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선 선생님! 카페에 글 하나 올려볼까!!
나는! 블로그에 글 하나 올려볼까!!
지난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래 놓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글도 못 올리고, 어느 사이
이렇게 3월에 악수를 청해 봅니다.
만 년
晩 年
어려서 잃었으나 기억할 수 있는 엄마 아빠가 계시고 멀리 있어도 자주 편지를 해 주는 아들딸이 있고 지금까지 한결같이 지내 온 몇몇 친구가 있다. 그리고 아직도 쫓아와 반기는 제자들이 있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비록 오막살이라도 누추하지 않다는 옛 글이 있다. 늙은 아내 탓을 하지만 기름 때는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분에 넘치는 노릇이다. 그리고 긴긴 시간을 혼자서 가질 수 있는 사치가 있다. 젊어서 읽었던 <좁은 문> 같은 소설을 다시 읽어도 보고 오래된 전축으로 쇼팽을 듣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평온을 송구스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 보기도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 본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 피천득
'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 - 중에서
♤ 세계문학전집 469. 2025년 12월 민음사
조 춘
早 春
내게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면 계절이 바뀌는 것이요. 희망이 있다면 봄을 다시 보는 것이다. 내게 효과가 있는 다만 하나의 강장제는 다스한 햇볕이요, '토닉'이 되는 것은 흙냄새다.
이제는 얼었던 혈관이 풀리고 흐린 피가 진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젊음'이 초록빛 '슈트 케이스'를 마차에 싣고 넓어 보이는 길로 다시 올 것만 같다.
- 하략
- 피천득
'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 - 중에서
♤ 세계문학전집 469 2025년 12월 민음사
정월도 지났으니 조춘早春도 지났다.
간밤의 비로 만개한 꽃잎은 좀 떨어졌어도
미세먼지 없는 화요일을 보냈다.
그렇게 일요일을 지나고
월요일 아침, 신문을 펼쳤는데
′먼 데서′
′얼마나 먼 데서′ 왔을지 모를
깊은 시간의 땅, 흙 속에서 움텄을지도 모를 봄, 나비가
교회당 종소리가 다섯 번째 울리면
나는 사과밭으로 달려갈 거예요
그 종소리가 끝나기 전에
사과밭 셋째 줄 여섯 번째 나무 아래 서 있을래요
오세요
종을 여섯 번만 치고
그 종소리가 끝나기 전에
나비는 얼마나 먼 데서 달려오다가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을까요
- 김용택 '나비가 날아오르는 시간'
여섯 번째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달려가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또 여섯 번째 종소리가 울리기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도착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 기적이 허락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나비는 번데기와 애벌레의 나날을 거쳐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 날개를 달았는지도 모른다. 오랜 인내와 얼어붙은 고통을 지나야만 만날 수 있는 계절이 봄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계절. 봄이다.
-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 (시인)
♤ 시가 있는 월요일 {나비의 시간}
- 매일경제. 2026년 3월 30일 월요일
맛과 멋
맛은 감각적이요, 멋은 정서적이다.
맛은 적극적이요, 멋은 은근하다.
맛은 생리를 필요로 하고, 멋은 교양을 필요로 한다.
맛은 정확성에 있고, 멋은 파격에 있다.
맛은 그때뿐이요, 멋은 여운이 있다.
맛은 얕고, 멋은 깊다.
맛은 현실적이요, 멋은 이상적이다.
정욕 생활은 맛이요, 플라토닉 사랑은 멋이다.
그러나 맛과 멋은 반대어는 아니다. 사실 그 어원은 같을지도 모른다. 맛있는 것의 반대는 맛없는 것이고, 멋있는 것의 반대는 멋없는 것이지 멋과 맛이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맛과 멋은 리얼과 낭만과 같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맛만 있으면 그만인 사람도 있고, 맛이 없더라도 멋만 있으면 사는 사람이 있다. 맛은 몸소 체험을 해야 하지만, 멋은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 맛에 지치기 쉬운 나는 멋을 위하여 살아간다.
- 피천득
'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 - 중에서
♤ 세계문학전집 469 2025년 12월 민음사
수 필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 우미(溫 雅 優 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깃빛이거나 진줏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또는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씌어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無味)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폴로니어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도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10분의 1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 피천득
'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 - 중에서
♤ 세계문학전집 469 2025년 12월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