 몰락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의 혼란상에 대한 경고는 바로 이 델피 신전에서와 같은 뜻모를 주문을 받는 버릇이 교회에 침투한 것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델피의 신탁에서 얻어진 주문은 때마침 고린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자 "예수를 저주 한다."는 내용들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방언 기도하는 자들의 소리에 "예수를 저주한다"는 사악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입니다.
3. 성경은 방언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1) 마가복음 16장 17-20절의 방언(tongues)
이 부분은 은사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으로 방언과 병자에 대한 안수기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6장 17절의 "새 방언(New tongues-KJV)"이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지상 명령을 주시면서 들어보지도 못한 각 민족의 방언들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실 것임을 뜻합니다. 이 구절에 쓰인 "방언"에 해당하는 헬라어 성경의 원어는 "글로사이(Glossai)"입니다. 그 뜻은 전 세계에서 쓰는 민족의 언어를 뜻하는 것으로서 "글로사이(Glossai)"는 1개 이상의 언어를 가리키는 복수명사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은사주의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기도(Unknown tongue)와는 그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2) 사도행전 2장, 사도행전 10장의 방언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행전 10장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안에 임한 성령의 역사와 함께 마가복음 16장의 명령과 예언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장은 첫째로 이스라엘에서 교회의 탄생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에 쓰인(행 2:8-11, 10:46) 방언은 헬라어로 디알렉토스(Dialektos)입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쓰이고 있는 각 민족의 언어를 가리키며 흠정역(KJV)에서는 "텅스(Tongues)"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적대관계였으나 위 두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3) 사도행전 19장의 방언
이 부분 역시 사도행전 2, 10장에 이어서 세 번째 성령의 역사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19:2-3)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니 성령의 세례를 받아 방언과 예언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구약의 속죄의식만 알던 에베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메시아로서의 의미를 모르고 단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상태였기에 바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를 뜻하는 것에 불과하나 성령의 세례는 회개는 물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심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국한되나 성령의 세례는 신약 교회시대에 전체적으로 유효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tongues)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이 성령 세례의 사건이 일어난 에베소 지역은 그 당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드는 국제 무역 도시였기 때문에 다양한 종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러한 외국어 방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4)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은사주의자들이 잘 인용하는 방언기도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이지 우리의 입술로써 뜻모를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라는 용어는 성경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고 하여 성령께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주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훈련으로 이뤄지는 은사주의자들의 방언기도는 로마서 8장 26, 27절의 성령에 의한 기도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 자신에 의한 기도는 성령 스스로 하는 기도이지 결코 인간의 소리로 표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5) 에베소서 6장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이 구절에서 은사주의자들은 "성령 안에서 기도(Praying in the spirit)"를 방언기도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우리의 기도가 세속적이고 육신적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뜻에 따르는 기도가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달리 말하면 "성령의 권능과 능력 안에서의 기도"(In the power and energy of The Spirit)를 뜻하는 것입니다.
(6) 유다서 1장 14-20절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은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4. 방언(方言-tongues)은 각 나라의 언어였습니다.
