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왕요 그는 누구인가?
한 왕조의 마지막을 함께한 왕들은 역사속에서 항상 비극의 운명을 대표하는 인물로 불린다.
500여년의 역사를 한 고려 왕조에도 마지막 왕 공양왕이 있었다.
공양왕 왕요 그는 과연 누구인가?
공양왕 가계
공양왕은 고려 제 20대 왕 신종의 6세손인 정원 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 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 왕요이다.
그의 가계를 봤을때 이미 한참은 왕권에서 멀어진 왕족 이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 정창군으로 불리며 왕과는 전혀 거리가 먼 왕족으로 살줄 알았는데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1389년 11월 이성계,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마지막 왕에 오른다.
그의 나이 이미 45세였다.
이미 그는 형 정양군 왕우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여
사돈인 관계로 이성계 가문과는 사돈 관계이며
이 점도 분명 그를 왕위에 올리는데 있어 일정부분 힘이 작용했을 것이라 보인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일찍이 위화도 회군 이후 정권을 잡은 회군파 이성계와 조민수는
자신들이 몰아낸 우왕 대신 차기 왕 후보에 대하여 고심을 한다.
이성계 일파는 종친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자고 하였으나
조민수 쪽에서는 자신들의 패권을 위하여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위에 올련다 주장하였고
고려말 대학자이자 정도전과 정몽주의 스승인 이색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도움요청을 받은 이색은 이내 공민왕의 제3대 익비 한씨를 찾아가 교지를 받아 창왕을 왕위에 세우니
그가 바로 제 33대 왕 창왕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민수 일파에게 권력이 기울여지는 듯 보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정도전, 조준 등 젊은 신진 사대부 세력들은 대규모 토지 개혁을 단행하려 한다.
그리고 조준을 필두로 관제, 신분, 국방 등 그야말로 고려 사회를 뒤집어 엎는 개혁안과
1388년 7월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제 개혁소를 올렸고 조민수는 이를 끝까지 반대하다
이인임과 친척관계로 부정한 짓을 하였다는 조준의 탄핵을 받아 유배 된다.
조민수가 유배를 당하자 군권이 없어진 이색은 힘이 줄어 들었고
문하시중 자리와 이림, 우현보, 변안열, 권근 등 그의 제자들이 겨우 지탱하면서 전제 개혁을 막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색 역시 조준이 대사헌 자리에 오르면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물러날 위기에 처하고
마지막으로 명나라의 힘을 이용 하고자 창왕의 명나라 입조를 추진하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스스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이색마저 고향으로 내려가자 정권은 완전한 이성계 일파의 것이 되었고
조준, 정도전 등은 정몽주와 함께 폐가입진(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의 논리로
창왕을 폐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저와, 정득후 등이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 시키려 다가
그가 매수 하려던 곽충보의 밀고로 발각되어 실패하고
고문 결과 변안열, 이림, 우현보, 왕안덕 등 반 이성계파가 대다수 연루되었다는 자백과 함께
모두 척결한후 1389년 11월 창왕을 폐위 한후 강화도로 보내 버린다.
이에 이성계파는 자신들이 원래 세우려 했던 정창군 왕요를 불러들여 왕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공양왕이다.
공양왕 개혁의 폭풍 속에서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을 왕위에 올리자마자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대적인 개혁작업에 착수 하기전 유배 보낸 우왕과 창왕을 죽여야 한다고 공양왕에게 거듭 주장을 하고
공양왕은 고민 끝에 하는수 없이 우왕과 창왕을 죽이게 된다.
이후 공양왕을 즉위시킨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
아홉 명의 대신들은 공신 자리에 주어져 그야말로 급진적인 개혁에 나서게 된다.
우선 정치에서는 경연 제도를 도입하여 정치 논쟁을 활성화시키고
과거에 무과를 신설하여 군대의 질을 늘리게 된다.
여기에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조로 관제를 개편하고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이념에 따라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하고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로 환수 하였다.
경제 개혁으로는 의창을 세워 곡식을 비축하게 하고
조준의 주장에 따라 전 현직 관리의 직급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과전법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신흥 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도선비기에 따라 1390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가 민심이 동요되자
개성으로 환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개혁속에서 공양왕은 정몽주, 이숭인, 이종학 등 온건개혁파를 의지하게 되는데
이성계 일파의 경우 궁극적으로는 고려 왕조를 폐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에 목적이 있었고
정몽주가 이끄는 온건개혁파의 경우에는 고려 왕조를 그대로 지키고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양왕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폐위되다.
공양왕이 이처럼 정몽주 등과 협력하며 겨우 왕조를 지탱하면서
틈틈히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는 사이
1392년 3월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하러 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낙상하여 등청하지 못하는 기회를 잡게 된다.
