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꽃샘바람이 지나가고 4월과 더불어 화사한 봄이 꽃송이 속에서 벙글고 있었다. 3월이 오는 봄이고, 5월이 가는 봄이라면. 4월은 머무는 봄이었다. 그러나 봄은 꽃이나 나무들에게 왔을 뿐 사람들에게는 오지 않았다. 계엄은 제주도와 변두리 지방 일부에서만 해제되고 큰 도시들에서는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사람들을 겨울에 묶어놓고 있었다. 처음보다 덜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신문들은 여기저기 먹통으로 지워진 흉한 꼴로 배달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신문보다는 기세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 새로 퍼지는 소문들에 더 귀 기울이고, 친한 사람들끼리 수군거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귓속말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 신문 검열 거부를 결의한 사람들이 전원 구속되는가 하면. 어느 신문사 기자들은 유언비어 유포죄로 쇠고랑을 차는 판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은 바짝 얼어붙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수직종인 신문기자들이 그렇게 당하면 보통사람들이야 오죽하랴. 하는 반사 작용이었다. 계엄사에서 굳이 그런 사건들을 보도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바로 그런 파급효과를 노리는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상재는 퇴근시간을 좀 앞당겨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몸이 피곤한 것을 느끼며 목을 두어 번 돌렸다. 일 때문에 피곤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늘 칙칙한 구름이 끼어 걷힐 날이 없고. 생기는 일마다 기분을 상하게만 해 걸핏하면 짜증이 일고는 했다.
“당신. 나한테는 괜찮은데 왜 애들한테까지 짜증내고 그래요? 당신 혼자 계엄 당한 것도 아니고. 당신 성격 버리는 거야 상관없는데 애들까지 버리게 생겼어요.
아내가 핀잔한 말이었다.
계엄이 시작되면서 표나게 책이 안 팔리게 되었고. 계엄이 오래가니 도매상에서는 죽는 소리를 하며 수금을 미루어갔고. 수금이 안 되니 제작비는 물론이고 생활비까지 쪼들리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다가 새로 내는 책마다 검열을 받아야 하는 일까지 겹쳐 제작기간이 그쪽 멋대로 늘어졌고. 재수 없어 검열에 걸리게 되면 조판이 다 되어 교정까지 완료한 책을 낼 수가 없었고. 그리 되면 제작비 압박은 더 심해졌고. 월말이 되면 수금을 독촉해 대는 제작처들에게 시달려야 했고. 그뿐만 아니라 퇴직기자들의 모임을 위험시해 형사들이 뻔질나게 사무실에 드나들었고. 그들의 눈초리 때문에 투위의 성명서 내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사무실에서조차 마음 놓고 얘기할 수가 없어 모여 앉는 것까지 피해야 할 지경이었다.
궂은일들이 그렇게 이중삼중으로 겹치니 마음은 우중충한 채 걸핏하면 짜증이 솟고는 했다. 더구나 검열이 제멋대로라서 무슨 책을 내야 좋을지 종잡을 수 없는 게 또한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 형. 이상재 씨. 어디 가시오?”
“아 예 사장님. 어디 다녀오십니까?”
“아이고 말 말아요. 나 지금 시청에서 오는 길인데. 신간 두 권 중에 하나가 검열에 걸렸어
요.”
“그것 참. 어떻게 사장님이 직접 다니십니까?”
“죽지 못해 하는 짓이지요. 편집장이 다녔는데 검열을 통과시켜 볼까 하고 내가 나섰지요. 그런데 소용없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란 것들이 군대식으로 마구 밀어붙여 버리니 말이 안 통해요. 나 출판 25년에 이런 험한 꼴 첨 당해요. 5.16때도 이렇지는 않았어요.”
“문제는 문제지요. 무슨 책인데 당하셨어요?”
이상재는 머리 희끗희끗한 민 사장을 보며 위로하듯 말했다.
“검열 피해보려고 국내 작가 연애소설을 골라봤지요. 그런데 거기에 군대생활이 조금씩 섞여 있어요. 그게 신성한 군대를 모독하고 있다는 거지요. 책을 내려면 그 부분들을 싹 빼버리고 다시 가져오라는 것인데. 그런 무식이 대체 말이 됩니까? 그 부분들을 다 빼버리면 작품이 망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작가들은 자기네 작품에서 한 줄만 좀 고치자해도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이것 참 이래저래 못해먹을 짓이오.”
