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포말이 눈 속에 순백의 아름다움을 불어넣는다. 철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깊게 요동치는 파도가 귓가에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는 멋진 환희를 심어넣고, 새하얀 물거품과 흠 잡을데 없이 파란 바닷물결이 서로에게 밀착하며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다.
「처얼썩, 철썩...」
파도 소리에 맞춰, 마치 춤을 추듯이.
나는 액자에 고정시키고 있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고개를 약간 들어올렸다. 늘 그렇듯이 나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아니, 액자 속에 담긴 생생한 바다의 조각을 보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으리라. 바닷가에는 살아 본 적도 없고, 심지어는 바다를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내륙지방인 사피르(Sapire) 토박이인 나이지만, 바다에 대한 나의 애정과 지식은 바다에서 숨쉬고 호흡하는 아이들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지식쪽은 약간의 재능과 노력이 합해져 이루어낸 결과였고, 애정쪽을 말하자면 그야말로 '한없는 사랑'이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나의 애정과 지식은 가끔씩 내륙 지방에 오는 뱃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했다. 나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내륙의 아이가 바다에 대해 이렇게 강한 집착과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바다를 대할 때 나는 늘 설레였다. 그것이 비록 진짜 바다가 아니고 액자 속에 담긴 그림이나 책 속의 흑백 삽화, 혹은 늙은 선원들이 해주는 옛 해풍(海風)의 전설뿐이더라도. 그리고 그런 것들을 접할 때면 바다에 대한 지식이나 앎 이상의 것이 가슴 속에서 그 어떤 것이 물결치는듯한 감정으로 다가와 바다 속에 나를 안착시켰다. 향수, 또는 절절한 그리움이 바다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내륙에 살고 있는 내가 늘 볼 수 있는 바다의 한계는 낡디 낡아 색감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 고서들, 그리고 내 방에 있는 유일한 그림인-이 그림은 원래 거실에 있는 것을 내 마음대로 내 방에 들인 것이었다.-파랗고 차갑게 출렁이는 액자 속 바다 한 조각 뿐이었지만, 그런 물리적인 한계가 느껴지지 않을정도로 바다가 좋았다.
그리고 웬지 모르게 파란 물결과 흰 모래사장이 그리워질때가 있었다. 마치 나 어릴적에 그 곳에서 춤추고 헤엄치던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바다가 그리웠다.
가끔 그런 생각에 깊이 잠기고는 한다. 혹 바닷가에서 산다면, 바다를 실제로 보고, 그 소금향기에 취해 바닷속에서 지치지도 않고 하루종일 헤엄쳐 다닐 수 있다면-하고.
늘 그렇듯이 상상뿐이지만.
액자에서 시선을 뗀 나는 발코니 쪽에 몸을 기대었다. 내 방의 묘한 위치-1층도 아니고 그렇다 해서2층에 있는 것도 아닌-때문에 이 발코니에서는 손쉽게 1층의 거실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층에서는 이 발코니와 거기에 서 있는 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단 1층 뿐만이 아니었다. 내 방을 제외한 그 어느장소에서도 이 발코니를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이 마음에 끌린 나는 종종 이 곳에 몸을 숨기곤 한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가 내 비밀장소랄까. 소녀들의 취향이 흔히 빚어내곤 하는 은밀하고도 조용한 자신만의 공간. 발코니에서 거실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엄마가 동생을 재우고 있는데 그것 때문인지 거실은 무척 조용하다.
소리와 분위기 둘 다.
나는 엄마와 동생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동생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흡사 조카를 바라보는 이모의 그것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리 둘은 무려 열세살이나 나이차이가 나니까 말이다. 내가 열 다섯해, 동생이 이제 막 두 해째의 생일을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해마다 우리 가족을 찾아와 집 전체에 달콤한 마법을 걸어주시는 데니아 아주머니 내외도, 간간이 머물다 가는 수정숲의 은둔자들도, 그리고 우리 집을 수시로 드나들어 이제 거의 우리 고양이가 되어버린 리이덴도 처음에는 나와 내 동생이 남매지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게 네 동생이니?'라며 나와 동생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았고, 리이덴은 시트릿처럼 빛나는 노란 눈동자에 의문의 빛을 담아 눈을 크게 한 번 깜박였다. 내륙 사람답게 하얀 빛이 완연한 피부라던가, 파란색과 보라색을 반반쯤 섞어놓은 것 같은 청보라빛의 큼직한 눈매등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우리를 남매지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열 살을 후쩍 넘기는 나이차를 가진 동기간이란 흔하게 있는 관계는 아니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동생의 칭얼대는 소리와 엄마의 아기를 어르는 소리, 자장가 소리가 어느새엔가에 뚝 그쳤다.
동생이 그새 잠든 모양이었다. 발코니 저 편 거실에서 엄마가 동생을 돌보느라 지친 몸을 죽 펴고 부엌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그런 사실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키보다 약간 높은 발코니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잘못 뛰어내린 모양인지 발목이 조금 쑤시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고 부엌으로 향했다. 모처럼 엄마에게 숲으로 산책이라고 가자고 할 참이었다. 오늘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아 나도 퍽 심심했고, 엄마 역시 기분전환, 그러니까 동생에게서 벗어나 좀 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보였다.
방을 나와서 부엌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부엌 청소에 바빴다. 내가 계단을 내려오며 들렸을법한 투닥거리는 발소리도 듣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부엌 문가에서 엄마를 바라보는 내 왼쪽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들어올려지는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 정적인 집안에서 그녀 혼자만이 너무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엄마, 뭐 하시는 거에요?"
뻔히 '청소' 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면서도 치레로 묻는 질문이었다.
"청소한단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특히 더 더러워. 왜 그런 건지, 나원 참. 일이 많은 날은 왜 그런지 모르게 한 두 가지씩 꼭 무언가 할 거리가 더 생긴다니까. 안 그러니 로티스?"
으응. 뭐, 늘 그렇지. 아니면 엄마가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나는 간단하게 얼버무린 대답을 건네고는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엄마가 부엌 일을 대강이라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고 할 심산이다. 다른 날은 엄마가 힘들거나 말거나 나는 내 일에 열중이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릴 적의 '엄마의 요정' 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 같다. 어린 나는 그렇게도 엄마를 졸졸 따라다녀 갓 태어난 동생을 돌보던 그녀를 종종 힘들게 하곤 했었지. 그래서 엄마를 위해 태어난 요정이라는 소리도 종종 듣곤 했고 말야.
안 그래, 장난꾸러기 요정씨?
이건 스스로에게 던지는, 약간은 자책같은 물음이다. 대답은 유보하기로 한 물음.
달그락. 마지막 접시를 기운차게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시야에 엄마의 밝은 얼굴이 들어왔다. 내가 뭔가를 잠깐 생각하고 있는 동안 남은 일을 금세 끝낸 모양이다.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이었다. 어떤 일이라도 밝게 처리하는 사람. 그리고 딸아이에게 힘들다는 말을 건네며 밝은 얼굴로 은근히 도움을 유도할 줄도 아는.
"엄마, 같이 산책하러 안 갈래요? 와아, 날씨도 좋다..네?"
엄마의 입에서는 흔쾌히 대답이 흘러 나온다. 간단하지만 멋진 마법의 말이.
"물론."
날씨가 좋다는 건 엄마를 산책길로 불러내기 위한 빈말에 불과했지만 날씨는 정말로 좋았다. 선선한 바람과 좁지도, 넓지도 않은 오솔길이 기분 좋게 어우러져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참을 조용히 걸으며 늦가을을 만끽하고 있던 중,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바람에 그녀의 머리가 황금 실타래의 실이 풀리는 것 마냥 부드럽게 요동쳤다. 황금 실타래가 하나씩 풀리면서, 엄마의 길고 긴 이야기도 시작을 향해 풀려나가고 있었다.
"이게 뭘까, 로티스?"
엄마가 장난기가 서린 어조로 내게 물어 왔다. 엄마는, 셀린은 또 내게 수수께끼를 내려 하는 게다.
엄마의 손가락에는 이제는 낡아버린 회색 잿빛 펜던트가 제가 구시대의 유물인 것을 자랑이나 하듯이 덜렁덜렁 보기 싫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펜던트를 바라보면서 서서히 기억을 되감아 보니 이 펜던트는 나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다섯살 때 쯤이었던가, 아마. 엄마의 보석함 속에서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 펜던트를, 어린 나는 호기심에 손아귀에 꼭 움켜쥐고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 때는 그 펜던트가 예쁘던, 밉던 그 외견에는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저 엄마의 물건 중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에 있었던 물건이란 것에 끌렸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펜던트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다가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울러 다음 날 엄마가 나를 깨우다가 내 손에 쥐어진 이 회색빛 펜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펜던트를 가져갔던 일까지 기억이 났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일이었고, 일상사의 한 장을 장식하기에도 약간 모자란 감이 있는 일이었지만, 그만큼이니마 기억이 나는 것은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이기 때문일까.
"어릴 때 쥐고 잤던 펜던트지요, 뭐. 근데 지금 보니까 별로네요. 줄도 반쯤은 엉켜 있고, 그 보석은 아니, 보석 있던 자리는 비어 있잖아요. 자리만 덩그마니 남아있고, 그리고...또...펜던트가 금빛이었으면 정말 멋있었을 텐데. 이건 이 색도 저 색도 아니잖아요."
엄마는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마치 내가 질문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녀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우리는 어느 새 수정숲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이 낡은 장식에도 무언가 이것을사랑했던 사람들의 영혼이랄까- 그런 것들이 깃들어 있단다. 그래...여기 이 펜던트에는 아주 많은 사연이 들어있다고 하더라. 과거부터...죽.
그리고 상상력을 조금만 넓혀 보자면 지금 여기.우리가 서 있는 이 곳까지."