이에 정몽주는 4월에 조준, 남은, 정도전, 남재, 조박, 오사충 등 급진파를 모조리 탄핵하여
공양왕에게 교지를 받아 유배시켜버렸다.
이때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더 멈추지 말고 이성계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으나
공양왕이 우물 쭈물 대는 사이 이성계는 아픈 몸으로 가마에 실려
부랴부랴 개경으로 돌아와 사태수습에 나서게 된다.
여기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온건 개혁파의 정몽주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수하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살해하게 되니
온건 개혁파는 순식간에 와해되고 모두 유배길에 올랐으며
유배를 떠났던 급진 개혁파 조준, 정도전 등은 다시 돌아와
정계를 장악한다.
이후 1392년 7월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위에 올리니 고려는 멸망하고
1393년 2월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된다.
공양왕 최후
공양왕은 왕위에서 좆겨 난 후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간성으로 이배되었으며
그 후 다시 삼척으로 이배됐다가
태조의 명령에 의해 1394년 4월 50세로 사사 되었으며
1416년(조선 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원당과 사사 지인 강원도 삼척 두곳에 있는데
원당에 있는 고릉에는 '고려 공양왕 고릉'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나
삼척에는 비석은 없고 공양왕이라는 말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여가와 단심가
*이성계는 정몽주를 없애지 않고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성계의 생각을 읽은 사람이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집으로 초대해. 정몽주를 설득하여
이성계 편으로 끌어오기 위한 속셈이었다..
몇 차례 술잔이 오간 뒤, 이방원은 말했다.
“제가 시를 한 수 읊을 테니 답가를 해 주시겠습니까?”
*정몽주는 흔쾌히 말했지요. “그러지요.”
*이방원은 낮은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시를 ‘하여가’라고 한다..
다 썩어 가는 고려를 붙들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력과 힘을 합쳐 칡넝쿨처럼 얽혀 살아가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자 정몽주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시를 읊어 답을 했지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죽어서도 고려 임금을 섬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이 시는
‘단심가’라고 합니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수 없다는걸 깨닫고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부하 조영규를 불렀어요.
“오늘 밤 정몽주를 없애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조영규는 쇠뭉치를 들고 선죽교 밑에 숨어 정몽주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어요.
한참을 기다리자 드디어 정몽주가 나타났어요.
정몽주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주막에서 술을 한잔 마시고 오는 길이었어요.
*“휴우, 이방원이 드디어 나를 없앨 모양이니 그만 가봐야겠구나!”
*정몽주는 기울어 가는 고려와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쉬고는
시종에게 말을 가져오게 했어요. 정몽주는 말에 거꾸로 올라탔어요.
*“대감 마님, 말을 거꾸로 타셨습니다.” 시종은 정몽주가 술에 취해 실수를 한줄 알고 웃으며 말했어요.
*“알고 있다.
맑은 정신으로 죽을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기가 얼굴을 덮칠 것이 끔찍해 말을 거꾸로 탔느니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정몽주는 결국 조영규가 휘두른 쇠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선죽교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어요.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죽은후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하여 귀양 갔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였어요.
이렇게 해서 고려의 권력을 잡게된 세력은 공양왕을 물러나게 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받들었어요.
*이성계는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정하여 새로운 나라를 열었어요.
이로써 고려 왕조는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지 474년 만에 공양왕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어요.
▶ 선죽교의 원래 이름은 ‘선지교’예요.
정몽주가 죽던날 밤 다리 옆에 대나무가 났기 때문에 선죽교로 바뀌었다고 해요
친구 정도전은 어찌 되었을까요?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완전히 잡으면서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개혁의 전도사가 되어 이성계를 왕으로 하는 조선 왕조 개창에 앞장섰어요. 그러나 훗날 정도전의 죽음 또한 정몽주만큼이나 비극적이었어요. 아버지 뒤를 이어 왕이 되고자 했던 이방원과 갈등을 벌이다, 이방원의 추종 세력에 의해 1398년에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어요. 그의 나이 57세로, 정몽주가 죽은 지 6년 만에 발생한 일이었지요.