지금까지 위에서 살핀 (4), (5), (6)의 로마서, 에베소서, 유다서에서 말한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성령의 권능 안에서의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unknown tongue)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로마서, 에베소서, 유다서는 모두 고린도 전서가 쓰여진 후에 나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고린도 전서 12-14장에 나오는 방언의 내용들이 방언 기도를 권장하는 것이라면 로마서, 에베소서, 유다서에도 방언기도를 권하는 것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결코 고린도 전서 12-14장의 문제를 재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은사(恩賜)를 총체적으로 언급할 때 예언, 섬김, 가르침, 권위함, 구제함, 다스림, 긍휼을 베푸는 은사가 언급되었어도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고린도 전서 12-14장을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먼저 고린도 전서 11장에서는 그들이 갈등을 벌이던 공중예배, 교회 안에서 여자의 수건 쓰는 문제, 그리고 성만찬 문제를 교정시키고 12장으로 넘어 갑니다. 12장에서는 여러 은사와 지체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성령은 하나로되 은사는 다양하며 직임도 여러 가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은사를 말하는 중에 "각종 방언(different kinds of tongues-다른 여러 가지 종류의 언어-KJV)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10)라고 하였는데 "각종 방언"은 헬라어 원어로 글로사이(Glossai)로서 이방인들의 여러 언어를 가리킵니다. 12장 28절에도 "각종 방언(varieties of tongues-KJV)"이라 하여 역시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the tongues of men-KJV)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고전 13:1)에서의 "방언" 역시 사람들이 사용하는 외국어를 말합니다. 13장 8, 9, 10절에도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에서 "방언"은 역시 글로사이(Glossai)로 외국어 방언을 뜻합니다. 14장 2절에서는 은사주의자들이 "방언기도"의 증거 구절이라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에 쓰인 방언은 그 원어가 글로사(Glossa)로서 앞에서 나온 방언들인 글로사이(Glossai)의 단수형입니다. 흠정역(KJV)에는 이 방언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각국 언어가 아닌 "알 수 없는 언어-an unknown tongue)"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복수형인 글로사이(Glossai)는 이방인들의 언어들을 가리키나 이 단수형인 글로사(Glossa)는 뜻 모르는 중얼거림,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가리킬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 이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 흘러 들어온 이교도 신비주의와 델피 신전 사제들의 주문과 같은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글로사이(Glossai, 고전 12:10, 13:1, 8)는 "외국어 방언"이고 글로사(Glossa, 고전 14:2)는 "뜻모를 소리"라는 것을 바울이 엄격히 구별한 것은 그가 외국어 방언들과 이교주의의 "알 수 없는 소리"를 구별한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14장 2절의 방언을 "이교 신비주의 방언"으로 구체적으로 번역하여 대입시켜 해석해 보면 문맥이 보다 분명해집니다. "이교도(델피신전)의 신비주의 방언(주문, 알 수 없는 언어)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성경이 말하는 외국어 방언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 하나니(자기들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 하면서 알 수 없는 신비주의 방언을 말하나) 이는 그들의 헛소리를 알아듣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한다고 하며 은폐하는 것이다" 14장 3절 역시 14장 2절과 비교하면서 그런 사이비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우지만(자신이 무슨 신령한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내세우지만) 예언의 은사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므로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니 될 수 있으면 예언하기를 적극 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낱말이 바로 "예언하다(prophesy-KJV)"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예언의 의미를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알아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물론 그런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언하다"의 뜻은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의미로 기록되었다면 예언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점쟁이들이 더 잘할 것입니다. 이 예언하는 은사는 바로 기록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풀어서 해석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당시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잘 해석해서 그것을 가르치는 능력을 예언하는 능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4장 3절에서 "예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때문에 교회의 덕을 세우고 사람들을 권면하고 안위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방언(알 수 없는 소리: an unknown tongue-KJV)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이 말씀은 "사이비 방언하는 자들은 신령한 척, 뜻모를 소리를 중얼거림으로 자기의 교만을 드러내지만(과시하지만) 예언하는(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이는 자기 과시가 아니라 교회를 돕고 교회의 덕을 세운다"라는 뜻입니다. 14장 5절의 "나는 너희가 다 방언들을(tongues-KJV)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에서의 "방언"은 다시 Glossai, 복수형으로 외국어 방언을 뜻합니다. 따라서 외국어 방언의 은사는 누구나 다 받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희망인 것입니다.
5. 방언은 믿지 않는 자와 외국인들을 전도하는 수단과 표적이었습니다.