한낱 장식품에도 그것을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이나 따듯한 손길이 맻혀 있다면 좋은 일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이 곳까지 그런 손길이 닿을 것이라고는 생각돼지 않는다. 하물며 이런 퇴화한 장식품의 한 구석에라도 내가 관련되어 있다고는 웬지 생각하기 싫은 것이 당연지사다.
"설마요."
내 부정,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는 펜던트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조의 말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목소리에는 점점 활기가 더해져갔다. 이야기를 잘 해주는 사람이 늘 그러하듯, 그녀의 얼굴에도 무언(無言)의 표정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되도록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줄 수 있도록, 얼굴 표정이 보다 이야기에 적합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수정숲 안쪽으로 한 발짝씩 걸어들어갔다. 엄마의 이야기는 점점 깊은 곳을 향해 뻗어 나가는 가지같아 보였다.
"어엇, 정말이란다. 로티스. 지금까지 엄마 말 중에서 뭔가 틀린 것 있으면 말해보려무나. 없지? 자, 그럼 이제부터 이 엄마가 하는 이야기도 사실이 되는 거야. 엄마는 바닷가 마을이 고향이란다."
거기에서 엄마의 이야기는 호흡을 가다듬었고, 나는 '바다'라는 어휘 하나에 약한 두근거림을 담아 엄마의 짧은 호흡에 내 숨을 맞추었다. 그 바다라는 어휘 하나는 엄마의 말도 되지 않을법한 논리를 잠자우기에 충분했다. 바다, 내가 그토록 동경하는 단 하나의 언어이니 말이다.
수정숲은 가을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 숲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보석들로 이루어져 있는 숲이었다. 물론 나무들은 봄에는 연두빛 새싹을 틔웠고, 여름에는 푸르른 선율을 가볍게 연주했다. 그리고 가을에는 여느 숲이 그렇듯 갈빛 잎새가 우수수 떨어졌고, 겨울에는 눈에 앙상한 가지를 가리기에 급급한, 그런 평범한 숲이었다.
다만 특별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투명하고 반짝이는 아름다움 속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이었다. 봄에 피는 새싹은 그 하나하나가 맑게 빛나는 연초록빛 수정잎새였고, 여름에 한껏 드러나는 푸르른 신록은 반쯤 투명해진 짙푸른 초록 보석이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모든 잎들이 녹색의 껍질을 벗고 붉디붉은 '야생의눈' 이라는 보석으로 변했다. 초록 수정이 붉은 야생의 눈으로 변해갈 때에는 딱 손가락 두 개만한 요정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앙증맞은 몸을 초록 수정에 잠시 기대었다. 그러면 그 잎은 곧 붉은 '야생의 눈' 이 되었고, 요정들은 그 붉은 잎사귀에 달린 가지각색의 열매가 되어서 가을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수정을 싹틔우기 위하여 나무들도, 숲도 길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면 그들의 편안한 잠을 돕기 위해 가느다란 다이아몬드(Diamond)가 가루가 되어 눈처럼 떨어져 내렸다. 보석들이 반짝이는 숲. 그것이 바로 수정숲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작은 요정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늦가을이었다.
"엄마의 집안에는 이 펜던트가 대대로 내려오는 소중한 보물이야. 비싼 거냐고? 물론 아니지. 그러면 엄마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겠니. 이 펜던트에는 옅은 바닷바람이 느껴진단다. 넌 그렇게 생각 안 하니? 바다가 이 속에서 웃고, 또 울고 있는 거야. 로티스 넌 오키아나를 알고 있지?"
"알고 있다마다요. 반은 사람의 형상이고, 나머지 반은 항상 물 속에 잠겨 있지만 흔히 물고기 꼬리 모양을 하곤 하는..."
"그런데 너 말이다, 오키아나가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니? 아니, 사람으로 태어난 오키아나도 있다는 걸 아니?"
엄마의 말을 들은 나는 의문에 빠졌다. 바다에 대해 들은 수많은 말들 중 그런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오키아나는 흔히 인어(人漁)라고 불리는 반인 반어였는데, 어떻게 오키아나가 사람이 된다는 말인가. 그건 이미 오키아나가 아닌, 그러니까 인어가 아닌 사람의 몸임이 분명한데.
"모를 줄 알았어. 몸이 인어라는 게 아니라, 인어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거든. 바닷가 마을에는 바다와 특히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단다. 그들은 배를 잘 타지 않고 직접 바닷속으로 뛰어들지. 그리고 거기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낀단다. 우리 바닷가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빗대어 '사람이 되어버린 인어'라 하는 것 뿐이란다."
엄마의 '우리 바닷마을 사람' 이라는 말이 묘한 동질감을 불러일의킨다.
어느 새 우리는 수정숲 한 가운데에 있는 넓은 공터에 다다랐다. 엄마는 적당한 나무둥치를 찾아 거기에 털썩 주저앉았고, 나도 엄마 바로 옆에 있는 늙은 고목의 둥치에 몸을 맡겼다. 잠시 이야기가 멈춘 틈을 타서 고개를 들어 보았다.
빨간 야생의 눈들이 가을의 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붉게 빛나는 잎들이 태양의 금빛에 녹아들어 밝은 가을볕에 보다 강렬한 색채를 부여해 주었고, 작은 요정들은 잎사귀 끝에서 작은 열매들이 되어 사라져갔다. 바람이 강하지는 않지만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불어왔다. 거기에 맞춰 엄마의 긴 금발이 보기좋게 계속 흩날리고 있었고, 내 머리칼도 약하게 바람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엄마의 옆얼굴은 풍성한 금발과 초록 눈동자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온화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특히 오늘은 엄마의 머릿단이 가을의 풍성한 빛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내 머리는 엄마의 긴 금발과는 정반대라고 느껴질 정도인, 어깨선을 넘지 않는 짧은 은발이었다. 은색은 가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기에 모든 것이 함께 약동하는 가을 낮에 내 은빛의 머릿단만이, 그리고 나만이 이질적인 존재인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엄마의 이야기 속에 나왔던 인간으로 태어난 인어일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이 얼핏 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굳이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살던 마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대. 아주 오래 전에...한 백년도 더 된 어느 겨울에 말야, 그 사람이 죽고나서 자신을 바다에 던져달라고 했단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자, 사람들은 그 여자를 태워서 그 재를..."
"여자였어요?"
"오키아나를 닮은 사람들은 대개 여자란다. 여자들이 바다와 더 쉽게 교감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있거든."
엄마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내 얼굴을 보며 보기좋은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그녀를 보며 싱긋 마주 웃었다. 엄마의 웃음이 보기 좋았다. 비록 그녀가 웃을 때 세월의 주름들이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해도.
"네가 궁금해 하는 것 같으니, 처음부터 이야기 해 줄게. 우리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이란다.
바닷가 마을에 내려오는 깊은 파도줄기 같은 이야기지. 이 이야기만큼은 다른 전설들과는 달리 한 글자도 다르지 않게, 그리고 그 어떤 내용도 바뀌지 않은 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단다.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그녀의 목소리가 파도줄기를 타고 내 의식과 무의식의 골을 넘나들었다. 멋있는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신비로운 이야기라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이야기에 강한 금기가 둘러져 있다는 것일까. 백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어찌 보면 더할 나위없이 몽환적일 듯한 이야기. 한 밤중에 보름달을 보며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바닷가 마을의 깊은 전설...
바다에 몸을 맡긴 듯한 이야기의 유연한 흐름이 나를 저 깜깜한 심해 속으로 밀고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전설 속에서 물살에 몸을 맡기며 헤엄쳤다. 전설이라는 슬픈 부제를 지느러미처럼 단 물고기처럼.
∽
푸른 숨결이 세 사람을 휘몰아쳤다. 가쁜 바다의 숨결 사이로 잔잔한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모래사장에는 키가 훤칠하게 큰 여자아이 하나와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가죽끈으로 대충 둘러맨 남자아이, 그리고 약간 작은 키에 장난스럽고 앳된 얼굴을 지닌 단발머리 여자아이, 그렇게 셋이 서 있었다. 작은 여자아이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두 사람 다 내일도 배를 타고 나갈거야?"
얼핏 듣기에도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가느다랗고 높은 목소리였다.
"응."
"난 아냐. 내일은 비번이거든."
곧바로 여자아이의 작은 웃음이 바닷가 모래사장 속을 헤엄쳐갔다. 초록 물고기가 해초(海草) 속을 푸르게 헤집고 가는 것마냥 밝고 기뻐보이는 청록빛 웃음이었다.
"와, 그럼 린디아는 나랑 내일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거야?"
린디아라 불린 소녀는 말갛게 웃음지었다. 웃는 얼굴에 성숙한 표정과 함께 밝은 미소가 어렸다. 반면에 린디아의 옆에 서 있던 소년은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평소 버릇처럼 오른쪽 눈꼬리가 날카롭게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살고 있는 작은 바다 마을, 디에 로제닌의 그 누구라도 그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린디아는 너랑 같이 있을 수 있겠지. 근데, 헤나 너도 배를 타고 나갈 수는 없는 거야? 사람들이 늘 그러잖아. 헤나, 너만 바다에 나가지를 않는다고.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고 늘 바닷속으로 다가서고 싶어 물 속으로 뛰어드는 네가 왜 배는 타지 않느냐고 말야."
그의 말을 흘려넘기듯 건성으로 들어본다 하더라도 소년의 말 속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그녀'만' 바다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헤나는 그의 말에 뭐라 대꾸하려다가 린디아를 흘깃 바라보았다. 단지 시선이 그 쪽으로 닿은 것뿐이었지만, 그녀의 금발을 보자 잠깐 거기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바람에 그녀의 찬란한 금발이 흔들거렸다. 헤나는 린디아의 머릿결이 마치 황금빛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긴 금발은 디에 로제닌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는 그 큰 황금나무나 린디아의 황금 펜던트에 있는 그 짙은 황금빛 같아 보였다. 린디아의 얼굴은 그저 평범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녀의 긴 금발은 마을 사람들이나 그 주위 마을에서도 보내곤 하는 찬사를 받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만큼 결이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말했잖아, 리에드. 나는 바다는 좋지만 그 답답한 뱃속을 못 견디겠어.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은걸...그런 곳엔 들어가기 싫어."