민 사장은 상한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수가 없는지 대로상인데도 그 말이 거침이 없었다.
“예.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빵장사나 해먹는 게 제일 속 편할 것 같습니다.”
이상재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시계를 보았다.
“그것도 못해먹어요. 온 천지가 불황에 빠져버렸으니. 우리 사무실에 좀 놀러오세요. 가까이 있으면서 가끔 회포나 풀어야지요.”
“예. 또 뵙겠습니다.”
이상재는 또 불길한 그 생각을 하며 광화문 지하도를 건넜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6개월이었다. 그런데도 계엄이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에게 사형이 선고된 것은 작년 12월이었다. 그것으로 사건은 전부 마무리되었으니 마땅히 계엄은 해제되어야 했다. 더 이상 계엄이 지속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런데 군부는 계엄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건 딴 뜻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신문사 쪽에서 흘러나오는 ‘유비통신’을 들어보아도 소문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뜻대로 정권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 이 불길함은 날로 커져가고 있었다.
이상재는 더 칙칙해진 마음으로 종로2가 금은방으로 들어갔다.
“예에. 돌반지요? 여기서 골라보세요. 한 돈짜리. 두 돈짜리. 이건 닷 돈짜리 팔찌구요.”
금은방 주인의 두툼하게 살찐 손은 빠르게 금반지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 것도 하나 대신 사다 주시오. 내가 직접 가는 게 예의겠지만. 괜히 내가 끼면 분위기도 안 맞을 것 같고. 마음 같아서는 이런 기회에 금돼지를 한 마리 선사하고 싶지만 이거 형편이 형편이라. 서경혜 씨가 우리 출판사 차리는 데 얼마나 고맙게 해줬소. 그리고 그 아이가 집안 우환 속에서도 무사히 태어나고. 건강하게 자라 돌을 맞았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럽고 대견한 일이오. 헌데 돈이 궁해 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하다니. 이거 참......”
한 돈짜리 금반지 살 돈을 내놓으며 원병균이 옹색스럽게 한 말이었다.
“이거 두 개 따로따로 싸주세요.”
이상재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한 돈짜리 금반지를 손가락질했다. 그런 그의 눈길은 반대쪽으로 가 있었다.
“예. 그러시지요.”
주인이 포장을 하는 동안 이상재의 눈길은 여전히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거기에는 정말 원병균이 말한 금돼지가 있었다. 한 마리만이 아니라 크기가 조금씩 다른 것들이 여러 마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금거북들도 있었다. 금거북들은 금돼지들보다 더 종류가 많아 제일 큰 것은 어른 손바닥만 했다. 돼지는 다복. 건강의 상징이고. 거북은 무병. 장수의 상징이었다. 원병균이 유일표의 첫애에게 금돼지를 사주고 싶어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마음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자신은 금거북 중에서도 제일 큰 것을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 그렇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런 기회에 유일표에게는 정다움을. 그의 아내에게는 고마움을 맘껏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의 진정을 나타낼 수 없게 경제력이 빈약한 것에 처음으로 비애감을 느끼며 이상재는 금거북에서 눈길을 돌렸다.
“예. 포장 다 됐습니다.”
일표야. 미안하다.
이상재는 쓴 기분으로 돈을 치렀다.
“어서 와라.”
유일표가 대문을 따주며 벙글 웃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 때 없이 밝았다.
“머리는 많이 길었네? 그냥 중노릇 하고 말 것이지.”
이상재가 유일표의 머리를 흘끗 보며 던진 말이었다.
“심뽀 고약하네. 이게 많이 긴 것으로 보여? 다 늙은 나이에 꼭 제대군인 꼴이지. 너 보기 싫어서 그냥 중노릇 하려고 했는데 원효를 능가하는 고승이 하나 더 나올까 봐 관뒀다.”
유일표는 정말 제대군인 같은 짧은 머리에 두어 번 손가락빗질을 하며 웃었다.
이상재는 걸음을 떼어 놓으며 왁자한 웃음과 유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방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응. 집사람 친구들하고 친정식구들.”
유일표가 대꾸하며 그 옆방으로 앞장섰다.
“아이고. 대장님이 먼저 와 계셨군요.”