배신의 역사 이성계
고려때 당시 조선 사람 여진족 사람
이들은 서로의 나라을 보편적 자유롭게 드나 들었다
이성계 할아버지도 장사을 하려고 고려 땅을 드나 들었다
그러다가 전주에 머물게 되였고 그 곳에서 수절하는 전주이씨 여자와 눈이 맞았다
그는 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것이 발각되여 그는 전주 이씨들에게 감금되였다
날이 밝으면 처형하려고 했는대 감시가 소월한 틈을 이용해서 도망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다
이성계 할아버지는 힘이 장사였다
그러니 한두놈 때려 눕히는건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는 여진족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훗날 이성계가 전라도을 찬밥신세로 만든 계기가 된것이다
이성계 아버지는 여진족에서 고을을 다스리는 작으마한 벼슬을 하였고
모함에 휘말려서 처벌을 받을 처지였다
그들은 가족을 대리고 야반 도주하게 되였다
그들이 고려로 오게된 이유다
이성계 집안이 뼈대가 크고 힘있는 장사 같은 피을 물려 받은 것이다
그는 장졸로 고려에서 군에 들어오게 되였고 여러 전쟁터에 참가 하게 된것이다
그러다가 그의 힘과 용맹이 최영장군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 하게 된것이다
그래서 장군 반열에 오르게 된것이다
이것이 이성계의 앞나라을 바꾸어 놓을 기회을 부여하게 되였고
명나라가 운을 다하여 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있었다
그것은 부패한 명나라을 무너트리고 세나라을 열려고 구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에서 잘 알고는 용감한 이성계을 사령관으로 해서
옛 고구려땅인 요동을 되찾을 기회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성계로선 도망친 땅이지만 그곳을 전쟁터로 만드는건 죽기보다 싫었다
신라나 가야국을 세운자들도 이방인 이지만 이성계도 이땅에서 정권을 잡을 기회가 온것이다
그는 위화도 가는데 하루가고 이틀쉬고, 하루가고 하루쉬고, 어자피 고향 땅에서 전쟁을 안할판에
어느 장수가 불만이 있는지 측근들을 시켜서 감시하게 했다
그건 구테타에 중요한 일이 였으니
그들은 보름이면 갈수있는 위화도을 2달이란 시간을 끌면서 당도한다
그곳에 당도 해보니 장마가 시작되였다
이성계는 빨리가서 전쟁을 하던지 하면서 불만을 표출한 장수들을 모두 재거한다
그건 구테타에 아주 중요한 작업이였다
그는 이 핑게 저핑게 하여 말머리을 개성으로 돌렸다
가는 2 달이란 시간을 걸렸지만 위화도에서 개성 오는데는 10흘 남짓 걸린것이다
이성계는 본인을 출세하게한 최영장군을 죽이고 고려의 왕을 갈아치운다
그는 정권을 잡고보니 할아버지에 유언이 떠올랐다
전라도 내가 그곳에서 죽을 고비을 맞이 했으나
감시가 소월한 틈을 타서 살아오게 된것이라
어자피 이성계는 남에 나라에서 왕으로 살려면 조선에 뿌리을 두어야 했다
그는 여진족에서 이씨로 살았고 그레서 전주 이씨들과 밀약을 한다
이성계는 한반도에 뿌리을 두고 왕으로 이땅을 다스릴 명분을 만들었고
전주 이씨들은 어부지리로 왕족이 된것이다
이것으로 할아버지 일이 끝난줄 알았는대
전라도 사람들이 느그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바람피다 도망친자다
이런 말이 돌았다
이성계는 화가났다
그레서 전라도 사람은 벼슬을 못하게 하라 명한다
그것도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는 명분을 찾으라 신하들에게 명한다
그레서 찾은 것이 금강이 활처럼 북으로 휘였다 하여
전라도에서 왕궁으로 활시위을 당긴다 하며 전라도 땅을 배신에 땅이라 명한다
조선 500년 동안 전라도 에서는 한사람도 벼슬을 못하게 된것이다
배신자는 이성계 본인 이거늘
죄없는 전라도 사람들에게 덮어 씨운것이다
신하들은 불만이 많았다
왜 전라도 땅에만 왕족이란 선물을 주었느냐고 수근거리는 것이였다
궁리끝에 벼슬 아치들에게 양반이란 귀족어을 내린다
전라도 사람은 벼슬아치가 없으니 평편이 어느정도 분배가 된것이다
이렇게 되여 이성계는 조선의 왕으로 명분을 만든 것이고
전라도는 하루 아침에 배신의 땅이 된것이다
조선 500년 동안 전주이씨와 이성계 후손들은 왕래가 없었다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이 한테 쫓겨나 함흥으로 간것도 여진족 사람들 때문에 그리한 것이다
왜 전주로 안가고 함흥으로 갔냐
전주 이씨들 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냐
그리고 퉁두란 일명 이지란 이성계의 의형재 이사람도
이성계와 어려서 여진족에서 같이 자란사람이다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있자 여진족에 살던 퉁두란의 식솔 일가 친척들 100여가구가
조선으로 이주해서 전주 이씨로 떵떵 거리며 호래호식 하며 살게된 것이다
이성계는 정권을 잡고 왕씨들을 씨을 말렸으며
이때 왕씨 수십 만명이 바다에 수장되여 죽었다
그리고 고려의 황실 기록이나 이전에 기록을 모두 불살라 버렀다
현재도 우리 나라에 조선의 기록 말고는 없다
조금 이라도 불리한것 같은 것이 있으면 없에는 방법을 써다
이런 것이 남에 나라에서 정권유지 하는대 큰도움이 되였을 것이다
북한이 보는 이 성계
"최영은 고려 말기 왜적을 물리치고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백전노장이었다."