헤나의 대답에 소년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바다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바다에서 최고의 뱃사람이 되어 만선된 배를 몰고 자랑스럽게 돌아오는 것. 이것이 세레미아 왕국의 한 구석에 있는 바닷마을 디에 로제닌 사람들의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소중한 꿈이었다. 그리고 방금 헤나에게 핀잔을 던졌던 리에드라는 이름의 소년 역시 그런 것들만이 그의 최고의 꿈이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디에 로제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말야, 이젠 우리 마을도 한 사람의 손이 절실한 때라고. 그렇지 않아도 마을 사람들이 외부로 빠져 나가는 바람에 배를 제때에 거두기가 힘들어."
소년의 핀잔에 헤나는 고개를 숙였다. 헤나 역시 그녀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은 분명한 사실이지 않은가.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는 그녀의 작은 마을에서는 배를 제시간에 거두어 들이는 일, 고기를 잡아 올리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잡아낸 고기를 팔러 나가는 일 등을 위해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지는 않고 있는 마을에는 어린 아이들이라도 바닷일을 조금씩 거들어야만 겨우 살림이 풀려나가는 형편이다. 헤나는 그런 사실들을 확시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을 사람들이 그런 바닷일을 거부감 없이, 아니,보람마저 느끼며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헤나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인데.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달랐다. 그렇게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과는 반하는 것이었지만 헤나는 배에 들어가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다. 모두가 최고의 배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큰 어선도 그녀에게는 큰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냥 바다를 괴롭히는 괴물- 그 이상 그 이하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바다 그 자체였다. 배도 지나다니지 않고, 또 그 어떤 인공물의 손길도 닿지 않은 순수함의 상태, 바로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때때로 아무도 없는 깊고 푸르른 바닷속을 헤엄치면서 그녀는 무한한 환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환희는 배를 타고 물고기나 잡으러 나갔을 때 느끼는 감정과는 전혀 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헤나, 난 그런 대답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니잖아. 좀 더 현실성 있는 변명을 해 보라고."
리에드도 그녀에게 질 정도로 만만한 말솜씨는 아니었던지, 아니면 그녀와 자주 싸워본 경험이 있는 모양인지 곧바로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그리고 발끈한 헤나가 '나는 리에드가 뭐라고 해도 안 갈거야-' 라고 응수하려는 순간 린디아가 둘의 짧은 말싸움을 매듭지으려는 듯 둘의 중간에 끼어들었다.
"둘 다 이젠 그만해.얼마 전에도 너희 둘이 그렇게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 하다가, 결국엔 또 크게 싸웠잖아. 어떻게 오누이 사이에 그렇게 자주 싸움이 나는지..."
린디아의 시기적절한 중재는 최고의 효과를 발휘했다. 헤나는 하려던 말을 마저 집어삼켰고, 리에드는 헤나에게 보내던 불만의 시선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들 둘 역시 이런 류의 싸움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왔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싸움의 둘이 시비걸기 좋아하는 둘의 장난스런 성격에 의해 얼마나 큰 싸움들로 번져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
"나도."
간단한 말다툼은 늘 그랬듯이 일찍 끝났다. 물론 둘이 집에서 무슨 싸움을 또 벌일지는 린디아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알 바 없다고 생각했고 말이다.
∽
"리에드."
"오빠라고 불러."
저녁 시간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리에드를 헤나가 조용히 불렀고, 리에드는 가벼운 말대답으로 그에 응했다. 늘상 입에 달고 다니는 리에드의 불만 제 1호는 헤나가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었고, 헤나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 중 1,2위를 다투는 것 역시 '오빠답게 굴어' 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 둘은 늘상 그렇게 묘한 경쟁관계를 유지하는 오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쟁관계는 그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은 싸우는데 일조를 했다.
"그래,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하고. 올해는 황금나무가 예언하는 게 늦네. 나무가 많이 힘든가?"
그녀의 갑작스러운 참견에 리에드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의 마을에는 큰 황금나무가 있었다. 마을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황금나무는 디에 로제닌의 한 해 운세를 점쳐주는 나무였다. 나무의 웅장한 위용도 위용이었지만 그 나무가 한 해 운세를 대강이나마 알려준다는 점 때문에 더 주목을 받고 있는 황금의 나무였다. 아무도 그 나무의 예언을 어긴 적이 없고, 황금나무도 그를 믿는 사람들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걸 너하고 나하고 알아서 뭐 하겠어? 헤나, 밥이나 먹어."
리에드의 농도가 심한 핀잔에도 불구하고 헤나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인것 같았다. 아마 황금나무 가지를 부러뜨리기라도 했던 모양인 듯 했다. 아니면 이렇게까지 한 가지 질문에 매달릴 헤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리에드는 불안감과 함께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모든 일을 대강대강 넘기는 평소 성격을 생각해 볼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 가지라도 하나쯤 부러뜨린 거야, 뭐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냐. 그냥 말이지..."
헤나는 짐짓 의미심장한 표정으로-여전히 장난스러웠지만 약간 불안한 기색이 곁들여 있었다- 무언가 말을 이어가려고 했다. 헤나의 말은별로 심각한 것이 아닌 듯 했지만, 그런 헤나를 보고 있는 리에드의 표정은 짐짓 굳어져 있었다. 늘 벌어지는 남매의 장난스런 대화를 떠올리게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흡사 중요한 청혼을 해 놓고 그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 표정이라 하면 더 정확할 듯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불청객이라 해도 좋을 것 같은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 한가운데에 끼어들었다.
"리에드, 헤나! 엄마 왔단다! 문 열어!"
꽤나 걸걸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들 자매의 어머니이자 디에 로제닌의 실질적인 어업 회계를 맡고 있는 여자, 제르켄 로제닌이었다. 그녀가 마을의 생계의 절반정도는 책임질 만큼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는 데에는 물론 여느 바다사람 같지 않은 비상한 계산능력과 묘한 지도력도 있었지만,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그녀의 성에서 찾아볼 수가 있었다. 제르켄 '로제닌'. 바로 디에 로제닌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 황금나무의 관리자 역할을 하는 집안인 로제닌의 성을 갖고 태어났기에 그녀가 지금같은 위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로제닌' 성이 같는 작은 권리들은 그녀의 아들딸들에게도 고스란히 내려오게 되어 있었다. 어른이 된다면 리에드는 마울의 황금 나무를 관리하는 중책을, 헤나는 마을 사람들의 실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었다. 대대로 고스란히 내려올 만큼 그녀의 집안과 '그녀 집안의' 이름, 그 권위는 작지만 대단했다. 폐쇄성이 짙은 황혼녘의 마을에서 남아 있는 건 '우리'를 이어갈'이름' 의권위, 그 외에는 없었다.
"응, 나가요!"
때아닌 그녀의 등장에 리에드는 적잖아 당황하는 듯 했고, 반면에 걸리적거리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되는 헤나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곧 열린 문 사이로 제르켄의 닳고 닳은 듯한, 그러니 꽤나 다부져 보이는 얼굴과, 그 얼굴을 닮아 역시나 다부져 보이는 단단한 바닷사람의 몸이 보였다. 제르켄은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을 쾅 닫았다. 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은 짭짤하고 차가운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잘 있었니, 헤나? 안 싸웠겠지, 너희들?"
그녀로써는 매일 그런 식으로 두 남매의 친분전선을 확인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늘상 바닷가에 나가 있곤 하는 그녀에게는 늘 싸우는 그들의 안부를 확인하려면 이런 방법밖에는 없는 것을.
"응응. 엄마, 나 내일 린디아랑 놀아도 돼? 리에드는 또 바다로 나가잖아."
바닷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 옷가지와 머리채를 쓸어넘기고 있던 제르켄은 헤나의 애교섞인 부탁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녀의 하나 남은 딸이 바다로 나가지 않고 홀로 있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였지만, 제르켄은 별 걱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이것이 그녀의 평소 신조였고, 이 신조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헤나 역시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그러면 그녀 자신보다는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바다로 나가게 될 것이다. 비록 등 떠밀려 나가는 것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바다로 나간다는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테니까.
"그러려무나. 리에드, 남은 저녁거리 좀 치워주겠니? 헤나는 일찌감치 들어가 자거라.
리에드도 정리만 하고 자라. 내일은 바쁠게야, 분명히."
그렇게 까만 밤이 해풍(海風)을 머금고 졸음을 불어왔다. 맑은 가을 밤이었다.
∽
린디아는 그날 밤 잠을 설쳤다. 아침에 문득 일어나 거울을 본 그녀는 뭔가 큰 고민을 품은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그런 사실을 고민하고 있는' 그녀 자신이 생각해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새파랗고 서늘한 불안감이 린디아를 휘감았다. 흡사 새벽녘처럼 힘겹게 아침을 기다리는 듯한 푸른 느낌을 주는 감상이었다. 린디아는 거울에 비친 그녀의 초록 눈동자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고민을 계속해 나갔다. 그녀의 진실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마을을 지탱해 주는 축을 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축이 없으면 디에 로제닌 자체가 망그러지지 않는가. 그리고 마을이 뒤틀리는 잔혹한 현실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그녀가 이야기할 진실이 항상 통하지는 않는 법이라는 사실을 어린 린디아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기야, 집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귀족 영애가 아닌 이상 그런 사실을 깨닫기는 아주 쉬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거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잘 때 벗어두었던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그리고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당번은 엄마였지만, 미리 가서 무언가 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엄마는 오늘 비번이 아니니까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에게는 거추장스러울 만큼이나 풍성한 금발이 분명 머리를 묶었는데도 불구하고 몇 가닥 흘러내리고 있었다. 린디아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 금발이 자신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주문처럼 머리를 관통해 갔다. 자신에게 너무나 과분한 황금빛이었다. 분명 자신은 이 금발만 빼면 멀쩡한 아이였는데, 이 머리 빛깔로 인해 주위 마을에서까지 나무나 과분한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금빛, 황금. 그 찬란하지만 한편으로는 추잡한 유혹.싫었다. 자신이 느끼는 진실과 비슷해서 더욱 싫은 것이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자신의 풍성하고 반짝거리는 머리가 싫다는 느낌이 그녀에게는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전에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과분하지만 그 금발로 인해서 린디아는 외모에 대한 약간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분에 넘치기는 하지만 소중하게 갖고 있을법한 보석처럼 느꼈던 자신의 머릿단. 하지만 지금은 탐욕과 위선의 상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빛깔이었다.
