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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표 작곡가 세 분을 소개합니다.
세 분의 대표곡 NWC악보를 먼저 올리고 글을 전개하겠습니다.
이수인 선생님
창원시립 마산음악관에서 발췌
이수인(1939~ )은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앞으로', '방울꽃' 등의 동요를 비롯하여 '고향의 노래', '석굴암', '별' 등의 가곡을 지은 작곡가로 명성이 드높다. 그는 마산 출신으로 고교시절에는 소설가 이제하 등과 함께 '청운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문학과 인생을 토론하기도 했다.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에 진학하여 작곡가 김동진의 수제자로서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았다. 한 때 그는 마산 제일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30여 년이 넘도록 'KBS어린이 합창단'을 이끌어 오고 있다. 또한 그는 동요보급 모임인 '파랑새'를 통해 동요 대중화에 힘썼다. 대표적 작품집으로 『가곡집』(1965), 『합창가곡집』(1973), 『달·포도·잎사귀』(1973) 등이 있다.
「앞으로 앞으로」는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계기로 꿈의 실현, 곧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다고 한다. 이 노래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가는 진취적인 기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수인 선생님 프로필>>
1939년 1월 8일 경남 의령에서 출생 (5남 4녀 중 4남)
마산동중-마산고-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 졸업
마산 성지여고, 제일여고에서 교편생활
1968~2008년 2월까지 KBS 어린이 합창단 단장으로 30년간 재직
現 ‘파랑새창작동요회’ 회장
대표작
동요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앞으로’ ‘방울꽃’ ‘솜사탕’ 등 500여 곡 작곡
가곡 ‘고향의 노래’ ‘석굴암’ 등 100여 곡 작곡
기타 어린이뮤지컬 등 다수 작곡
수상경력
한국아동음악상(1978)
대한민국방송음악상(1985)
대한민국동요대상(1988)
가장 문학적인 작곡가상(1996)
MBC가곡제 공로상(1998)
반달동요대상(2000)
저서
이수인 가곡집(1965)
새 합창곡집(1973)
학생합창곡집(1985)
한국서정가곡선(1997)
합창곡집 ‘내 맘의 강물’(2000)
동요곡집 ‘어린이 나라’(2000)
2014-11-14 경남신문에서 발취한 기사
“골목에서 아이들의 동요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경남 출신의 작곡가 이수인(75·사진) 선생은 오는 21일 ‘제7회 이수인 가곡의 밤’을 앞두고 12일 전화인터뷰에서 “요즘 우리 아이들이 대중음악에 너무 노출돼 있다”며 “시대적 현상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어른들이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작곡가는 “아이들의 정서적 교육을 위해서도 동요를 많이 불러야 하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송 동요 프로그램이 자취를 감췄다”며 “국가나 지역사회, 어른들이 나서 아이들이 동요를 부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작곡가는 동요와 가곡을 많이 작곡한 배경에 대해 “유년시절 마산에서 교회성가대 활동할 때부터 가곡 공부를 해 왔고,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겨 KBS어린이합창단 지휘를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동요를 많이 만들었다”고 말했다.
선생은 “작곡자로서 내가 만든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불릴 때 가장 행복하다”며 “많은 사람들이 내 노래를 알고 불러줘서 기쁘다”고 했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곡으로는 ‘별’을 꼽았다. 선생은 “시조시인 이병기의 시 ‘별’에 곡을 만들었는데 노랫말이 좋다”며 “국민가곡으로 간주해도 될 만큼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이수인 가곡의 밤’이 올해 7회째를 맞는 데 대해 “고향 마산에서 음악에 관심을 갖고 매년 뜻깊은 행사를 열어줘 희망이 있다”며 행사를 주최하는 경남오페라단과 후원 업체에도 감사를 전했다.
‘제7회 이수인 가곡의 밤’은 오는 21일 오후 7시 30분 마산 3·15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다. 이 행사는 경남오페라단이 경남이 낳은 가곡 작곡가 이수인 선생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7년 처음 개최했다.
선생은 1939년 의령에서 태어나 마산동중학교,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마산 성지여고와 제일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그는 500여 곡의 동요와 100여 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가곡 ‘고향의 노래’, ‘석굴암’, 동요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앞으로’, ‘아빠의 얼굴’ 등이 대표작이다.
이번 음악회는 소프라노 박현주(숙명여대 성악과 교수), 메조 소프라노 추희명(안양대 성악과 교수), 테너 정의근(상명대 음악과 교수), 베이스 김의진(창신대 음악학과 교수), 테너 이해성 등 창원 출신 성악가들과 동요를 전파하는 어린이 중창단인 하늘소리중창단(지도 백혜진)이 출연한다. 1부에서 ‘석굴암’, ‘내맘의 강물’, ‘별’ 등 이수인 선생의 주옥같은 가곡을 선보이고, 2부에서는 한국 가곡을 비롯해 스페인, 러시아, 영미 등 세계 명가곡을 연주한다.
