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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원문보기 글쓴이: ♧.仁 賢.♧
"너희 섬(:대마도)은 조선 지방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을 써야 한다."
사진:15세기 대마도를 통치한 관청이었던 ‘엔쓰지’(圓通寺) 내의 조선범종. 태극의 팔괘와 비천상 무늬가 확연해 우리나라 종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총각’이 한국말이라고요?” “아니 ‘지게’도 한국말이에요?” ‘쓰총’(쓰시마 총각) ‘삿총’(삿포로 총각)이란 줄임말을 쓰는 쓰시마의 택시 운전사에게 ‘총각’이 한국말이라고 알려주자 깜짝 놀란다. 한국의 지게 역시 쓰시마에서도 ‘지게’로 불린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선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 쓰시마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산 단어는 지금도 300개가 넘는다.》 ● 일제시대 한국인 2만여명 살아 섬 전체의 32%가 척박한 산악지형이고 농토는 3%도 안 되는 대마도의 생존과 성쇠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의 교류에 크게 좌우돼 왔다. 대마도향토연구회 회장인 나가토메 히사에는 “한반도와 대마도의 관계는 밝았던 시대와 어두웠던 시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좋았던 시기로 기원전 3세기∼2세기의 500년과 조선 초기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대마도는 인구가 9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인구가 해마다 줄어 지금은 4만여명에 불과하다. 한국인도 일제강점기에는 2만여명이나 살았지만 지금은 60명에 지나지 않는다. 1999년 부산∼대마도간 정기여객선이 취항한 이후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엔 1만5300명의 한국인이 대마도를 찾았다. 파고가 높아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으면 대마도의 주요 호텔과 음식점들이 텅 비기도 한다. ● 한복입고 참가하는 ‘아리랑 마쯔리’ 조선시대 때도 대마도엔 주기적으로 ‘조선 붐’이 일었다. 관료 학자 통역관 악대 등 50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문화사절단인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갈 때면 대마도는 후끈 달아올랐다. 대마도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족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웬만한 절이나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곳’이라는 대리석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연하는 ‘아리랑 마쯔리’가 열리기도 한다. 이때 대마도 주민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한다. 주로 부산 동래구청장이나 구의회의장이 초청돼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가 타던 가마에 탄다. 그 호위는 대마도에 진주해 있는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대장이 맡는다. . ● 조선왕실의 관직임명장인 ‘고신’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유물 중 조선왕실의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고쿠신)이 특히 흥미를 끌었다. 대마도가 조선에 정치적으로 예속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이를 받은 사람들은 수직왜인(受職倭人)으로 불렸다. 그래서 그런지 취재팀에 특별히 전시장 내부 촬영을 허락한 자료관 직원은 왠지 고신에 대해서만 “박물관 소유의 물건이 아니다”며 촬영에 난색을 표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취재팀이 고신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자 그 직원은 거북한 표정으로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 들었다. “왜구에 꼭 일본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한국과 중국 출신도 많았다. 고신은 한국 출신 왜구로서 조선왕조의 스파이 역할을 하다가 공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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