“아이고. 이 선생. 어서 오세요.”
방으로 들어선 이상재는 가까이 있는 재건대장 이용진과 먼저 악수했다. 그리고 유일표의 형에게 인사했다.
“요새 출판은 어때?”
유일민이 먼저 안부를 물었다. 그는 전보다 혈색도 좋아졌고 얼굴의 그늘도 많이 걷혀 밝아져 있었다.
“오랜 경험자들의 말로 최악의 불황이라고 합니다. 형님은 좀 어떠세요?”
“그래. 불경기가 닥치면 책값부터 줄인다는 말이 있지. 우리 쪽도 불황을 타긴 하지만 그래도 생필품들이라서 그런대로 견딜 만해.”
“예. 그것 참 다행입니다. 한 군데라도 나은 데가 있어야지요.”
“예. 불황은 예사불황이 아닙니다. 얼마나 불황이면 애들이 모아오는 소뼈가 절반 가까이나 줄었겠습니까. 그나저나 이 불황 끝나려면 어서 계엄이 풀려야 하는데 어쩌려고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잘못하다간 나라 내려앉게 생겼는데.”
이용진이 혀를 찼다.
“나라가 망하나마나 다 엿장수 맘대로지요.”
유일표가 담뱃갑을 끌어당기며 한숨을 쉬었다.
“여보. 미안하지만 상을 좀 들어주면 좋겠어요.”
유일표의 아내가 방문을 여는 뒤에서 이상재가 인사했고.
“아까 부엌에 있느라고 인사 못 드렸어요. 고맙습니다.”
서경혜가 상냥하게 인사를 받았다.
“야. 일어나서 밥값 해.”
유일표가 이상재에게 툭 말했고.
“하. 이집 인심 한번 고약하네. 손님을 막 부려먹으려고 들고.”
이상재가 목청 높이며 일어났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한 쪽은 제가 들 거예요. 형님이 임신을 하셔서 못 들게 한 건데. 당신은 왜 그래요. 정말.”
서경혜가 당황스럽게 손을 저으며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좋은 기운 뒀다 어디다 써. 이런 때 형수님 위해야 귀염받지.”
“그래 요놈아. 계수씨 사랑은 시아주버니다. 어서 나가기나 해라.”
이상재가 유일표의 등을 밀었고. 이어지는 그들의 농담에 유일민과 이용진은 껄껄대며 웃고 있었다.
걸게 차린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며 이상재는 어둑발이 퍼지고 있는 대문 쪽을 돌아보았
다. 1주일 전에 날짜를 가르쳐 주었는데 아직까지 허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신경 쓰였다. 최주한은 사우디에 있으니 어쩔 수 없고. 허진은 꼭 와야 했다. 활달하면서 친구 좋아하는 성격과는 달리 자신의 불우해진 환경 때문에 친구들의 교류까지 극히 제한해 버린 유일표였다.
“자아. 다 같이 둘러앉읍시다.”
상이 놓이자 손위답게 유일민이 말했다.
“저어. 잔칫상을 받기 전에 해야 될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형수님도 함께하시는 게 좋겠
고. 계수씨도 오늘의 주인공을 안고 와 보여주셔야 되지 않겠어?”
이상재는 시간을 끌 생각으로 유일민과 유일표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예. 그래야지요. 그래야 우리도 인사를 차린 다음 상을 받지요.”
이용진이 말을 거들었다.
“맞어. 형수님은 몸 무거우신데 그만 쉬셔야 하고. 오늘은 맘놓고 자식 자랑해도 되는 날이잖아.”
유일표가 그런 생각해내서 대견하다는 듯 이상재의 등을 두들기고 밖으로 나갔다.
곧 아이를 안은 서경혜가 앞서고. 임채옥이 뒤따라 들어왔다. 금방 임신한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임채옥의 배는 불렀다.
“현지야. 손님들께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저는 유현지입니다. 저의 돌잔치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맛있게 들어주세요. 저 예쁘지요?”
서경혜가 아이목소리로 변성해 말하며 안고 있는 아이를 인사시키는 시늉을 했다. 포동하게 살이 오른 아이는 엄마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배시시 웃음 지었다.
“어. 아주 잘생겼네. 미녀야.”
이용진이 아이를 올려다보며 덕담을 했고.