"린디아, 언니 요즘 피곤해 보여."
아아, 별 거 아냐. 린디아는 이렇게 말을 돌리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것 같은 이 아이에게는 거짓말을 하기 싫었다. 파란 불안감이 다시금 엄습해 오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리고 헤나에게 아무 일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면 불안감 외에도 뭔가 짐을 하나쯤 더 뒤집어 쓴 것 같은 기분이 들 게 분명했다.
"음, 그럴 일이 좀 있어서 말야."
그냥 짧은 말이라도 진실을, 그리고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의 말들이 왜곡되어 낳는 결과 따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헤나는 외동딸인 자신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녀를 저버리는 것은 린디아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듯 했다.
"무슨 일?"
"그냥, 이런저런."
돌려 말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분명 헤나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해서는 안 돼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그녀에게 사실들을 알려서는 안 된다는 것. 마음이 파도처럼 회청빛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문과 이야깃거리는 금방 바람을 타고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그녀가, 헤나 로제닌이 린디아의 고민을 듣고 그것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맹세한다 하더라도 이미 한 번 입 밖으로 꺼낸 진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람에 실려 간 말이었고, 바다가 듣고 있던 말이었다. 린디아 자신의 말을 듣고 있던 그 어느 자연 풍경이 그녀의 말을 슬쩍 흘려 보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말하지 말자.'
하지만 곧 흔들릴 것 같은 여린 마음이었다. 진실의 댓가는 가혹했다.
"언니, 누구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헤나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린디아에게 물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사심없는 장난기에 한가득 물들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짚은 어린 동생의 추궁이 이어지는 동안, 린디아는 조금씩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려 가던 린디아는 또 하나의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오늘은 황금 나무의 예언일이었다. 린디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
오늘만은 아침 일찍 바다에 나갔던 사람들도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한 해를 점쳐주는 예언이 있다고 아침에 제르켄이 말했지 않은가. 그들은 기대감에 들떠서 배를 항구에 묶어 놓고 속속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예언은 제르켄과 그의 아들 리에드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헤나는 황금나무의 예언을 받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들이 하는 예언은 황금 나무의 힘을 빌어서 하는 것이었다. 황금나무의 기운이 보통 사람의 기운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는지, 제르켄은 예언이 끝나면 하루 정도는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황금 나무의 예언을 받는 것이 그렇게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녀와 그녀의 집안에 진심으로 축복을 기원했다. 로제닌 집안이 예언을 거부한다면 과연 누가 그 예언을 받아들이겠는가.
흰 달빛이 모닥불을 머금어 빨갛게 상기되어 있는 밤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마을 광장에는 큰 모닥불이 빨갛게 타올랐다. 타닥타닥, 까만 재를 남기며 나뭇가지가 타 들어갈 때마다 웬지 모를 온화한 느낌이 그들 모두를 감쌌다. 비단 모닥불의 힘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새로운 1년에 대한 많은 기대감이 들어 있었다. 처녀들은 결혼을 꿈꾸었고, 아낙들은 아이들의 발전을 꿈꾸었다. 남자들은 보다 강력한 평온함을 바랬고, 아이들은 그저 막연한 기대감 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된 소원은 단 하나.
황금 나무가 다음 해에도 마을의 평안을 기원해 주기를.
부드러운, 그러나 각자의 강한 소망을 담은 모닥불이 불그스레 타올랐다.
이젠 예언이 이루어 지기만을 바라면 되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예언이 일어닌 황금 나무를 축복하는 뜻에서, 자신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한바탕 먹고 마시는 잔치가 벌어질 것을 기대하면 되었다. '이 어찌 좋은 삶이 아닌가. 모든 것을 손쉽게 알 수 있고, 우리는 불안감 없이, 단지 노력만 하면 되는데.' 예언을 맞는 순간순간 느껴지는 이런 생각들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무언(無言)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문득 한 아이가 외쳤다. 붉고 강한 욕망들은, 끝을 모른 채 타오르던 모든 희구되는 욕망들은 일제히 시선을 집중했다. 단 하나의 푸른 시선만이 새빨간 화염의 욕망을 억누른 채 담담한 시선으로 수많은 인간군상을 멀찍이 지켜보았다.
"저기, 나무가 빛나요! 예언이 시작돠려나 봐요!"
축제는 걸쭉한 입담과 술꾼 남자들의 주정, 그리고 아내들의 '오늘이니까 봐주지-'라는 애교섞인 잔소리가 뒤섞이며 점점 그 열기를 더해갔다. 리에드와 헤나는 술주정할 아버지는 없었지만 그 대신 꽤나 피곤해 보이는 엄마가 있었던지라 일찍 집으로 들어왔다. 그렇다고 해 봤자 한밤중에 돌아온 것 이었지만 말이다. 제르켄은 어지간히 피곤했던지 곧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리에드와 헤나는 마루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축제가 한창인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나의 마음 속에도 마을의 따듯한 모닥불과 한가지가 되어 타오르는 욕망이 감취져 있었다. 그녀 역시 예언대로 모든 게 잘 되기를 빌었다. 예언은 틀린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헤나가 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만한 예언을 원했지만, 그녀 자신의 은밀한 소망을 알고 있었던지, 바램이 전해진 것인지, 황금 나무는 그녀가 바다에 나가야 한다는 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말의 암시조차 없었다. 언제나처럼 올해도 그래왔고 말이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광장을 지켜보고 있던 헤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닿았다.
"리에드, 린디아가 요즘 무슨 문제가 있나봐. 종일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서 뭔가고민하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하나도 말 안해주려고 해.
그러니까..."
"내가 린디아한테 가서 알아보라고?"
헤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리에드는 다소 못마땅한 얼굴로 헤나를 쳐다보았다.내가 왜 그런 것까지 해야 되는데?' 라는 듯한, 날카로운 표정이었다. 평소의 리에드라면 그렇지 않을 터였다. 린디아의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돕는 그였다. 그리고 헤나가 조금이라도 힘들어 보이거나 무언가 마음 속에 쌓인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 곧장 헤나에게 달려가 수많은 핀잔 속에 은근한 걱정과 염려를 섞어내어 그녀를 안심케 하는 그였다. 헤나는 항상 리에드를 '린디아만 위한다' 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리에드의 표현이 좀 서툴렀다 뿐이었지, 그는 자신의 어린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데 이런 리에드가 그럴 리가 없었다. 이런 행동은 마치 헤나와 린디아 둘 다에게 볼일이 없다는 태도 아닌가.헤나도 이를 눈치챘는지, 리에드를 설득하려고 얼른 말을 꺼냈다. 평소 같다면 쿵쾅거리면서 제 방으로 올라갔을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린디아의 일이 아닌가.
"그게, 내가 물어보면 잘 대답도 안 해준단 말야. 응?"
"내가 물어보면 대답이나 해 주겠니?"
헤나는 리에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리에드는 계속 창밖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헤나는 그의 얼굴에 아직도 한밤중의 예언과 축제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올해가 첫 예언이었고, 곧 있으면 리에드가 예언의 직위를 독점할지도 모르는 노릇인데 오죽하겠는가. 축제의 열정의 그를 사로잡았고말고. 헤나는 이름 모를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녀 역시 '로제닌' 이라는 성(性)에 의존한 묘한 특권의식때문에 자신의 오빠를 질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린디아를 걱정하지 않는 오빠에 대한 성냄과 한 해의 예언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 오빠에 대한 묘한 질투가 어우러진 감정 탓인지, 헤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리에드의 멍한 표정은 단순히 축제에 빠져 있다고는 해도 조금 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그런 걸까, 린디아의 고민을 들어 달라는 누이의 부탁마저 거절할 정도로 예언의 열정이 그를 휘감았던 것일까. 그녀는 무의식중에 그딴 예언은 미쳤다고 생각했다. 헤나는 약간 씁쓸한 기분에 리에드를 무시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투닥투닥. 발소리가 거추장스럽게 그녀를 따라왔다.
리에드는 창가에 고정시켰던 시선을 거두었다. 헤나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무시하는 것 역시 아니었다. 예언의 열정이 그를 강하게 사로잡아 그녀의 말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고, 그녀에게 대답하기 싫게 한 것이었다. 분명 헤나의 말에 뭔가 응수를 하려고 했었는데 그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것도 축제의 폐혜라면 폐혜인 것인가. 리에드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이상 축제와 예언이 주는 힘에 가까이 닿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헤나의 방으로 올라갔다. 방 안은 조용했다. 헤나도 그녀 나름대로 축제가 힘들었던 모양인지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리에드는 헤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일 린디아한테 무슨 일인가 물어볼게. 미안해, 네 말이나 무시하고 그래서. 괜찮아, 그딴 예언따위. 이젠 거기에 너무 휘말리지 말아야겠어. 헤나, 잘자."