한글 번역 성경에는 14장 2, 4절의 "방언(an unknown tongue-KJV)"과 14장 5절의 "방언들(tongues)"은 그 의미가 틀린데도 "방언"으로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큰 오해를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14장 5절은 "복음 전파하는데 쓰도록 누구나 외국어 방언들(Glossai: tongues-KJV)을 하기를 원하노라"는 뜻입니다. 14장 6-9절까지는 뜻모를 소리로 지껄이는 당시 고린도 교회의 혼란상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비록 그것이 외국어 방언이라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모국어로 말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할 것"(14:9),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4:19)고 강조합니다. 14장 13-17절의 말씀은 얼핏 보기에 매우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방언을 권장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전체적인 문맥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an unknown tongue-KJV)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알 수 있는 말로 해야 하리니) 내가 만일 방언(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an unknown tongue-KJV)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내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무슨 뜻인지 모르기에 아무 영적 유익함, 결실(열매)이 없느니라)" 14장 15절은 "그러므로 이와 같이 결실되는 것이 없으면 어찌 되겠느냐?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뜻모를 방언 기도하는 자들은 이성(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영과 기도하는 마음이나 생각이 일치되어야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18, 19절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들(tongues-KJV, 외국어 방언을 뜻함)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일만 마디의 방언(an unknown tongue: 단수형, 알아들을 수 없는 말)보다 분명히 뜻을 알 수 있는 다섯 마디가 더 낫다"라는 뜻입니다. 14장 21절은 이사야 28장 11, 12절을 인용하면서 불신의 유태인들에게 외국어 방언의 은사를 통해 그 표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만 완악한 유태인들이 순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14장 22-23절은 "그러므로 방언(외국어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고 예언(말씀을 해석해서 전달하는 능력)은 믿는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온 교회가 전부 방언으로만 말한다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너희를 미쳤다고 말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말씀을 풀어서 전달하는 능력)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 25) 14장 26절은 모임 안에서 찬송, 가르침, 방언, 방언통역의 은사를 각자 받은 대로 하되 교회의 덕을 세울 것을 강조합니다. 14장 27-32절에서는 방언은 반드시 통역을 세울 것과 순서대로 할 것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은 잠잠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14장 33, 34절은 지금까지 열거했던 방언을 비롯해서 여러 은사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특히 34절은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잠잠함과 순종만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여자들은 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여자들에 의해 주도된 신비적, 사단적 방언요소를 제거하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델피 신전의 여사제들은 그들의 제사의식에 의해 신전에 오는 남자들과 동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사제들은 결국에는 창부에 불과한 여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여자들의 주문같은 언어를 교회 안의 여자들이 신령한 척 모방하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요 기만인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37절에서는 "예언(말씀을 풀어서 전달하는 능력)하기를 사모하며 방언들(글로사이(Glossai): tongues-KJV, 즉 외국어 방언을 가리킴)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방언(글로사(Glossa): an unknown tongue-KJV, 알 수 없는 소리, 사이비 방언)과 방언들(글로사이(Glossai): 외국어 방언)이 구분되어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방언, 알 수 없는 언어(an unknown tongue)는 금하여도 복음 전파를 위한 외국어 방언들은 인정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 방언은 세 가지 기원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성령에 의한 방언(tongues, 외국어)
이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위해 전도자로 하여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여러 나라의 언어를 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이는 신앙적, 영적 성숙이나 능력의 외적인 징표로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라 오직 복음 전파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는 본인의 의지, 노력, 욕망에 의해 자유자재로 되풀이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은사는 초대 교회 이래 흔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현대에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는 나타날 수도 있는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워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2) 사단에 의한 방언(an unknown tongue)
인류학자, 역사학자, 언어학자에 따르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이교도들, 신비주의 밀교주의자들이 약물에 의해 흥분된 상태에서 또는 우상신, 조상신에 대한 숭배의식에서 이상한 소리를 중얼대는 방언 현상이 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회교도, 힌두교 등에서는 제사의식의 한 부분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교도의 영향이 강했던 고린도 지역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고린도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왔던 것입니다.