“예. 두 사람은 별론데 애가 아주 예쁘고 총명하게 생겼어요. 이 큰아버지가 애 좀 쓰게 생겼다. 현지 따라다니는 사내놈들 막아내려면.”
이상재의 말에 모두 와아 웃었다. 임채옥도 이상재를 쳐다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얘가 이렇게 덕담을 할 줄 모른다니까. 두 분이 워낙 빼어나니까 애도 역시 아주 예쁘고 총명하게 생겼군요. 해야지.”
유일표가 이상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고.
“맞어요. 심히 유감스럽네요.”
서경혜의 말에 또 모두 와아 웃었다.
“자아. 이제 우리 예쁜 애기한테 선물을 줘야겠지?” 이용진이 뒤에 두었던 봉투를 끌어당기고는. “이건 제가 약소하게 준비한 거구요. 이건 우리 애들이 준비한 겁니다.”하며 포장된 반지갑 두 개를 서경혜에게 건넸다.
“어머나. 어쩜 좋아. 그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가슴이 쓰리네요.”
서경혜가 울상을 지었다.
“당연히 고마움을 표해야지요. 저희들이 입고 있는 은혜가 얼만데요. 그리고 이런 걸 해보
는 게 다 산 교육 아니겠습니까.”
이용진이 말했고. 유일표는 묵묵히 앉아있었다.
“이건 원병균 선배께서 보내신 거구요. 이건 제가....... 금거북은 10만부짜리 베스트셀러
쏴서 두 돌 때 장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재도 반지갑을 서경혜에게 건넸다.
“어머. 출판사도 어려우신데.......”
서경혜의 얼굴이 또 곤혹스러워졌다.
“자아.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빌며 우리 축배를 듭시다.”
유일민이 술병을 들었다.
허진. 이 자식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또 긴급회의 타령할 건가?
이상재는 더는 시간을 끌 명목이 없어 몸이 달고 있었다. 허진이 안 오면 유일표가 아무리 마음을 넓게 쓴다 해도 서운해 할 것 같았다.
그들은 함께 술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아이의 건강을 축복하기 위해서 그래야 하는 것처럼 모두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저어. 여기 손님 오셨는데요. 허미경 씨라구요.”
밖에서 들린 말이었다.
“예에?”
벌떡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연 것은 집주인 유일표가 아니라 이상재였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오?”
이상재는 밖으로 뛰쳐나가며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주소만 가지고 집을 찾느라고 두 시간 이상 헤맸어요.”
허미경이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이렇게 올 작정이었으면 미리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요. 두 시간이 넘게 고생을 하다니. 이거 참.......”
이상재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서 오시오. 미경 씨가 뜻밖에 어쩐 일이오?”
유일표가 뒤따라 나오며 허미경을 맞이했다. 그는. 미경 씨 고생한 게 아주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로구나? 하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유일표는 허미경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오빠가 나흘 전에 갑자기 미국엘 갔어요. 여기서 체결하기로 했던 공장 건설 계약을 미국에서 하기로 했다고요. 떠나면서 저한테 오늘 꼭 가라고 했는데. 그만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건 오빠가.......”
허미경은 핸드백에서 반지갑보다 훨씬 더 큰 포장갑을 꺼내 유일표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가 이리 커요?”
이상재가 뚜벅 말했다.
“예. 오빠가 오빠한테 너무 죄지은 게 많다고 선물을 특별히 부탁했어요. 애기가 돼지처럼 건강하고 복스럽게 자라라고 금돼지를 마련했어요.”
허미경이 말한 앞의 오빠는 허진이었고. 뒤의 오빠는 유일표였다.
“그거 참 잘됐소. 허진이가 우리현지 장학금 마련한 셈이네.”
이상재가 얼른 말을 받았고.
“어머. 그렇게 과용하면 어떡해요.”
서경혜가 미안쩍은 표정을 지었다.
“짜식. 죄짓기는. 제 놈도 매인 몸인 걸 누가 몰라?”
유일표는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며 담배를 빼물었다.
“이건 제가 조금 준비한 거구요.” 허미경이 또 하나의 반지갑을 꺼내더니. “어디. 내가 너한테 직접 끼워주고 한번 안아볼까?” 하며 일어서다.
허미경은 아이의 가운뎃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는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아이고. 눈이 초롱초롱한 게 아주 영리하게 생겼구나. 그래. 건강하고 예쁘게 커라. 응? 깍꾹. 깍꾹!”