황덕식 선생님
2009-11-05 경남신문에서 발췌
‘서리 까마귀 울고 간 북천은 아득하고/수척한 산과 들은 네 생각에 잠겼는데/내 마음 나뭇가지에 깃 시린 새 한 마리/고독이 연륜 마냥 잠겨오는 둘레 가에/국화 향기 말라 시절은 저물고/오늘은 어느 우물가 고달픔을 긷는가/일찍이 너 더불어 푸르렀던 나의 산하/애석한 날과 달이 낙엽지는 영 마루에/불러도 대답 없어라 흘러만 간 강물이여’
세계적인 테너 임웅균 한국예술종합교 교수가 불러 널리 알려졌으며 테너 엄정행 전 경희대 교수, 테너 장원상 경성대 교수, 소프라노 이지영 경희대 교수, 안산시립합창단 등 내로라하는 성악가와 합창단이 즐겨 부르는 창작가곡 ‘애모’다.
이 곡은 작곡가 황덕식(67)씨가 1984년 마산에서 열린 전국순회 시조문학 강연회에 강사로 참석한 원로시인 정완영씨의 승낙을 얻어 작곡한 곡이다.
“애모를 읽고 또 읽고 했지만 ‘사랑’, ‘그리움’, ‘기다림’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면서도 이토록 사랑을 애절하게 표출해 낸 시가 또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너무 가슴에 와닿아 곡을 붙였습니다.”
당시 고교 교사였던 황씨는 학생 수준이면 피아노 반주가 가능하고 음역이 높지 않은 쉬운 선율로 곡을 만들었다.
“학생들 반응이 좋았습니다. 음악수업 없이 입시공부에만 매달리고 있던 고3 학생들까지 부르게 해달라고 요청해 3학년 학생 모두가 강당에 모여 이 노래를 열창한 기억이 납니다.”
황씨의 고향은 하동군 적량면이다. 어릴 적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던 부모님을 따라 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음악을 처음 접했다.
“집이 하동읍교회 옆에 있어 항상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자랐는데 그때 음악적 소양이 길러진 것 같습니다.”
사범대학에서 음악을 중점적으로 공부한 뒤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다.
음악교사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틈틈이 작품활동을 했다. 1968년 설창수 시인의 시 ‘춘일’을 곡으로 만들어 진주 개천예술제 작곡부문에 응모해 금상을 받았다. 이것이 그의 첫 작품이다.
그의 교육활동과 작품활동은 맞물려 돌아갔다.
1970년대 초반에는 ‘언덕을 올라’, ‘목련’, ‘꽃망울’, ‘아름다운 저 동산’ 등 동요곡을 많이 썼다.
1973년부터 1978년까지 마산상고 관악합주단을 지도할 때는 서곡, 행진곡, 교향시 등 기악곡을 집중해 썼다.
1980년부터 1986년까지 마산여고 합창단을 이끌 땐 합창곡에 매진했고 1990년대 장학사로 재직하면서부터는 가곡에 전념하고 있다.
작곡과 함께 학교음악 활성화에 열성을 바쳤다. 1988년 경남여교사합창단, 1994년 창원교사합창단을 창단하고 지휘했다. 하지만 1999년 교장으로 승진하면서 관여하지 않게 되자 합창단의 명맥이 끊겨 버렸다.
정년 퇴임한 후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중 2006년 창원교육청에서 열린 초중등학교 교사 합창지도 연수회를 계기로 마산교육청·창원교육청의 협조를 얻어 마산교사합창단을 창단한 데 이어 창원교사합창단을 재창단하고 후배들에게 지휘를 맡겼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우리 지역에서는 합창단을 만든 사람이 지휘자나 단장을 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데 저는 교사합창단이 첫 연습에 들어갈 때까지만 관여하고 손을 뗐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100여 곡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음반에 수록된 것은 40곡 정도다.
그중에서 대표곡은 ‘애모’(정완영 작사·1987년 발표), ‘아름다운 동행’(황덕식 작사·2006년), ‘그대 그리움’(강명숙 작사·2007년), ‘황홀한 기다림’(권선옥 작사·2004년) 등 4곡이다.
이들 곡들은 오래전에 작곡됐지만 음반에 수록된 때를 발표 시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2004년 이후 발표된 곡이 많은 것은 정년 퇴임 후 본격적으로 음반 제작에 나섰기 때문이다. 황씨가 작곡가와 성악가들 사이에서는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아직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그 이유다.