잠든 헤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리에드 역시 헤나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냥 자신에게 암시를 걸듯 주워섬긴 말일 뿐이었다. 이런 말들이라도 없다면 불안할 것 같았다. 자신이 황금 나무의 예언의 힘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단지 예감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웬지 불안하고 찝찝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거부한다 하더라도 마음 속 무모한 암시는 맞아 떨어져 갔다.
마음 속 뒤집힌 거짓, 가식은 점차 심화되어 썩어들어간다.
∽
헤나는 그날따라 늦게 일어났다. 웬지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답답한 게 병이 난 것 같았다. 제르켄은 그런 헤나를 보면서 일을 안 해서 생기는 꾀병이라가 핀잔을 하고는 곧 일터로 나가버렸다. 비록 일을 나가기는 했지만 오늘은 아마도 예언의 후유증때문에 일찍 들어오리라.
"오늘은 왜 비번인 사람이 없는 거야?
리에드도, 린디아 언니도, 엄마도...에휴."
헤나는 머리가 윙윙 울리는 것도 마다하고 밖으로 나갔다. 단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엄습해오는 심심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자 한결 나아지는 듯 했다. 바닷바람 때문이었으리라.
눈 앞에는 새파란 가을 하늘이, 고개만 들면 눈동자를 한없는 초록으로 적셔줄 것만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하늘을 바라보는 헤나는 웬지 모르게 위축되는 듯 했고, 불안했다. 그녀는 몰랐지만, 어제 리에드가 느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걱정이었다. 다만 그녀의 경우는 린디아의 이유없는 고민이나 홀린 것 같은 리에드의 태도가 마음 속에 암시와 암시들로 겹겹이 쌓여 나타난 것일 뿐이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이런 걱정의 원인을 찾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결코 원인에 가 닿을 수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여러가지 걱정들이 다 함께 튀어나온 듯 했다.
결국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물론 여러차례 사고의 비약을 거쳐 나온 터무니없는 결론이었다.
"바다에나 가 보자! 그러면 다 잘 되겠지."
며칠만에 나온 유쾌한 결론이기는 했지만.
바다는 맑고 청명했다. 그리고 자신을 퍽이나 반겨주는 듯 했다. 헤나는 실로 오랫만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새파란 철썩거림이 헤나를 휘감아주었다. 그녀가 헤나에게 중얼거렸다. '다 잘될거야-'라고. 헤나는 미심쩍었지만 한 번쯤 그녀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강한 아픔을 묻었다. 저 푸르른 바다에. 그러니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막연한 고민에 내가 슬퍼하지도, 또 고민하지도 않겠어.리에드, 린디아. 둘 다 잘 해나갈거야. 암, 그렇고말고. 둘 다 자신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심각했던 걱정 하나가 바다에 묻혀 저물어갔다.
∽
린디아는 그날 밤도 악몽을 꾸었다. 끝없는 수평선을 죽어라 달리고 또 달렸다. 끝은 없었다. 그녀는 수평선을 내달리며 소리쳤다. '비켜요! 그건 다 가짜...!' 하지만 그녀가 그 소리를 내지르자마자 수많은 돌이 날아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이었다. 디에 로제닌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돌을 던져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괴물이 내지르는 듯한 수많은 괴성들이 귓가를 날카롭게 찢어놓았다. 린디아는 소리질렀다. 다 멈추라고. 진실은 여기에 있다고... 그 순간 그녀의 황금 머리칼이 악몽의 빛마냥 차갑게 빛나며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에 말려들었다. 그 둘은 하나가 되려는 듯 서로를 끌어당기며 몸부림쳤다. 둘다 티없이 풍성한 빛을 뽐냈다. 그 둘 모두 가식과 허영만이 어우러진 추한 금빛이 되어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그리고 깨어났고, 또 외쳤다.
"아냐, 그게 아니라고!"
여전히 유령의 눈동자처럼 새파란 불안이 그녀를 감돌았다. 축제와 예언의 밤이 지난지 무려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동안 별다른 일들은 없었다. 다만 리에드가 그녀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뭔가 고민이 있으면 얘기해달라고 한 것 밖에는. 그들 남매에게는 언제나 고마웠다. 지금처럼 큰 고민이 있는 상황에서 부모 외에 믿을 사람은 그들 남매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를 감싸주겠지. 집안이던, 상처던 다 잊고서. 헤나와 리에드 남매의 생각을 하니, 마음을 잔뜩 차지하고 있던 시퍼런 먹구름이 조금은 밝게 걷히는 듯 했다. 린디아는 순간 결심했다. 리에드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청해보기로 했다. 뾰족한 수는 없어도 위안은 되겠지. 곁에 있어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 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
다음 날 아침이었다. 바다로 나가는 배가 채 떠나기 전, 끼룩거리는 소음 속에서 린디아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았다. 리에드는, 린디아의 고민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아무런 표정 없이 죄다 들어 주었다. 마음 속에 잠긴 새빨간 욕망을 한치도 드러내지 않은 채, 리에드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먹는 작은 요정처럼 린디아의 모든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런 말 없이 배를 탔다. 같은 배는 아니었다. 리에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린디아는 그가 없어진 것에 적잖이 불안해 했다.
낮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여느 때와 다름 없었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리에드는 집에 돌아오질 않았다. 밥까지 다 해놓은 상태에서 그가 오질 않다니. 헤나는 웬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집에 일찍 돌아와 리에드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제르켄은 그가 돌아오지 않자 신경질적으로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헤나는 저녘밥이 다 식는 것을 보고서는 울화통이 터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왜 리에드가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다만 엄마와는 다르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말썽쟁이이자 사고뭉치, 그녀의 제일 경쟁상대였던, 그녀 생각에는 어리디 어린 오빠를 걱정했다. 리에드는 장난이 심하고, 나가 노는 걸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늦게 돌아오지는 않았다. 불안함이 점점 더해가자, 남은 것은 불안함을 넘어선 신경질 뿐이었다. '네 오빠 돌아오면 곧장 나한테 오라고 일러-'라며 포기해 버리고 방으로 들어간 엄마와는 달리, 헤나는 끝까지 리에드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는데,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였다. 늘 싸우기는 했지만, 그만큼 속정도 깊었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발끝으로 시린 방바닥만을 연신 비벼대었다. 차가운 감촉이 조금이니마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들이쉬기를 반복했다. 밤의 새카만 정적이 그녀의 오빠를 빨아들여 그녀가 가 닿지 못할 곳까지 끌고 갈 것만 같은 느낌이 엄습했다.
그러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수없이 고민하고, 그가 어디 있을지를 상상하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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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나는 퍽이나 아플 것 같은 자세로 선잠을 자고 있다가 깨어났다.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 깨어난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끄러운 외침과 고함, 그리고 울음소리와 신경줄을 뒤흔들 것 같은 수많은 말의 조각들이 헤나의 귓가를 파고 들어서, 그녀는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헤나! 헤나!"
응, 알았어...고개를 흔들며 잠을 쫒은 그녀는 문득 리에드가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은 것을 생각해 내고는 질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 오빠에게 모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불안했다. 지는 일주일여를 지속되온 불안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단 하나의 길밖에는 없었다. 빨리 일이 터져버리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안 그러면 작은 마을에서 죽 살아오면서 그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이 새로운 불안감에 가슴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디에 로제닌에서 사는 동안 여태껏 이런 불안감은 없었다. 예언을 이루게 해 주는 황금 나무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에도 황금 나무는 아무 일 없을것이라 예상했었는데, 그런...데?
헤나의 상상을 깨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나! 린디아가 죽었어!"
음, 그래, 죽었다고?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흔히들 말하곤 하는, 그런 머릿속에 햐애지는 듯한 느낌조차 없었다.현실같지 않은 꿈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필요 없는 꿈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다. 에이, 거짓임이 분명한데. 꿈 속인데 뭐가 좋아 굳이 신경을 쓴담.
그렇지만 이제 귓가에 들려온 것은 어떤 형태를 띄고 어떤 목소리와 어떤 억양을 지니던 확실한 죽음에의 도장을 찍는 언어들이었다.
"진짜야! 근데, 시체를 건드리면..."
"헤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말해봐! 넌 '로제닌' 이잖아!"
"엄마도 안 믿겨진단다. 하지만, 그렇지만...아냐. 빨리 나가보자."
그리고, 그리고 수많은 말들 속에 짙게 묻어나 있는 죽음의 흔적들. 꿈이라면 이렇게 생생하게 배어날 수 없을 감정들.
언니, 언니는 정말 죽은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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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이끌려서 바다로 나갔다. 헤나의 짧은 단발이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휘날렸다. 린디아의 죽음을 부정하려고 눈을 꼭 감고 있던 헤나는 바닷가에 다달아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진실을 보았다. 그렇게 그녀에게 친절했고, 죽기 며칠 전부터 그렇게 고민했던 언니. 그녀는 죽어 있었다. 쓰러져 모든 것이 흙과 하나로 보일만큼 생동감 없는 육체만을 남기고 혼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죽기 전까지 헤나가 그리도 칭찬해 마지않던 풍성한 금발은 이미 흙에 뒤섞여 황토빛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헤나는 속으로 그런 말들만을 되새겼다.
린디아 언니는 정말로 죽은 걸까. 글쎄, 만져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을 거야. 안 믿겠어. 라는 말들을.헤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건드려 보려고 했다. 그녀의 차갑게 식은 피부에 손이 가 닿는 순간 꿈과 현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렵지만 확인해 봐야 하는 일이었다. 꿈에서라도 린디아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작고 가느다란 손이 막 린디아의 뺨에 가 닿으려는 순간 수많은 손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투박한 손이 그녀를 막았고, 가느다랗고 긴 손이 그녀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그리고 미처 그녀를 제지하지 못한 남아있는 많은 손들은 제각기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아무도 린디아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헤나."