(3) 심령술에 의한 방언
인간은 처음에는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이루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은 죄로 오염되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인간의 타락한 정신을 계발하여 영적인 힘을 얻는 방법을 인간에게 전달했습니다. 이것이 심령과학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최면술, 강신술, 영매술, 초능력, 기(氣)를 사용하는 능력, 정신력 개발 등입니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째 먹지 말며 복술(卜術)을 하지 말며 술수(術數)를 행치 말며"(레 19:26)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초능력과 심령술로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이고 그것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자신들도 속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최면, 무의식 상태에서 알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영적인 기운을 발산하여 심령치료, 계시, 독심술 등을 행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마법사와 무당들 중에도 그러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도 환자에게 안수하며 영적 에너지를 이용하여 환자를 치료합니다. 안수하여 병을 고치는 심령술사나 무당들은 이러한 능력을 행하고 나면 영적 에너지가 빠져나가는데 은사주의자들도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심령술에 의해 능력을 받은 자는 다시 그 능력을 재충전하기 위해 더 깊은 영적 상태로 빠져 들어갑니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더 강력한 마약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의 방언의 상당수는 바로 이러한 심령술의 혼미한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중얼거림이 많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상적 기도와 뜻모를 소리로 중얼거리는 방언기도(an unknown tongue)의 차이를 요약하여 봅시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인격적인 생각과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집중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방언기도는 자신의 생각과 뜻이 없으며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외쳐댑니다. 이와는 약간 대조적인 방법이지만 마음의 평정을 넘어 자신의 의지를 망각하는 단계까지 도달하는 TM(초월명상, Transcendental Meditation)에서 행하는 기도와 유사합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정신력의 통제를 상실하는데서 오는 무의식적인 언어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러한 은사주의자들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an unknown tongue)은 에큐메니칼 모임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동질화시키는 방법으로 많이 이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방언집회로 하나가 되는 것은 사단의 기만술입니다. 오늘날의 로마 카톨릭도 오순절 은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쇄신 운동"이란 이름으로 방언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소위 방언(an unknown tongue)을 받고 나면 예수님의 단번속죄를 부정하는 "미사"에 더 충성하게 됨을 봅니다. 그들이 말하는 방언은 성령의 역사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 운동하는 신부들과 오순절 성령운동 하는 자들 중에 오랄 로버트, 짐 베이커, 케더린 쿨만, 펫 로버트슨 등이 연합으로 집회를 열었고 한국에서도 이름난 성령운동가인 조용기 목사도 그 신부들과 같이 은사집회를 하였으니 어떻게 이것이 성령에 의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날카로운 말씀으로 현대 방언이 성령으로부터 왔는지, 사단으로부터 왔는지를 시험해야 할 것입니다.
7. 현대 방언에 대한 결론
(1) 방언(Tongues)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의 뜻은 분명하며 인격적인 것입니다.
(2) 사이비 방언(an unknown tongue)에 자신을 맡길수록 사단에게 더 강력하게 사로잡히기 쉽고 깊은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됩니다.
(3) 방언(an unknown tongue)을 최고의 은사로 강조하는 은사주의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같이 매우 위험한 신앙상태로 접어들게 됩니다.
(4) 방언은 중독적, 습관적 요소가 강합니다. 그것은 마치 심령의 마약과 같이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습니다.
(5) 방언(an unknown tongue)으로 기도하는 것이 영적인 성숙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권하는 곳은 없습니다.
(6)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오늘날의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주시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은사를 더욱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7) 방언의 은사, 또는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이제는 오직 기록된 말씀 속에서 죄사함의 확신을 얻고 예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옥성호 지음/부흥과 개혁사)
지난 해, 저희 교회창립기념집회에서(이재환 선교사님 인도) 혀의 떨림을 경험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입니다. 저는 이게 성경에 나온 방언인지, 성령 체험인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신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도 방언을 하는 분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넘쳐나는 방언현상에 비하면 방언에 대하여 성경적인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방언이나 은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서 기독교 신비주의, 영성훈련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보았습니다. 여러 책에서 방언기도의 유익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방언이야말로 은사 중에 기본적인 것으로서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으로 기도할 수 있고, 능력 있는 기도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영성관련 서적을 왕성하게 쓰고 있는 정원 목사, 신유집회로 유명한 손기철 장로 ,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김우현 감독이 말하는 방언도 거의 같은 의미였습니다.