북한 평양방송은 12일 고려말 최영(1316-1388) 장군을 "고려시기 왜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이름을 떨친 애국명장"이라고 평가하면서 그의 치적을 자세히 소개했다.
방송은 최영의 생애와 무공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그는 대신 관료로서 부패 타락한 봉건 귀족들을 고려 왕정에서 몰아내는 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며
그를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자 "청렴결백해 아부아첨과 뇌물을 몰랐고
싸움터에선 두려움을 모르는 무적필승의 용장"이라고 칭송했다.
최영 장군의 몰락도 부장(副將) 이성계(1335-1408)의 배신으로 인한 애석한 결과로 그려졌다.
전국 도통사 최영이 총지휘한 요동 공격은
원정군의 부사령관격으로 있던 우군 도통사 이성계의 배신적인 행위로 실패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와 정권을 잡고,
최영을 충주로 유배 보냈다가 살해했다."
북한의 이러한 평가는 최영을 보수적 무장 세력과 권문 세족의 이익을 대변하고
고려 왕실을 지지 세력으로 둔 구신(舊臣)으로,
이성계를 개혁적 무인들과 사대부의 대표격이자 지방 지주를 지지 기반으로 한
신흥 세력으로 보는 남한 사학계의 견해와 사뭇 다르다.
북한 사학계에 따르면 최영이 '고려시대의 애국명장'이었다면
이성계는 '매국 배족의 역적'이다.
이성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북한의 '조선 대백과사전'(1999년판)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기의 지위가 높아지자 고려정권을 빼앗을 음흉한 계책 실현의 유리한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이성계는
1388년 4월 요동 원정의 기회를 타서...고려의 정권을 가로챘다.
위화도회군은 음흉한 정권탈취야망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엄중한 매국배족 행위였다."
대백과 사전은 친명(親明) 노선에 대해서도 "자기를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던 전제권을 강화하는 한편
새 정권의 대외적 지위를 높일 목적 밑에 명나라에 사대한 비굴한 정책"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인민의 증오와 저주의 대상"으로 묘사된 이성계는 "참형을 당하자
사람들이 장(場)을 보지 않고 거리의 어린이들 부터 부녀자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던
최영과 비교조차 할수 없을 정도이다.
이는 북한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 찾기와 무관하지 않다.
북한은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북방 정권을 민족사의 적통(嫡統) 국가로,
신라와 조선은 외세에 의존한 사대주의 정권으로 평가해왔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에 대한 소개도 "우리 나라에서 첫 통일 국가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나라"와
"역사상 마지막 봉건국가"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북한은 그러나 두 정권 모두 하층계급을 착취하고 지배 계급의 이익에 봉사한
봉건국가였다는 공통적인 '한계'는 인정한다.
평양방송이 "최영이 발휘한 모든 행동은 어디까지나 봉건적 충군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계급적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북한의 통사 '조선 전사'는 명장 이순신(1545-1598)에 대해서도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켜 잘 싸웠지만
양반 지주 계급이었고 무관 이었으므로,
어디까지나 봉건 왕권에 충성하며 양반 지주 계급을 위해 싸웠다"고 평가하고 있다.
신죽주
오늘날에도 변절자의 대명사로 두고두고 까이고 있다. 더욱이 세조에게 협력하고 집현전 동료인 성삼문의 처형을 주장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정인지나 나머지 집현전 선배 최항, 정창손처럼 세조의 정변을 도운 집현전 선배들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 신숙주보다는 더욱 명확한 배신자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세간의 평가는 신숙주에게 좀더 가혹하다. 그만큼 신숙주의 능력과 성품에 걸었던 기대와 믿음이 컸다는 반증일지도.
이후 사림들은 훈구파를 까면서 훈구파의 시초였던 신숙주 등 수양일파를 까는 소설이나 설화를 만들어냈고, 백성들도 단종에 대한 연민과 수양일파의 전횡에 대한 분노로 신숙주를 까면서 변절자 신숙주에 대한 수많은 설화들이 만들어졌다[6],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변절자를 까기위해 역사속의 변절자 신숙주를 가져와서 비판하는 소설등을 써냈다. 오늘날 알려진 신숙주의 변절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남효온의 '육신전'이나 이광수의 단종애사에서 알려진 설화들에 기초한 것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