늘 듣던 목소리가 그녀를 잡고, 막아선 손들을 뚫고 들려왔다. 헤나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녀의 마찬가지로 린디아를 그렇게도 좋아했던 오빠의 목소리.
"리에드! 어떻게 된 거야? 응, 리에드...말해봐!"
마지막 희망이었다. 잠에서 깬 그녀를 끌고 여기까지 데려와서 린디아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보게 한 주제에 두 손으로는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들. 그리고 린디아의 시체를 아무도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 그 태도. 이런 모든 것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리에드밖에 없어 보였다.
"린디아를 건드리면 안 돼. 어젯밤에, 난 하루종일 황금 나무에게 붙잡혀 있었어. 그리고 예언을 들었어. 이런 일은 늘 있는 일이 아니라 좀 불안하긴 하지만, 예언은...그래. 아마 진실일 거야."
리에드의 차가워진 목소리는 예언의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손들과, 그 손들의 주인들의 입들이 예언을 되뇌었다. 헤나의 귀에는 한 목소리로 외치는 주문같은 예언이 맴돌았다.
"한 사람이 죽을 거야. 그 사람은 황금나무를 없애고 혼자 차지하려 했지. 그 나무를 베어 버리려 했어. 그래서 벌을 받고 죽은 거야. 시체를 건드리는 사람 역시 일평생을 바다가 없는 땅에서 떠돌게 돼."
헤나는 쓰러졌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 앞에는 희고 검은 손을 지나쳐 겨우 드러나는 린디아의 웃음을 머금은, 하지만 묘한 조소처럼 느껴지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눈조차 감지 못했다. 웃음기와 조롱을 동시에 품은 초록빛 눈이 헤나를 향하는 순간, 헤나는 쓰러져 있던 자세 그대로 정신마저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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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지 본 것은 리에드의 얼굴이었다. 그는 꽤나 초췌해져 있었다. 아마 그녀도 그와 같을 것이리라.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헤나는 문득 리에드가 들었다는 예언을 생각해내고는 씁쓸하게 웃음지었다. 그야말로 정녕 힘든 사람이었겠지.
그런 예언을 듣고, 그걸 말해야만 했으니.
"헤나."
묻고 싶은 건 단 하나. 린디아가 왜 죽었던 좋아. 하물며 그녀가 실제로 황금나무를 탐했다 하더라도 좋아. 단 하나만, 그것만 알면 돼.
"언니는, 묻혔어? 아니면 아직도 그 바닷가에 홀로 쓰러진 그 모습 그대로야?"
묻히지 못한 새파란 영혼은 아무곳도 갈 수 없어.
"내가 묻었어."
그녀는 리에드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느꼈다. 아아, 그랬던 거야. 그만은 린디아를 저버리지 않았어.
"고마워."
"어쩔 수 없이 약식으로, 바다에 묻었어. 쉿, 엄마한테도 말하지 마."
무언가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려는 헤나를 리에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지했다.
"물론."
"아, 그리고 이거 이제 네가 가지고 있어.
안 그러면 누가 언제 태우거나 녹여 버릴지 몰라."
린디아가 그렇게 소중하게 목에 걸고 다녔던 펜던트였다. 황금빛이 반짝이고 보석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아름다운 펜던트. 황금 나뭇잎이 여전히 아름답게 박혀 있는 펜던트. 눈물 한 방울이 황금빛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헤나는 그 이후로 그 사건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그랬다. 헤나는 린디아의 유해나마 편하게 쉬게 해 주고 싶어서였고, 마을 사람들은 그 일을 단지 재수가 없었던 것으로만 여겼다. 예언의 여파는 린디아 한 사람에게밖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부모는 무사했다. 아니, 부모역시 린디아를 없는 자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리에드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가 단지 바닷속으로 쓸려 들어갔을 뿐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물론 믿었다. 그의 말에는 단 하나의 하자도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상 마을 사람들 중에 린디아의 죽음과 관련된 사실을 하나라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그녀의 시체가 바다고 흘러들어가 버린 것이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바다가 가끔씩 미친듯이 요동친다고 생각했다. 실상, 그녀가 죽은 그 날 이후로 바다는 일주일에도 너뎃번은 미친듯이 요동쳤다. 거센 비를 동반한 높은 파고가 이성을 잃은 괴물의 몸부림처럼 강하게 밀려오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날의 일을 접어야 했다. 그런 파도가 몰아칠 때마다 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바닷물과 빗물등에 절어버린 옷가지를 쥐어짜며 제각기 수군거렸다. '그 애 때문에 바다가 노한 거야. 이젠 수입이 더 줄겠어.' 라고.
어느 날 헤나는 자신의 집 창가에서 흘러가는 세월을 관망하며 시간을 보냈다. 바다는 아무 일도 모르는 것 같이 늘 푸르르기만 했다. 어찌 보면 밉살스럽기까지 한 푸르름이었다. 분명 바다는 그녀를 안심시켰는데, 그녀에게 마음을 차분히 하라고 했는데, 그 다음날 린디아는 죽었어. 헤나는 린디아와 함께 있었던 그 날의 바다를 떠올렸다. 순간 그 때의 상황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분명 그녀의 죽음 몇일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린디아에게 비번인지 아닌지를 물었었다. 그때는 리에드도 같이 있었지. 아아, 그 때의 일이 먼 나라의 아득한 꿈만 같았다.
그 날 이후로, 자신이 리에드에게 자신이 황금 나무의 가지 하나를 부러뜨려 상처를 입혀놓았다고, 그래서 나무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차마 말 못한 그날 밤 이후로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너무나 짧고 빠른 시간들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불과 일, 이주일 뿐이었는데 이 시간이 이렇게도 크게 혹은 작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린디아의 자리가 그 간격과 깊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소중했기 때문일까.
숨을 깊게 들이쉬고, 또 내쉬었다. 잊으려 하면 잊게 될까.
짠내가 물씬 풍기는 바닷바람에 쓸려 작은 바닷가 마을의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15년. 아이가 어느 새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바쁘게 살아가고, 소중한 사람이 떠나가고, 하늘이 15번은 변해갈 수 있는 시간. 기억 속의 쓰라림을 잊고 살아가기엔 너무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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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어디 갔어요? 오늘 비번이라고 들었는데?"
"아아, 잠깐 옆 마을에 갔지요. 뭔가 사러 갈 것들이 있어서."
옆집 아주머니가 투덜거렸다. 밖에 나갈 일이 있다면 진작에 말해주지- 라며 투덜거리는 품새를 보아하니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나가자 헤나는 미처 치우지 못했던 옷가지들을 모아 주섬주섬 빨래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너무나 바빴다. 그녀는 여전히 바다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그만큼 집안일은 늘어났다. 시간은 두 아이들 돌보는 데에 거의 다 들어갔고, 그나마 남는 시간들은 고작해야 빨래나 식사준비에 쏟아부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 생각한다거나 여유를 부린다거나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바빴다.
그 때 방안으로 들어선 둘째 딸아이가 헤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 오늘 리에드 삼촌 오는 날 아녜요?"
아아, 그렇지. 오늘은 오빠가 오는 날이었지. 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헤나는 자신에게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 준 둘째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곧 작은 공상에 빠져들었다. 무려 10년만에 마을로 돌아오는 리에드의 모습이 궁금했다. 자신은 여전히 바다에도 나가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사람이 되어버린 인어' 라는 핀잔아닌 핀잔을 받으며 살고 있는데, 늘 내게 그런 류의 핀잔을 던졌던 그는 과연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은 단 하나. 십년 전에 그가 '내륙으로 나간다' 고 했던 사실뿐이었다. 그는 예언대로, '그녀'의 시체를 만지면 받게 되는 그 재앙을 고스란히 받아 10년 전 어느 날 외지로 나가 버렸다. 그것도 그가 살던 그 바다와는 전혀 상관 없을 듯한 저 척박한, 바다내음도 없는 내륙으로. 이제 늙었으니 그 푼수기는 벗었는지, 무엇보다도 잘 있는지, 헤나는 갑자기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그가 어렸을 때에는, 나와, 그리고 린디아 언니와...!
린디아의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가슴 부근이 둔중한 망치로 내려친 것 마냥 아파왔다. 헤나가 늘 그녀를 떠올리며 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보았던 시체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예언은 너무나 잔혹했다. 그래서 어린 헤나는 스스로 모든 것을 지웠다. 아주 가끔씩, 아주 가끔씩 린디아를 떠올렸다. 그때마다 주체할 수 없을 그리움으로 가슴이 쓰려왔다.
괜찮아, 헤나.
헤나는 스스로를 다정하게 달랬다. 린디아 언니는 잘 있을 거야. 내가 사랑하는 그 깊은 바닷속에서, 바다의 영원한 푸르름과 함께 잘 자고 있을 거야. 적어도 리에드가 묻어주었잖아? 그러니 괜찮아. 더군다나 린디아의 펜던트는 내가 갖고 있잖아. 언니는 잘 있겠지. 분명히. 린디아의 상상에 빠져들면 곧 힘들어질 뿐이었다. 더 깊은 상념에 젖어들지 않기 위해서 헤나는 곧 빨래거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세월은 그녀에게 작은 지혜를 주었다. 일에 빠져들면 자잘한 상상들은 곧 잊혀지게 마련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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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드, 오랫만이야!"
예전보다 좀 더 성숙해진 듯, 좀 더 진지하고 슬픈듯한 표정으로, 하지만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장난기를 눈 속에 지닌 채, 리에드가 돌아왔다. 헤나는 오랜 삶을 외지에서 지낸 오빠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놈의 오빠 소리는 왜 안 하는 거니?"
"오빠답게 굴어."