이상재는 아이를 어르는 허미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음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빼앗겨버린 자기 아이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허미경을 유심히 쳐다보던 아이가 낯가림을 하느라고 빼액 울음을 터뜨렸다.
“응. 낯가림도 할 줄 알아? 그래. 그래. 엄마한테 가.” 허미경이 아이를 넘겨주고는. “어쩜 저렇게 두 분 좋은 점만 쏙 빼서 닮았는지 모르겠네요. 집안이 잘될 징조예요.” 하며 자
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봐라. 덕담은 저렇게 하는 거야. 나이 들어가는데 어서 좀 배워라.”
이상재의 어깨를 툭 치며 유ㅜ일표가 하는 말에 모두는 와아 웃었다.
“어서 많이들 드세요. 그럼 현지는 이만 물러갑니다.”
서경혜는 아이를 안고 나갔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들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양품점은 좀 어때요? 거기도 불황타지요?”
유일표는 인사를 차리느라고 허미경에게 물었다.
“네. 개점휴업 상태나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계엄으로 경기가 얼어붙었다고 하지만 좀 심
한 것 같애요.”
허미경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경기가 이렇게 나빠지는 건 석유파동이나 계엄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는 것 아닌가요? 거 사우디 쪽 벌이가 나빠졌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이용진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최주한이 보내오는 편지를 보면 우리나라 회사들이 사우디만이 아니라 그 주변국들까지 진출하기 시작했으니까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은 시작에 불과하고 앞으로 더 본격적으로 벌어들이게 될 거라고 합니다.”
이상재의 말이었다.
“예. 저 말이 맞습니다. 저의 선배 김기돈이라는 사람이 사우디에 몇 년 있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는데. 그 사람 말도 그렇더군요. 사우디를 발판삼아 우리나라 기업들이 쿠웨이트. 요르단. 시리아. 리비아 같은 나라의 대형 공사들을 따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계엄바람이 워낙 살벌하니까 그런 소식은 다 묻혀버리고. 사람들도 별 관심을 안 쓰고 해서 잘 모르는 거지요. 그 사람 말로도 앞으로 4~5년 동안이 중동경기가 가장 좋아지는 시기가 될 거고. 그때 가면 지금 벌어들이는 돈 몇 배를 벌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지금도 그쪽 경기 없으면 불황이 훨씬 더 심해질 겁니다.”
유일민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 거기서 벌어들이는 돈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경기가 이 꼴인가요. 그래. 군바리들이 계엄으로 국민들 꼼짝 못하게 해놓고 즈네들 맘대로 다 해먹는 것 아닌가요?”
이용진의 화난 어투에서는 재건대의 어려움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예. 석유파동보다 더 큰 원인이 결국 계엄입니다. 박 통이 죽어 사회가 불안하게 된데다가 계엄까지 공포분위기를 조성해대고 있으니 기업들이 몸 사리며 재투자를 안 하고. 재투자를 안 하니 수출이 줄고. 소비자는 소비자들대로 불안스러워 돈을 안 쓰고. 그러다보니 불황은 자꾸 심해지게 되는 겁니다. 나라가 정상이 되려면 어서 빨리 계엄이 풀려야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 참 걱정입니다.”
유일민이 혀를 차며 술잔을 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안 빼고 계엄 피해를 보고 있지만. 그래도 가장 위험한 사람이 오빠잖아요? 요새 노조하려는 사람들도 마구 잡아들인다는데 계엄 해제될 때가지는 정말 조심하세요. 노조야 계엄 풀리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허미경이 유일표를 보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작전상 후퇴라고 생각해서 애 보는 데만 열중하고 있소. 이러다간 보육원 하나 차리게 될지 모르겠소.”
유일표의 말에 허미경이 쿡쿡 웃었고.
“그래요. 서방님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애를 이뻐하는 것이 뜻밖이었어요.”
임채옥이 손님 대접하듯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뭘 제 자식인데.”
유일민이 말을 받자.
“형수님. 전혀 부러워하지 마세요. 형님은 보육원 세 개는 차릴 정도가 될 테니까요.”
유일표의 말에 모두 웃었다.
“오늘이 좋기는 참 좋은 날입니다. 유 선생이 이렇게 농담 많이 하는 건 첨봅니다.”
