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중세는 원시적인 방식과 세련되고 복잡한 방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수도원 중심의 문화권에서 도시의 성장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성당 중심의 문화가 도래한다. 성당은 많은 수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주인 사람을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갖게 했다.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신의 완벽한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당시 중세의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중세인을 하나로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 종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고딕 양식에 있어서 모든 미술의 목적이 단지 종교의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이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당시의 기술이나 지식 또한 발전하고 있음 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고딕 양식은 특히 성당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평가를 받게 되며 이와 함께 조각, 회화, 공예까지 확대 발전하게 된다. 4세기의 비잔틴 미술에서 중세가 끝나는 시점으로 보는 14세기 까지를 중세로 볼 때 고딕 양식은 중세의 모든 미술 양식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라 하겠다.
1. 건축
기독교의 발전은 예배를 위한 기능과 함께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 내려는 욕구로 교회의 건축 양식은 계속 발전하게 된다. 안정적인 동유럽에서 보다 다변하고 있던 서유럽에서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어 내는데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인들에 의한 성당 건축의 주심 원리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 새로운 양식의 주된 특징은 실용과 실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취하게 하는 원리라고 하는 수직양식의 원리, 건축 기술상의 획기적인 발명인 교차 궁륭이라 할 수 있다. 교차적 궁륭이란 11세기 초 목조로 덮였던 바실리카식 설계로 된 네이브의 천장을 석조 궁륭으로 바꾼 이후 고딕 석조 건축에서는 둥근 천장의 무게가 벽을 붕괴시킬 위험이 있었기에 이의 해결책으로 늑재 를 엇갈리게 가로 질러 놓는 방식이다. 건축가들은 또 궁류형 천장의 아치들을 지탱하는 데 아치만으로도 충분함을 알게 되어 기둥들 사이의 무거운 석벽을 없애고 그 사이사이에 유리창을 끼워 넣기 시작한다. 여기에 외부의 압력을 경감시키기 위해 뾰족아치를 사용하므로 여러 곳에 둥근 천장이 가능해졌다. 성당의 하중은 벽에서 부벽으로 옮겨진다. 이것으로 성당의 정점의 높이의 조절이 자유로와졌으며 고딕 의 특징은 첨탑과 공중부벽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고딕 건축은 첨형아치와 공중부벽으로 쓸모없게 된 외벽을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치장한다. 이로서 돌과 유리로 완성된 성당의 황홀한 구조는 이 전의 로마네스크에서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인간을 압도하고 천상의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고 기독교의 또다른 초월의 세계의 신비감을 하늘의 영광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보다 더 엄격한 구성으로 건축적 완벽성을 지향했고 종교적 신념과 사상을 건축에 옮겨 중세 교회 건축양식을 대성했다. 이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쇠퇴하다가 19세기 고딕 부활 운동이 일어나면서 대학 공중 건물, 상용건물 등의 건축에 이용된다.
2. 조각
이 시기에 나타난 조각 양식은 성당의 양식과 같이 발달하는 데 이는 이전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많은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전형직인 고딕 조각의 발전은 랭스와 방베르 성당 조각들과 함께 13세기 초에 들어서 결실을 맺는다. 작품들 대부분은 고전적인 균형과 자연적인 것에 대한 충실함으로 특징되는 데 로마네스크에서 보여 주었던 육중하고 엄격한 조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영웅적이고 기념비 적인 것으로부터 보다 친밀하고 복잡한 것으로, 과장된 감정 표현이 강조되었다. 연속되는 주름의 흐름과 아름다운 형상으로 발전한 고딕 조각 양식은 15세기 국제적 고딕 양식과 연결된다.
프랑스
로마네스크의 조각보다 더 추상적인 초기 고딕 조각이 남아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조상들의 특징은 원주 자체의 견고한 원통형을 이용 환조 조각의 첫걸음을 내딛었으며 조용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이 조상들의 옷 주름은 금방 흐를 듯 유연하며 그 안에 생생한 육체가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당시의 조각가들이 고대의 전통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해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랭스 성당의 조상은 고전주의가 자취를 감추고 간결, 수직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우미의 양식이 나타나 후기 고딕 양식의 기준이 된다. 최소한 이 시기의 조각가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더욱 감동적으로 실감나게 자기들이 느낀 방식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인간의 감정을 전 시대 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한 점은 이 시기 이후 나타나는 르네상스의 기본원형이 되기에 이른다.