방언과 성령체험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더 깊이 하나님의 은사를 사모하게 되었고, 더 힘있게 방언 기도(?)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방언에 능통하신 분들에 비하면 초보적인 수준인데다가 아직 하나님과 직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이 그냥 떨림 그 자체이지만, 앞으로 더 아름답고 강력하며 통역이 가능한 방언을 주실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연습(?)해보자는 생각이었지요.
방언을 하면서도 남들이 들을까봐 쑥쓰럽기도 하고, 마치 모르스부호를 입력하듯 '다다다다...' 제 입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현상이 신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나의 이런 기도를 기뻐하실까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스스로 이해할 수 없으니 혹시 이게 이방인들이 하는 '중언부언'은 아닐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옥성호씨가 쓴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방언에 관한 궁금증 때문에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내려갔습니다. 저자는 이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등의 책으로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예리하게 비판한 바 있었습니다. 그가 이 책을 쓴 계기는 김우현 감독이 방언과 성령체험에 관해 쓴 '하늘의 언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고 이 책이 한국교회의 '방언열풍'에 그릇된 영향을 주고 있다는 판단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14,장을 색다른 시각으로 조명하며,요즘 우리가 하는 방언은 성경의 그것이 아니라고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며, 모두 통역이 가능한 외국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아 방언을 오용하고 있는 점을 깊이 염려하여, 바로잡기 위해 고린도전서 12-14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은사의 하나로서, 은사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며 교회에서 방언을 할때는 항상 통역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미없이 일만 마디 말로 방언하기보다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로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하는 말에서 바울의 기록의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방언은 대부분 개인의 경건생활의 도구가 되고 있고, 거의 통역되지 않을 뿐만아니라, 통역되더라도 결과가 일치되지 않는 점을 볼 때 초대교회의 방언과 다른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뜻모를 방언은 이방 종교(당시 고린도지방의 우상숭배자들)에서도 흔히 볼수 있는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특정한 상황, 특정한 심리 상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육체적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현상을 가지고 성령체험이니 성령세례니 떠드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바울의 언급을 근거로, 방언, 예언, 지식은 더 온전한 것으로 인해 그치게 되며, 따라서 사도시대 이후에는 방언이 지속되지 않고 지속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이 책을 읽고 방언을 지속해야할지 중단해야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하는 방언이 이방종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방언기도가 오히려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것이라면 중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소멸하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 책은 우리에게 방언에 대하여, 은사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점검하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방언이 주는 유익이 아무리 크게 느껴지더라도, 그게 과연 성경에 비추어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 팀블로그 "대나무 숲" -
이책을 읽어라. 책은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이순간에도. 어느 인쇄공장에서 나온책들은 서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런책들이 모두 일정한 가치를 지니는것은 절대로 아니다. 어떤책을 괘변을 담기도 하고, 어떤책에선 향기가 나기도한다. 또 어떤책에선 기술을 말하지만, 어떤책에선 편법과 사기를 가르치기도 한다. 감히 이책을 권하는것은 잘못된것을 바르게 고치려하고, 잘못된것을 제대로 풀어서 천천히 차근하게 설명하기때문이다.
유명한 목사의 책을 읽지말라.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 아니 성직자 아니 목사라는 분?들의 책은 거의 하나같이 수필에 가깝다. 수필을 욕하는것은 아니지만 그가 그들이 문학인인가? 아니면 종교인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인적으로 문학을 재미삼아할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들의 성직이나 설교할수있는 권리를 남용해서 마치 설교가 강론이 자신의 유식함이나 자신의 철학이나 인생론을 펼치는것쯤으로 여기고있기 때문이다.