이 말을 던져놓고 헤나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늘상 그들 남매가 고정적으로 쓰며 싸우던 말들이었다. 그리고 린디아는, 린디아 언니는 그런 그들을 말리곤 했지. 헤나는 리에드가 돌아온 이상 린디아와 그와 자신, 그렇게 셋이 함께 있던 기억도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오빠가 돌아옴에 따라.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헤나와 그녀의 작은 딸은 식사준비에 바빴다. 여기저기 마을을 둘러보고, 엄마와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온 리에드는 헤나를 닮은 그녀의 작은 딸을 보면서 정말로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다. 그 역시 린디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린디아가 했던 말들, 린디아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 그녀만의 비밀을 생각한 리에드는 초월한 사람마냥 싱긋 웃었다. 마음이 저려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슬퍼할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린디아의 죽음과 그에 관련된 일들이 겉으로 드러낼만큼 가벼운 슬픔이었다면 오늘 모든 것을 털어버리러 헤나에게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 밤에는, 마음의 짐을 전부 털어버릴 참이었다.
헤나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고 자신은 다시 외지로 돌아가리라.
아무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모르고 그저 섞여 살 수 있는 그런 외지로.
"식사들 해요, 다들!"
헤나의 활기찬 외침에 리에드는 가슴 속에 앙금처럼 머물던 모든 것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오늘 밤이 지나면 끝이야. 리에드. 잘 해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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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같은 가을 밤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그들에게 찾아오는 가을의 슬픈 기억과 그 기억이 빚어내는 처연한 빛깔만은 여전했다.
린디아가 죽은 그 날, 그 때도 가을이었고 마찬가지로 푸른 바람이 불어왔었지. 헤나는 문득 리에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지난 10년 간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였다. 그렇게 친했던 셋의 기억 중 하나의 기억을 지우기는 쉬웠을까. 헤나는 지난15년 동안 유일하게 늘어버린 습관인 한숨을 또 한 번 푹 내쉬었다.
헤나는 리에드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어 보이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헤나는 자신의 얼굴도 그렇게 아무런 표정 없이 굳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표정 없는 그녀의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지난 10년 간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였다. 그렇게 친했던 셋의 기억 중 하나의 기억을 지우기는 쉬웠을까. 헤나는 지난15년 동안 유일하게 늘어버린 습관, 한숨을 또 한 번 푹 내쉬었다. 오빠에게 그간 어떻게 지내 왔는지, 내륙 지방에서 그 짙은 향수에 어떻게 견뎌 내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간 어떤 기분으로 지냈는지.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린디아가 죽은 후 그의 마음만은 알고 싶었다.
집 밖으로 나온 둘의 발걸음은 바닷가로 향했다. 리에드가 먼저 바다로 가자고 제안한 일이었고, 여전히 바다를 좋아하는 헤나 역시 두말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달빛이 바다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축제 때마다 보였던 그 달처럼 밝은 빛을 가득 품은 달이 은은히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닷가 모래사장을 향하는 둘의 발자욱이 모래 위에 타박타박 쌓여갔다. 모래 속에 찍힌 크고 작은 발자국의 흐름은 그 때와, 린디아와 함께 있던 때와 거의 같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다만 곡선이 한 줄기 줄어들었다는 것뿐이었다. 리에드와 헤나는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리에드가 말을 꺼냈다. 그로써는 이 마음의 짐을 얼른 털고 싶을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이 마을에서 계속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제는 짐을 털어놓아야 할 시간이었다. 그 짐을 털지 못하면 아무 일 없이 이 마을에서 살아도 결코 행복해질 수는 없었다. 리에드는 린디아의 옛 얼굴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전히 십대 후반에 머물러 있는 그녀의 얼굴은 시간이 아무리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어찌 생각해 보면 죄책감이 엄습하는 그녀의 옛 모습이었다.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그렇게 어릴 적 모습만으로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을 터였는데. 리에드의 이야기가 조용히, 바람의 흐름을 타고 흘러갔다.
"헤나. 이제부터 오빠얘기 잘 들어. 그러니까 이야기하는 도중에는 아무 말 말아. 린디아를 죽인 건 나야. 여태까지 황금나무- 내가 가고 난 뒤엔 아마 엄마 혼자 했겠지-의 예언들은 우리가 멋대로 지어낸 거였어.엄마하고 내가 말야. 근데 린디아는 그 예언이 가짜라는 걸 알았어. 어떻게 알아낸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예언의 거짓을 알고는 그 사실을 내게 말했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어. 나는 너무 무서워서, 린디아를 죽여버린 거지. 바보처럼, 그때는 그녀의 입을 막아야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다른 생각따윈 들지 않았으니까 말야. 그 중 미래를 내다보고 한 예언따위는 없었어. 어떻게 보면 참 우스운 일이지. 그 예언들이 거의 다 맞아 떨어지다니. 설령 예언이 틀리다 해도 사람들은 그 예언을 위해 자신들이 노력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스스로 암시를 걸어버리니까, 우리의 예언이 의심받을 알은 없었어. 사람들은 일단 무언가 예언이
주어지면 거기에 맞춰서 발버둥치는 경향이 있거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도, 아무것도, 예언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말은 의미 없는 단어들의 조합에 불과하다고 믿었고, 그가 말한 수많은 사실들은 죄다 농담일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에게 거짓 암시를 얼어보기도 전에 강렬한 진실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헤나 네가 들었던 것이 다 맞다고. '리에드가 린디아를 죽였다. 예언은 거짓이다. 그리고, 지난 세월은 쓸데 없는 믿음에 흘려보낸 날들이었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울음이 밀려왔다.헤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록 짧았지만, 리에드의 그 말만으로도 15년 전의 그 모든 일,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일이었는지 모두 자세하게 알고 싶었다. 린디아가 죽은 이후로 호기심이라던가, 그 밖의 모든 것들, 그리고 린디아에 관한 모든 자잘한 기억들을 지웠던 헤나였다. 그래서 그 옛날의 버릇들은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다. 남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신경도 쓰지 않으려고 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린디아 언니의 모든 기억들도 지우려고 그렇게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래서 헤나는 결국 속으로 암시를 걸었다. 린디아는 착한 언니였지만 뭔가 잘못을 저질렀던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죽은 거라고 말이다. 헤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서히 린디아를 잊어갔다.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린 헤나의 가슴은 '친한 사람의 죽음' 이라는 명제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당할 수 없었다.
리에드는 울고 있는 헤나의 모습을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다음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헤나에게 힘든 일이기는 했지만,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헤나는 리에드에게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에서 더 많은 말들이 나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이 될게 뻔했다. 리에드는 더 많이 번뇌하고, 헤나는 리에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헤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 본 오빠의 모습은 여태까지 그녀가 보았던 장난스러운 리에드 로제닌의 모습이 아니었다. 결코 오빠를 비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다. 헤나는 그가 불쌍했다. 그의 장난스러운 성격과 매사에 시원시원했던 수많은 행동들이 떠오르자 더욱 그가 비참하게 느껴졌졌다. 슬펐다. 오빠가 이렇게 많은 것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냥 좋게좋게 살았던 그의 성격이 꾸밈이었고, 치장이었다는 걸까. 단 하나뿐인 동생에게도 숨길만큼 그 따위 예언의 가치가 컸다는 말인가.
순간 수없는 환멸이 헤나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 작은 바닷가 마을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과 가식이 판을 치고 있는 걸까. 그녀 자신이 모르는 또 어떤 진실이 추악하게 감춰져 있는 걸까. 헤나 로제닌, 이렇게 평화롭게만 잘 살다니, 넌 바보였어. 린디아의 시체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그런 거짓예언을 왜 믿었던 걸까. 그건 다 거짓이었는 걸,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무지함을 어던 것으로 보상할 것인가.
실패한 인생이었어. 이 마을에 살았던 오빠와 나, 그리고 린디아 언니도.
헤나는 목에 걸었던 펜던트를 확 움켜쥐었다. 순간 15년의 세월에 이미 닳올대로 닳고, 또 그 찬연했던 황금빛이 바랜 작은 목걸이에서 보석들이 떨어져 헤나의 손가락 사이로 주르르 흘렀다. 여태껏 린디아의 유품이랍시고 소중히 간직해 왔던 이 황금빛추억마저 밉기 그지없었다.
'색이 없어져 버렸으면. 이딴 쓰레기같은 황금빛 따위.'
"린디아한테 미안하기는 해. 하지만, 그 상황에서, 아무도 시비를 가릴 수 없었겠지."
"괜찮아, 리에드. 뭔가 변명할 필요 없잖아.
린디아 언니의 이름이 이제 두 번 다시 내 기억 속에서 쓰라린
금기가 돼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위안이야.
그거 알잖아. 우리 이제 많이 나이들었다는 것.
그래서, 그래서...나는 이제
리에드가 힘들어 하는것에 대한 이유도 알아.
우습지? 내가 리에드를 위로하는 게 말야."
헤나는 그를, 자신보다 나이 든 오빠를 다독거렸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녀가 저주할 대상은 린디아 언니를 죽인 그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저주할 대상이란 디에 로제닌이라는 마을의 폐쇄성 그 자체와 마을의 그 폐쇄성에 의존해 근근이 살아가는, 진실조차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 뿐이었다.
"그거 알아? 나 이곳이 싫어졌어. 이상하지.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인데."
"나도 마찬가지였어. 십년 전의 나도. 그래서 마을을 떠난거야."
헤나와 리에드는 비로소 마음의 합치를 느꼈다. 어렸던 두 남매는 십여년 동안 헤어져 있으면서 서로를 그리워할 새도 없이 바쁘게 살며 어른이 되어갔다. 두 남매의 문제에 린디아의 기억이 덧씌워져 그들에게 서로를 추억할 여유를, 서로를 오누이로 느끼며 그리워할 여유조차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헤나는 리에드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잃었던 많은 기억들이 따스하게 맞잡은 손을 통해 속속 그들의 마음 속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싸웠던 어린 자매. 바다를 사랑하던, 인어같던 소녀와 그 소녀를 늘 핀잔했던 어린 오빠, 지금은 짧게 잘랐지만 한때는 가죽끈으로 묶고 다니던 소년의 머리칼. 그리고 그런 기억들이 차차 제자리를 찾아갈때쯤, 푸른 해풍에 섞여 있던 얽힌 두 손이 맞잡은 남매의 손등 위에 살포시 얹혀졌다. 하지만 리에드와 헤나 모두 누군가가 그들의 손을 부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손등을 부드럽게 덮었던 그 작은 두개의 손은 너무나 빨리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미풍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처럼 부드러운 여운만을 그들의 가슴속에 남긴 채.