독일
프랑스인으로부터 조각의 전통을 전수받은 독일의 조각가들은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성당 내부에서 조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종합적이고 계획적인 조각으로부터 자유로왔으며 훨씬 개성적인 표현을 구현하였다. 나움부르크 성당의 조상은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그리스도의 매장>에 나타낸 필사본은 인물들의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서의 이야기를 전하되 베끼거나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닌 더욱 감동적이고 생명감을 불어 넣으려 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13세기에 이르러 고딕 조각이 이탈리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이는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알프스 이북보다 훨씬 고대의 전통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의 조각은 덜 고딕적이었는데 고딕적이라고 불릴만한 작가는 니콜라 피사노였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옷주름의 흐름과 성실한 모델링에서 프랑스의 영향과 고대의 전통이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국제 양식
1375년과 1425년 사이에 서유럽에 전역에 퍼진 양식을 말하는데, 주된 특징은 유연한 곡선 형식으로 인위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에 세속적인 상류사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들이다. 이것은 13세기 중반 화려한 프랑스 궁정양식에서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15세기 초까지 번성하였다. 국제양식 조각의 알프스 북부 최대 거장으로 클라우스 슬뤼터의 작품과 알프스 남부의 기베르티의 작품이 있다.
4. 회화
프랑스
고딕 양식에서 회화의 범위는 비교적 제한되어 있었다. 회화로 채워져 있어야 할 성당의 벽면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시대의 채색 사본은 화려하고 도상적인 주제를 표현한 색유리와 자리를 바꾸고 대성당의 건축과 함께 스테인드 글라스도 함께 황금시대를 맞는다. 프랑스의 회화의 중요 위치로 자리잡게 된 이 것은 1250년 이후 대성당 건축이 시들해지면서 사양길 에접어들고 다시 채색 사본이 유행하게 된다.
이탈리아
벽화, 즉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스코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이는 알프스 북부에서 회화가 스테인드 글라스로 대치될 무렵, 이들은 그리스의 전통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교회당에 유리벽을 사용하지 않았다. 프레스코화, 벽면 모자이크, 패널화는 알프스 이남에서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13세기의 비잔틴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작가 지옷토의 출현을 부른다. 그는 프레스코화로 유명한데, 환조라 할 만큼 공간의 깊이감, 원근법, 옷의 유연한 흐름 등은 평면 위에 가장 실감 나게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렸다. 비잔틴 회화를 이어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하게 그린 화가 둣치오는 템페라로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한 장면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원근법이 사용되었으며 시정 넘치는 친밀감과 사실적이고 깊이감 있게 공간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 마르티니, 로렌쳇티 형제의 그림이 있다.
국제양식
국제 고딕 양식의 첫단계는 지옷토와 둣치오의 이탈리아 자연주의에 프랑스 시모네 마르티니의 우아함 을 혼합시키고 후기 로마 회화의 고대 양식을 가미시킨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플랑드르 예술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브뢰데들람의 <신전에서의 경배> 는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패널화를 그린 랭부르 형제는 달력의 세밀화가 나타난 최초의 그림이기도 하다. 국제양식회화의 제 1인자인 젠틸레 디 파브리아노는 부드러운 음영과 옷주름의 유연함, 주의깊은 동,식물의 관찰은 빛이 형상이나 색채로부터 독립하고 있으며 빛의 중요성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트르담대성당
프랑스 초기 고딕성당의 대표작.