이용진이 유일표에게 술잔을 건넸다.
이상재는 술잔을 기울이며 유일민과 임채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들이 그지없이 행복해 보이고. 자신은 무언가 큰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말은 안 하고 왜 그렇게 자꾸 술만 마시세요? 빈속일 텐데.”
허미경이 숟가락을 놓고 상에서 물러나 앉으며 이상재에게 말했다.
“몰라요? 본전 뺄려구요.”
이상재의 뚱한 대꾸에 모두 웃는데. 유일표는 무슨 색다른 뜻인지 이상재의 등을 치며 유난히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아서라. 상재야. 애 그만 태워라. 맺지 못한 사랑이라 더 애달픈지 안다만. 네 말마따나 마
누라를 둘 거느릴 수는 없잖냐. 이렇게 만나면서 살 수 있다는 것만도 행복 아니겠냐.
유일표는 속으로 이런 위로를 보내고 있었다.
유일표의 집을 나섰을 때 이상재는 꽤나 취해 있었다. 이용진과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진 이상재는 허미경을 붙들었다.
“우리 어디 가서 술 한 잔 더 합시다.”
“밤이 늦었어요.”
허미경이 이상재를 부축하며 고개를 저었다.
“늦긴요. 통금 아직 멀었는데.”
“여기서 집까진 너무 멀어요.”
“좋소. 그럼 일단 광화문까지 갑시다.”
허미경이 택시를 잡았다.
이상재는 한참이 지나도 말이 없었다.
“요새 새로 준비하는 책은 뭔가요?”
침묵이 어색스러워 허미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표네 형님과 형수의 사연을 알지요? 어떻게 생각해요?”
이상재가 불쑥 내놓은 말이었다.
“.......”
“내 말 안 들려요?”
“.......”
“내 말 안........”
“네. 안 들려요.”
허미경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그런 소리 듣기 싫다 그거지요? 예. 좋아요. 그렇지만 난 하고 싶어요. 그 두 사람은......”
“여기 택시 안이라는 것 아시죠? 그런 주정할 만큼 술 취한 것도 아니구요.”
허미경은 또 이상재의 말을 잘라버렸다.
“알겠소. 듣기 싫어하는 것. 그런데 왜 난 자꾸 하고 싶어지지? 그 사람들이 부러워 죽겠으니 어떡하면 좋지? 내가 바보가 아닌데....... 왜 그 문제만 생각하면 바보처럼 되지? 모르겠어.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 일표 그 새끼도. 주한이 그 새끼도 다 나쁜 새끼들이야. 나를 까맣게 속이다니. 정말 나쁜 새끼들이야. 그 새끼들이. 그 병신 같은 새끼들이 사랑이 뭔지를 몰라서 그런 거야. 그 새끼들이 원수야.......”
이상재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허미경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이상재는 시청에 자리 잡은 계엄사 출판검열부의 호출을 받았다.
“시청에서 오라는데요. 바로 가봐야 되겠습니다.”
이상재는 전화를 끊으며 원병균에게 말했다.
“뭐가 걸린 것 아니오?‘
교정을 보고 있던 원병균이 즉각 반응했다.
“예.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예감도 좋지가 않아 이상재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번역물이고. 하나는 한인곤 씨 건데. 번역물은 이상이 없지 않겠소?”
“예. 저도 한인곤 씨 원고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기가 쉽소. 내가 갈까요?”
“아닙니다. 제가 가야지요. 당해도 한 살이라도 적은 제가 당하는 게 낫지요.”
“이거 번번이 이 형이 못할 일이오.”
원병균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군인 둘이 석상처럼 정문 양족에 서 있는 시청으로 들어가며 이상재는 또 기분이 역겹게 상했다. 박 정권 18년 동안 자꾸 커지기만 했던 군인에 대한 거부감이 이번 계엄으로 극에 달해 있었다.
“저어. 물결출판사에서 왔습니다.”
이상재는 검열관 앞에 명함을 내밀었다.
“순서를 기다리시오.”
중위는 얼굴만큼 딱딱한 어조로 말하며 턱짓했다.
군대의 명령에는 오로지 복종뿐이라 이상재는 돌아서서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긴 나무의자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서너 개가 이어 붙여진 그 의자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온 사람들이 네댓 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관공서 분위기는 딱딱하게 마련인데 거기다가 군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으니 그 분위기는 더없이 살벌했다.