다음 날 리에드는 다시 디에 로제닌을 떠났다.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딴 내륙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마을을 떠나갔다. 헤나는 마을 밖까지 그를 전송했다. 그녀의 오빠가 부러웠다. 적어도 그는 10년 전보다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이제 그녀보다는 약간 자유롭지 않았는가. 헤나는 그런 그를 진심으로 축복해주며 마을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어젯밤,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급작스러운 일이 닥칠 때마다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러감을 느끼곤 했다. 린디아가 죽던 그때 그 날도 그랬고, 어젯밤 역시 그랬다. 리에드는 그녀에게 무수히 많은 후회와, 사과를 던졌지만 헤나는 그 말들이 다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리에드가 했던 사과의 첫마디와, 또 그에 따른 헤나의 대답, 괜찮다는 그 첫구절 뿐이었다. 다른 것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환각을 겪듯이, 신기루를 들이마시듯이, 그런 것들은 다 사리지고 그가 린디아를 죽였다는 그 말과, 그 때의 단 몇 분밖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헤나는 쓸쓸히 고개를 가로젓고 또 한숨을 쉬었다. 왜 다른 것들은 기억나지도 않는 걸까. 소중한 오빠와의 추억, 그 한 장을 장식하기엔 충분한 기억들인데. 하지만 헤나는 웬지 모를 충족감을 느꼈다. 마음속에 따스히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람속에 실린 지난날의 잊혀진 기억 역시 느껴졌다.
가을날에는 맞지 않는 까만 여름 샌들 사이로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그것은 그녀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바로 그 바다의 바람이었고, 바로 그 푸르름의 향내였다. 하지만 웬지 모든 진실을 안 지금, 헤나는 그 바다가 못내 미웠다. 린디아의 상처를 삼켜 버리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바다, 그녀가 어릴 적 품었던 고민을 '잘 될 거야' 라는 무책임한 말로밖에 표현해줄 수 없었던 그 무지함,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황금 나무의 그 썩어 문드러진 예언이 가장 많이 향했던 곳이라는 그 많은 사실들.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헤나의 오감(五感)을 쑤셔대었고, 괴롭혀댔다. 그녀는 이제 바다가 싫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잊혀진 기억들 때문에 그 바다를 그렇게도 소중히 여겼지만, 진실을 알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은 그녀에게 바다의 존재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그녀 전 생애에 걸친 바다에 대한 맹목적이고 순수했던 애정은 이제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그 존재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고. 애당초 네가 바다를 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지만 그렇게 작은 목소리는 곧 잊혀졌다. 애증으로 가득 쌓인 십여년의 기억은 그런 작은 목소리를 무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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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냐. 그저 좀 머리가 아플 뿐인걸."
집으로 돌아온 헤나는 머리가 아파오고, 구역질이 나려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딸의 진심어린 걱정을 무시한채 비척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자신에게 외치는 것 같았다. 린디아인지, 리에드인지, 아니면 자신의 무의식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었다. 가 버리라고. 너 따위는 죽어버리라고. 린디아와 리에드, 두 사람 다 불행하게 살았으니 너도 이젠 불행해 지라고. 그리고 그런 죄책감에 사로잡힌 헤나는 결국 원인 모를 병에 사로잡혀 앓게 되었다.
한 달 뒤, 리에드를 배웅하고 돌아온 지 근 한 달 뒤 헤나는 죽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던 날 밤, 그녀는 자신의 유해를 바다에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라도 하면 그녀가 그렇게도 아끼던 바다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에서 나온 말이었고, 또한 린디아와 가까운 곳에 가고 싶다는, 그런 죄책감이 섞인 소망이기도 했다.
다음 날 사람들은 바다에 회청빛 재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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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리고 이제 시간은 흘러흘러 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살았던 마을 이름은 디에 로제닌이다는 사실도, 그리고 이 펜던트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얽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 셋중의 누가 나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어쨌든 내 이야기를 듣는 듯한 따스함과 불안감이 동시에 교차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조용히 이야기를 마무리지었고, 우리는 공터에서 벗어나 서서히 집을 향했다. 수정숲의 반짝거리는 투명한 광채가 달빛을 타고 은은히 빛났다.
"그래서 린디아와 헤나는 둘 다 바다에 묻혔단다."
"리에드는요?"
"그 애도 십여년 후에 죽었다고 하더라. 13년 정도 뒤였지.
사실, 리에드 때문에 마을의 비밀이 밝혀질 수 있었지.
리에드가 죽기 전에 편지를 써서 보냈거든.
사람들은 처음에 그와 그의 가족을 무지 욕하고 비난했지만,
결국에는 그 사실-황금나무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이
마을 전체의 잘못이라는 걸 알았지.
그래서 황금나무를 무너뜨렸단다. 다시는 그런 과오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이지."
으응, 그랬구나. 나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마치 내 마을 일인 양, 모든것이 다 잘되었다는 사실에 적잖아 안도했다. 엄마와 나는 수정숲을 걸어 나왔다. 아무 말 없이 숲 밖으로 나서는 순간, 엄마가 입을 뗐다.
"로티스, 그거 아니?
이 펜던트, 결국엔 다시 린디아의 집안에 돌아왔단다.
그래서 엄마가 이 펜던트를 가지게 된 거야.엄만 그 집안에서
태어났거든. 근데 놀라운 일은 엄마한테 이 펜던트가
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이 펜던트의 매듭이 조금이니마 풀렸다는 거야.
모든 마을 사람들이 놀라워 했지.
이 펜던트가 너를 알아보는 모양이라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싱긋 웃고 말았단다.
물론,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는 나도 몰라."
나는 피식 웃었다. 엄마의 무책임한 말들은 예전에도 여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중요한 일들을 그렇게나 건성건성으로 넘겨 버리다니. 문득,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엄마에게 황금나무는 그 후에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 보았고, 그녀는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황금 나무는 사람들이 다 베어 버렸다고. 그리고 그런 일들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황금 잎새를 집안마다 하나씩 가져가 보관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엄마는 말을 덧붙였다. 황금 나무와 세 사람, 그리고 린디아의 펜던트에 관한 이야기에 중에서 아직 하나,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말이다.
"기억나니? 네가 어릴 때 이 펜던트를 가지고 잠이 들었잖니.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는 무척 놀랐단다.
펜던트의 매듭이 -나 어렸을 때 이후엔
그렇게 풀려고 해도 풀리지 않던-
풀려 있었거든.
그리고 이 펜던트도 그 때만큼은
얼마만큼은 예전의 빛을 되찾은 것처럼 밝게 보였고 말이야."
흐음, '예전의 빛'이라. 그런 말을 너무나 익숙한 듯 중얼거리는 엄마를 보고 나는 한 가지 의문에 빠져들었다. 엄마는 혹시 이 펜던트가 온전했을 때, 그것을 본 적이 있었던 걸까. 이렇게 익숙하게 예전의, 100년도 더 지난 옛날의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지만 그건 내가 속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혹 엄마가 100년전에 이 펜던트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녀가 그것을 갖고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엄마가 100년 전에 살아 있었다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고 말이다. 아마도 엄마가 이야기를 너무 잘 해서, 그래서 내가 이야기 속에 빨려든 것처럼 생각되어 예전의빛이라는 말이 내 귀에 그렇게 생생하게 들리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엄마와 함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 앞에 도착해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덧 밤이 어둑어둑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갑자기 엄마의 펜던트가 어디에 있는지 적잖아 궁금해졌다. 나에게는 그것을 꼭 찾아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마음에 앙금처럼 남아 있는 의심과 암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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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곧 잠들어 버렸다. 뭐, 아침나절은 내내 일을 했고, 오후에는 수정숲을 산책했으니 꽤 피곤할 터였다. 나는 혼자 밤의 정적 속에서 어둠을 씹으며 무언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쉽게 내려지지 않을 결론이었다. 그게 정말 내 이야기였을까? 그렇다면 다른 두 사람은?
밤이 더욱 깊어오자, 나는 동생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동생은 기분 좋게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내는 숨소리가 정겨웠다. 나는 그의 작은 손에 펜던트를 쥐어주었다. 이 펜던트, 엄마는 모르게 몰래 빼 온 것이었다. 펜던트의 매듭은 이제 한두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때, 진실을 알았을 때 헤나가 뒤틀었던 그 때의 그 상흔들은 이젠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른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엇엔가에 강하게 끌리는 느낌을 받았고, 나도 모르게 동생의 손에 펜던트를 쥐어 주었다. 어린 손에는 다 들어가지도 않을 만큼 큼지막한 펜던트였지만, 웬지 그 펜던트는 동생의 손이 아니면 어떤 곳에도 들어가지 못할 듯 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깰까봐 조심하며 방을 나왔다.
"잘 자.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온 것 뿐이야. 무사히 돌아와줘서 기쁘다는 말."
휴, 이젠 정말 밤이 깊었다. 창 밖에 보이는 밤하늘은 이런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칠흑 비단을 깔아 놓은 듯 까맣게 반짝거렸다. 나는 내 방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가 늘 하시곤 하는 말처럼 이젠 '착한 아이들은 자야만 할 시간' 이 다 되지 않았는가. 무심코 거실 창가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창가에서 하늘거리며 펄럭이는 커텐의 부드러움이 나를 감싸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