원어명
Cath
drale Notre-Dame de Paris
구분
대성당
소재지
프랑스 센강 시테섬
건립연도
1163년
건립자
M. 쉴리
건축양식
고딕양식
센강(江) 시테섬에 있는 성당이다. 공사는 1163년 주교 M.쉴리의 지휘 아래 내진(內陣) 건축이 시작되었고, 성왕 루이 치하인 13세기 중엽에 일단 완성되었으나 그 후에도 부대공사는 계속되어 18세기 초엽 측면 제실(祭室)의 증설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어 19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늑골교차궁륭(肋骨交差穹
)으로 덮인 길이 약 130m의 장대한 신랑(身廊)을 중심으로 하는 오낭식(五廊式)의 웅대한 건축으로, 신랑 양측의 열주(列柱)·트리포리움(명층 아래 연이은 층)·명층(明層:높은 창)으로 된 명쾌한 3층 구성에서 그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단정한 서쪽 정면에는 최하층에 《최후의 심판》의 부조로 유명한 중앙 출입문 등 3개의 출입구가 있으며 여기에서 《제왕의 상》이 늘어선 가로가 긴 중간대를 거쳐 스테인드 글라스를 본뜬 지름 9.6m 장미의 창을 중심으로 하는 층, 열주로 구성된 그랜드 갤러리가 잇달리고, 그 위에 지상 6.9m 높이의 직사각형 쌍탑이 얹혀 있다.
힘차게 활 모양을 그린 다수의 비량(飛樑)으로 지탱된 남북의 측면에는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명층이 줄을 잇고, 중앙 부근에 돌출한 익랑(翼廊) 끝 부분에는 지름이 13m나 되는 유명한 장미의 창과 아름다운 조각을 볼 수 있다. 익랑과 신랑의 교차부에 치솟은 첨탑(尖塔)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또한 이 대성당은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민예배(1944.8.26) 등 여러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성당내부
현관성당
장미창
첨탑
샤르트르 성당
프랑스 샤르트르에 있는 고딕양식의 대성당.
원어명
Cath
drale de Chartres
구분
대성당
설립연도
9~13세기
소재지
프랑스 샤르트르
설립목적
성당 건축
주요활동
종교의식
규모
신랑부 너비 16.4m, 천장 높이 36.55m, 성당 내 앞뒤 길이 73.47m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 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양식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특징으로 하는 고딕성당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 아미앵성당·노트르담성당·랭스성당 등과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성당의 역사는 화재와 재건의 역사로, 3차례의 화재와 재건이 거듭되었다. 9세기의 성당은 1020년 화재로 소실돼 재건되었으나, 1134년 다시 화재로 정면 현관부분이 파손되어 1150년 제2기의 로마네스크양식으로 복원되었다. 복원된 성당은 왕의 문이 있는 서쪽 정면 현관부와 좌우의 탑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1194년 화재로 파손되었으며, 1220년 제3기의 건조물로 완성되어 오늘날 성당이 되었다. 그뒤 내진부(內陣部)는 1221년, 남북 익랑부(翼廊部)는 1245년, 정면 북쪽 탑은 1513년 플랑부아양양식으로 완성되었다. 목골구조(木骨構造) 지붕은 1386년의 화재 뒤 철골로 비뀌고 지붕은 구리로 이었다.
성당 건물의 전장(全長)은 약 130m, 신랑부(身廊部)의 너비는 16.4m로 프랑스 제일의 규모이며, 천장 높이 36.55m, 성당 앞쪽에서 뒤쪽까지의 길이는 73.47m 이다. 이중의 주보랑(周步廊)으로 에워싸인 내진부와 삼랑식(三廊式) 회당부(會 堂部)의 경계에 남북으로 뻗어나간 수랑(袖廊)을 설치하고, 이 남북 수랑의 정 면과 서쪽 정면을 합한 세 곳에 출구를 내었다. 서쪽 정면의 좌우에는 높이 약 98m의 종탑이 솟아 있고, 좌우 측랑(側廊)의 지붕에 걸쳐 짜여진 플라잉 버트리 스[飛梁]가 높이 약 35m의 열주와 첨두교차(尖頭交差) 볼트로 지탱시킨 신랑의 상부를 밖에서 떠받치고 있다.
비교적 많이 분절되어 있는 구조적인 처리가 외관 디자인에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으며, 각각 다른 시대에 건축된 두 개의 첨탑은 이질적인 성격의 비대칭적인 역동성을 보여준다. 내부에 사용된 리브볼트방식은 4분볼트이며, 양쪽 측량에 정사각형 베이가 붙어 일종의 리듬적인 내부공간구성을 유도하고 있다.