왜 방언인가? 요즘 문제되는 기독교 문화가 있으니 로마교에서 생긴것으로 축사와 이적유사(쓰러뜨림)같은 행위를 통해 제3세계에 비기독교적인 신앙이 전파되고있는것이다. 그런것들의 기원이 사탄주의적인 것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관심을 가진 소수밖에 모른다. 심지어 그런것들로인해 교인수가 늘어나고 자신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수있다는 착각에서 마치 그것이 성경적인것처럼 모든것들 왜곡하는 영혼마르고 머리빈 사람들이 많아진다. 방언도 그들이 주장하고 행위하는 쇼와 비슷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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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건강한 기독교 신앙생활을 위한 커뮤니티 원문보기 글쓴이: 좋은생각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상기 글에서 '자아도취 상태의 흥얼거림 즉, 무당의 말이다.' 라는 결론에서
'귀신이 들렸다'는 표현으로 봐도 될런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
너무도 안타깝고...
서글픕니다.
이토록 미혹이 무섭고
한 번 잘못된 길로 치우치면
돌이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그로싸이스)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행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디아레크토~이)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즉 방언을 말하는자와 그 방언을 듣는자들을 말할 때 다른 언어로 사용하였습니다.
만약 같은 의미라면 님들이 주장하는 바울이 말한 방언이(글롯싸이스) 외국어라면 행2:8에서 기록한 것 처럼 고린도 교회를 향해 기록한 방언을 "글로싸이스"가 아니라 "디아레크토~"이로 기록하여야 옳은 것입니다.
방언이 외국어라면 말하는 자의 언어가 듣는자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데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좁은 길을 가는자 제가 하는 방언(글롯싸이스)을 못 들으셨는지요.
아니면 제가하는 방언(글롯싸이스)를 님은 들을때 다른방언(디아레크토~이)로 들으시는지요
초대교회 방언하는 120명을 말할때 ***방언(글롯싸이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듣는 자들은 그 방언은 글롯싸이스로 듣지 않고 ***방언(디아레크토~이)***로 들었습니다.
이를 고전14장에 비교하여 님들의 주장이 100% 옳다한다면 바울은 방언을 말할때 ***글롯싸이스가 아닌 디아레크토~이***로 기록해야 하지요
세상언언(외국어)가 말하는자의 말이 듣는자에게 다르게 들릴 수 없으니까요
@성도의 본분 방언도 여러가지 있지요.
말하는 사람이 우리나라말로 하는데 듣는 사람은 자기 나라의 언어로 듣는 경우도 있다 들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머리로 이해할려니 되겠습니까. 자칫하면 성령을 소멸하는 죄가 될수도 있는데 참 아슬한 분들 많군요.
@성도의 본분 아직도 이해가 안되시나 봅니다.
당연히 언어니까,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말로
들었던 거지요.
여러 나라에서 왔으니까
16개국에서 왔다고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지않나요?
복수로 사용한 곳은 외국어지만
단수로 사용곳은 알아듣지 못하는,즉
통역할 수가 없는 말이었지요
계속 이런 논쟁은 무의미 합니다.
제 글에 동의를 못하시겠다면
그냥 방언기도 계속 하세요.
방언의 은사?
뭔가 신령한 것을 느껴보고싶고 자신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 보고싶은 욕심이 빚은 참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믿음의 증명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날마다 죽여야되며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되는 그 길을 주님과 함께 가야하는 길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하는 길인데
방언주의자들은 이 방언을 신앙의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몹시 안타깝습니다.
@主は愛なり 도대체 신실한 방언자들은 무엇인가요?
그 신실하다는 것도 님의 기준이 아닌가요?
세상에는 신실하게 사는 믿지않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현대의 뜻모를 방언이 귀신의 지즐거림이라면
이는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저도 압니다.
방언하는 사람들 중에 저보다 훌륭하게 신앙생활하시는 분이 많다라는 것을요.
하지만 성경이 오늘날 방언이 아니라면 아닌것입니다.
전 방언 않할랍니다...
@主は愛なり 방언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심이 방언으로 반드시 나타나야하나요?
27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몸의 지체입니다.
28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일할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예언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에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요, 또한 병 고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요,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는 사람들이요, 또 지도력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29 모든 사람이 다 사도이겠습니까? 모두가 예언자이겠습니까? 모두가 교사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겠습니까?