“그래서 우린 아동물 쪽을 생각해 봤는데. 그것도 뜻 같지가 않아요. 갑자기 좋은 작품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동물은 삽화까지 들어가면서 호화로워야 하니까 제작비는 더 많이 먹히고. 그렇다고 낱권 판매시장이 안정되게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다니까요. 이래저래 죽을 맛이지요. 어떻게 좀 독서인구가 느는가 싶었는데 이런 벼락이 치니 원.”
“우리도 죽을 지경이지만 독자들도 딱하지요. 이러기를 벌써 7개월짼데. 무슨 신나는 읽을거리가 있어야 말이지요. 서로 못할 일이지요.”
그들은 연달아 한숨을 쉬었다.
이상재는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검열관 앞에 불려갔다. 예상대로 검열관 책상에는 한인곤 씨의 교정본이 놓여 있었다.
“당신. 무슨 의도로 이 불온한 책을 내려는 거요?”
중위가 눈을 치뜨며 대뜸 물었다.
이상재는 ‘당신’이라는 말에 기분이 획 상했다. 중위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어렸다. 그
러나 ‘불온’이라는 말이 감정을 위축시켰다.
“아무런 의도도 없습니다.”
“뭐라고? 이런 상황에서 군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군의 위상을 파괴하는 이따위 책을 내려고 기도하면서 의도가 없다는 게 말이 되오?”
중위가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예. 원고 집필기간을 돌이켜 따져보면 아시겠지만. 한인곤 씨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계엄 이전으로 이런 상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자신이 살아온 일생을 쓰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상재는 중위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여러 말 마시오. 지금 우리가 따지는 것은 원인이나 경과가 아니라 결과요. 결과. 그리고. 이 내용은 계엄 상태가 아니라 해도 용납할 수 없도록 신성한 군을 모함하고 음해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소. 당신이나 이 자의 근본 사상이 의심스럽소.”
이상재는 ‘근본사상‘이라는 말에 바짝 긴장했다. 말이 느닷없이 그쪽으로 비약할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건 갑자기 목줄을 겨누는 비수였다.
“그분의 경력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그분은 예비역 육군대령이고. 다선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국익에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그분도 그렇고. 우리 출판사도 그런 책을 낼 마음은 없습니다. 그 판단을 하기 위해서 검열을 하는 것이니까 그 조처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재는 백기를 들기로 해버렸다. 애초에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고. 퇴직기자에 ‘근본 사상’ 의심이 겹쳐지면 그 불똥이 엉뚱하게 튈 위험이 컸다.
“그게 진심이오?”
“예. 그렇습니다.”
“좋소. 그쪽에서 그렇게 반성적으로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도 이 한인곤 씨의 경력을 최대한 우대해서 별도의 수사 같은 건 하지 않겠소. 그 대신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준수하시오. 첫째. 이 원고 일체를 당장 가져오시오. 압수하겠소. 그리고 조판 전부를 오늘 당장 해체하고. 인쇄소 사장의 확인서를 제출하시오. 둘째. 한인곤 씨가 내일 중으로 여기 출두하여 서약서를 쓰도록 조처하시오. 할 수 있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됐소. 차질 없이 당장 실시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이상재는 시청 계단을 터덕터덕 걸어 내려가며 그 중위가 마치 출판 전문가처럼 조처를 취한 것에 대해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실제로 책을 읽어내는 사람들은 그전부터 그 일을 해왔던 공무원과 그 부서에서 위촉하고 있는 전문가들인 것을 출판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한인곤 씨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육군 참모총장이 하나도 빼지 않고 전부가 일본군 출신이라고 적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그 책은 이 땅에서 빛을 볼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몰랐다. 한인곤 씨는 출판사의 어려움을 알고 제작비는 자기가 부담할 테니 책만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글도 속필인 문인이 무색할 정도로 빨리 써가지고 왔다.
그런 열정을 지녔던 한인곤 씨에게 어떻게 전화를 해야 할지 이상재는 난감하기만 했다.
이상재는 시청을 돌아서며 고개를 젖혀 한숨을 토해냈다. 문득 잡힌 봄 하늘은 밝고 푸르기만 한데 가슴속은 캄캄한 어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