초기 고딕조각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샤르트르대성당의 북쪽 현관을 장 식한 조각들이다.이곳에 새겨진 기둥의 인물조각들은 살아있는 듯 자유로운 몸과 긴장감 있는 얼굴 표정들이 조화를 이루며 매력있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성당을 유명하게 하는 것은 아케이드를 비롯하여 높은 창에 짜넣은 176개의 스테인드글라스 및 거대한 장미창이다. 장미창은 일부 12세기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13세기의 것으로, 서쪽 정면의 장미창은 최후의 심판을, 남쪽 장미창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북쪽의 장미창은 성모를 주제로 하였으며, 프랑스의 장미창을 대표한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밀라노대성당
1386년 밀라노의 영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의견에 따라 대주교안토니오 디 사루초가 기공하였다. 프랑스나 독일의 대성당에 필적할 만한 것을 조영하기 위해 본국 외에 독일과 프랑스의 건축가를 참가시켰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성당 건축 가운데 알프스 이북의 고딕적 요소가 가장 농후하다. 반면에 설계와 시공에 관한 의견 조정이 지극히 어려워 1577년에야 헌당되었으며, 부대공사 모두가 완료된 것은 1951년이었다. 내부는 5랑식(廊式) 본당, 3랑식 익랑(翼廊), 주보랑(周步廊)이 달린 본전(本殿)으로 되어 있으며, 천장은 측랑(側廊)에서 신랑(身廊)에 걸쳐 계단 모양으로 높아지고 있다. 외부 벽면은 대소의 부벽(扶壁)과 번잡할 정도로 많은 소첨탑(小尖塔)으로 장식되어 얼핏 보아 지극히 호화로워 보이나 통일감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랭스대성당
프랑스의 랭스에 있는 대표적인 고딕식 성당.
원어명
Cath
drale Notre-Dame de Reims
구(舊)성당이 창건된 것은 400년경이며, 그 후 증축과 개축이 되풀이되었으나, 1210년의 화재로 불타버렸다. 현재의 건물은 그 이듬해 장 도르베의 감독하에 기공되어 내진익랑(內陣翼廊,1241), 신랑부(身廊部)와 파사드(13세기), 정면 탑(1430)의 차례로 낙성되었다. 세 개의 입구가 있는 파사드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둥근창이 있는 팀판, 박공(
), 첨탑중층(尖塔重層) 아치, 기저부(基底部)에 배열된 인상조각(人像彫刻) 등으로 고딕 양식의 가장 화려한 외관 구성을 보여준다.
특히 인상조각은 프랑스고딕 조각의 대표작으로서 중앙 입구에는 성모를 중심으로 한 《수태고지(受胎告知)》와 《마리아의 방문》, 오른쪽 입구에는 구약성서의 여러 인물, 왼쪽 입구에는 천사로 둘러싸인 성 니케즈 등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내부의 구성은 간략하지만, 조화를 이룬 방대한 규모(길이 150 m, 궁륭의 높이 38 m)와 정면 입구의 장미창(薔薇窓)은 압도적인 효과를 과시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잔 다르크가 구해낸 샤를 7세가 1429년에 대관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다.
첫댓글밀라노 대성당은 세계에서 손가락으로 꼽히는 그야말로 대규모 성당입니다. 노틀담 성당이나 밀라노성당은 언뜻보면 별로 뾰족하지 않다 느끼실지도 모르나 직접보면 정말 뾰족뾰족합니다. 뾰족한 첨탑이나 조각물들이 성당 자체의 규모에 눌려 사진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것 같습니다.
첫댓글 밀라노 대성당은 세계에서 손가락으로 꼽히는 그야말로 대규모 성당입니다. 노틀담 성당이나 밀라노성당은 언뜻보면 별로 뾰족하지 않다 느끼실지도 모르나 직접보면 정말 뾰족뾰족합니다. 뾰족한 첨탑이나 조각물들이 성당 자체의 규모에 눌려 사진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것 같습니다.
노틀담 성당의 장미창은 진짜 이쁘네요 ^^ 첨탑은.. 정말 뾰족한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