@길떠나는 나그네 또 모두가 병 고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모두가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겠습니까? (고전12:30, 쉬운성경)
오늘날 방언하시는 분들이
과연 고전 12장의 하나님께서 그의 몸된교회를 위해 세우신 일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방언자들은 자신의 신앙에 도움이 된다는 간중뿐입니다
결코 교회의 유익은 없습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방언을 하며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주님의 언어를 할것입니다
옥성호씨 즉 옥 한흠 목사님의 장남 ....
그의 부흥과 개혁사에서 나온책 오래됬죠 읽어본적이있습니다
그에책도 상당한 베스트셀러였죠
백금산 목사님이 그를 너무밀어준다는말이있었죠
그당시 막강한파워의 아버님 덕분 ? 이유야 어떻든 옥한흠목사님은 한국교회에
무시할수없는 위치이셨죠 ....
그러면 옥성호씨는 종교인일까요 하나님의 사람일까요
여기 까페 무질서하고 악하다 ? 그런느낌까지받는곳
방언은 이곳의 논쟁의 단골메뉴이죠 말할 가치가 있을까 ?
회의가드는곳 ....
그렇죠~
님은 철저한 방언 옹호자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될 것입니다.
속았다는 것을...
건투를 빕니다.
방언으로 유명한 그 큰교회 그들이가는 곳은 예수님서계신곳이
필시 아닐것입니다
그 원로목사님얼굴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그들의 욕심의 얼굴마담이죠
그래도 하나님의 언어는 인간이 함부로 난도질할 언어가아닙니다
전 그렇게봅니다
시간없으니 거두절미하고 ....
님이 말한 무당이라는 사악한 언어는 하나님을 조준하는것입니다
여기 이유야 어떻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오픈한 까페맞지요
님이 먼저 글을 올리기전 주님 앞이라는 마음이 먼저아니었다면
불에 탈 검불이요 죽정이일뿐입니다
자신의 머리로 인간의 지혜로 감히 하나님앞에 함부로 입에 단어를 올리지마십시요 샬롬
@haha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방언기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님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한다면...
성경에도 없는 거짓된 논리로
사탄이 준 비진리에 속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거짓복음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얘기 해보았자...
쇠귀에 경읽기겠지만...
영적으로 생각안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을 하던지 기도를 하던지 의미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거죠 그래서 방언기도 잘못된 겁니다
무섭고 부럽고 샘나고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고...... 저도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말씀의 기반없이 방언을 받을 때 넘어지고 교만해지기는 해도... 말씀의 기반이 있는 사람이 겸손히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고 나를 채웃시고 나를 다스리시기를 구하며 내 삶의 영역에서 주님의 주되심을 선포하면, 겸손히 회개하고 주앞에 나아가면 참좋은 아버지께서 성령님으로 충만히 임하셔서 사랑으로 채워주십니다. 성령님 이분들 모두 꼭 안아주시고 뽀뽀해 주세요^^
기도란 뭘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나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를 사용하지 말라고하셨다.
방언기도하는 분들의 기도내용이 도대체 뭘까?
자기는 알고나 할까?
통역하면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하던데...
진실한 마음으로 다섯마디를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보다 더 낫지 않을까?
방언기도하면 자신의 영이 충만해진다는 것은 마치 주술이나 체면의 효과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방언 없어도 말씀으로 기도해도 얼마든지 충만 가능하지않을까
시편을 보라 얼마나 영이 충만한 기도인가?
감히 으다다방언과 비교할 수 있을까?
왜 방언기도해야하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방언기도 하루종일 해봤자
허공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힘으로 먗시간씩
기도한다 하는데...
저도 방언기도할때 밤세워가며 철야기도 했었드랬습니다.
지금은 방언기도를 내려놓으니까
더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합니다.
자기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기도를 하면서 영으로 기도한다니 참으로 가련할 뿐입니다
또 한기지 기도에대해 아주 잘못된 생각은
내가 기도를 열심히 쎄게하면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
이런일도 하시고 저런일도 하시고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하지않으신다는 생각은 큰 착각일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실 뿐이다.
우리가 그의 나라를 위해 구하는 것은 우리를 그의 나라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배려이며
동시에 우리의 영광인 것이다.
방언기도로 하루 웬종일 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와는 전혀상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방언기도 그만하시고
그 시간에 성령의 감동으로 된 시편으로 기도해보세요..
@主は愛なり 100%확신?
네 저는 뜻모를 방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그렇게 확신합니다.
저는 저의 확신을 말씀에 근거하여 전할뿐입니다.
진리는 분명합니다.
이것아니면 저것입니다.
님은 님의 생각대로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수도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저에대한 충분한 조언 잘 들었습니다.
서로 각자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샬롬~~
@主は愛なり 네 감사합니다...
방언논쟁이 중요하다고 하나
사랑만큼 중요하겠습니까?
논쟁가운데 항상 조심해야할 것은 사랑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샬롬^^
삭제된 댓글 입니다.
방언기도를 부정한다고 지옥 간다구요????
그럼 방언기도 해야 천국 간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나요???
바로 이런 극단적 사고방식이 방옹자들의 핸디캪이지요.
방언기도 안해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전혀 문제 없지만,
방언기도 계속하다가는 마귀의 음성을 듣고, 거짓 환상과 온갖 신비주의에 빠져
말씀을 등한히 하게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과 접신하다
지옥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그래도 방언기도 계속 하시겠다면
계속하세요!
누가 말리겠습니까?
@물망초 ㅎㅎㅎ
참으로 어이없는 분이시군요...
님은 그냥 하고 싶은데로 하세요.
반박을 하시려면 성경을 근거로해서 반박을 해야지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또한 다수결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진리는 소수이지요.
누가 성령님을 부정합니까?
엉터리 거짓 방언기도를 하면서" 이것이 성령의 은사"라고 억지 부리는
님들이야 말로 거룩하신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속은 것을 알게 되겠지요...
말씀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하고 방언기도에 대해서도 모르니까 그렿게 주장하는 거예요,
결국 한번도 방언통역을 받아 본적이 없어서 방언은사가 얼마나 귀중한지 몰라서 그런것이죠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외국어로 들리면서 예언(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적 방언이고요, 나랏방언이라고도 해요, 10 장의 고넬료 일행이 받은 방언도 마찬가지 지만 외국어로는 들리지 않았죠? 라라라 처럼들리는 방언은 기초방언이라고도 하는데 반복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내용이 다르게 전개되고 영적인 내용들이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전13장 여러은사중 각종 방언 말함을 표현한것은 방언의 들리는 언어 형태가 여러나라 말처럼 들려서 그래요
그렇다고 외국어는 아니예요 외국어처럼 들리지만 알아들을 수가없어요, 저 같은 경우 맨처음에 방언 받을 때는 혀가 꼬부라지면서 럴럴럴 로 시작해서 한 열흘간 하니까 브라질어나 에스파냐어 비슷하게 나오고 한참 지나니까 중국어 비슷하게 나오고 지금은 방언기도가 깊어 진다거나 내 마음속으로 하는 기도내용이 바뀌면 방언이 바뀌더군요! 그리고 방언통역해보면 우리가 늘상하는 기도와는 전혀다른 영적인 기도 내용들이고 또 방언을 해석해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적이고 계시적인 내용들도 들어 있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서울에 대해서는 살아보지도 않고 겨우 한 번 정도 가보고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형통하리니 사람한테 서울이 나쁘다느니, 이상한 도시라느니 설명하려고 하는것과 똑 같은 행동들을 하고 있어요! 일단 한번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아보세요! 그러면 서울의 좋고, 나쁨, 이상한 도시인지 알게될테니까요! 저도 서울에서 잠시 살다가 왔는데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지 않는지 알았다니까요! 그리고 정말 방언이 이상하면 하나님께 여쭈어 보세요!
그러면 답을 주시는데 살아계신 하나님께 왜? 여쭈어 보지 않고 내가복음을 만들어서 자기멋대로 해석들 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