“현직에 있으면서 많은 작품을 썼지만 교육현장에 몰두하느라 덮어두고 있었고 퇴임 후에 작품을 정리해 세상에 내놓아 작곡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게 됐죠.”
‘애모’는 황씨도 모르게 발표된 곡이다. 유명 성악가들이 자신의 음반에 수록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1989년 어떤 성악가가 ‘애모’를 부르는 것을 TV에서 우연히 보고 방송국에 연락해 보니 임웅균 교수가 1987년 발표된 CD에 애모가 수록돼 있다고 알려줘 알게 됐어요.”
‘연가’(정목일 작사)도 소프라노 이지영 교수가 먼저 발표했다.
‘아름다운 동행’, ‘그대 그리움’, ‘황홀한 기다림’은 발표된 지 10년이 안 됐지만 많이 불리고 있다.
‘아름다운 동행’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그리움을 표현한 곡으로 그가 유일하게 작사했다.
“이수인, 임긍수 등 다른 작곡가들이 자기 시를 만들어서 부르는데 참 좋더라고요. 저도 젊었을 때 시를 좋아하고 자작시를 많이 써본 적이 있어 도전해 봤죠. 시를 완성해 곡을 붙였더니 사람들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2007년 첫 독집음반 ‘아름다운 동행’을 가곡집과 함께 내놨다. 가곡집에는 김연동의 ‘겨울언덕’, 이광석의 ‘노을’, 김미윤의 ‘눈오는 날’, 이우걸의 ‘비’, 정목일의 ‘연가’ 등 지역과 국내 문인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37곡을 수록했다.
CD에는 서울 조이챔버오케스트라의 반주로 임웅균, 김인혜, 김현주, 장유상, 박신화 등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이 부른 17곡을 담았다.
“개인이 오케스트라 반주로 가곡작품집을 만든 것은 경남에서는 저뿐입니다. 국내 통틀어도 30명이 채 안 돼요. 제작비가 많이 들 뿐더러 곡이 웃음거리가 안 돼야 하기 때문이죠. 곡을 내놨는데 불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돌꽃’(이처기 작사)와 ‘호숫가에서’(동시영 작사)도 이 음반에 수록돼 있다.
“작곡가는 아끼는 곡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잉태하듯이 음반으로 만드는데 ‘돌꽃’과 ‘호숫가에서’가 그런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곡 모두 시가 담백하고 곡도 잘 만들어졌어요. ‘호숫가에서’는 학교현장에서 합창곡으로 많이 불리고 있죠.”
내년 말쯤에는 지금까지 발표한 가곡을 합창곡으로 편곡해 황덕식 가곡 2집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가 한 해 동안 쓰는 곡은 5곡 정도로 다작하는 작곡가가 아니다. 습작은 내놓지 않고 작곡기법이나 사람들 정서에 맞게 만든 곡을 한국작곡가회, 한국예술가곡연합회, 한국가곡학회 등에 출품한다.
이들 단체는 창작가곡 활성화를 위해 해마다 출품한 회원들의 작품을 가려 공동음반을 제작하고 작품발표회를 갖고 있다.
보통 회원 1명이 2곡을 출품해 1곡이 음반에 수록되는데 황씨의 작품은 2편 모두 실린 적이 여러 번 있다.
“다른 작곡가의 작품은 1곡만 실리는데 제가 출품한 2곡이 모두 수록되면 속으로 큰 기쁨을 얻어요. ‘인정받는 곡을 썼구나’하고 스스로 만족해하죠. 그런 재미로 살지요.”
작곡할 때 중점을 두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거침없이 답했다. “작곡가는 곡을 가지고 말합니다. 곡을 만들어 세상에 내놨을 때 전국에 있는 불특정 다수가 즐겨 부르는 곡이어야 합니다. 작곡기법상으로 아무리 훌륭한 곡이라도 사람들이 안 부르면 좋은 곡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쉬워야 되고 서정적이어야 되고 마음을 적셔 주는 곡이어야 불립니다. 저는 항상 그런 생각을 갖고 곡을 쓰고 있습니다.”
글=양영석기자 yys@knnews.co.kr
▲작곡가 황덕식은
1943년 하동군 적량면에서 출생했으며 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1966년 하동 진교중을 시작으로 마산상고, 마산고, 마산상고 교사 등을 거쳐 창원 중앙고 교감, 창원교육청 장학사, 창원 남산고·신월고·마산고 교장을 지낸 뒤 2004년 8월 정년 퇴임했다.
경남여교사합창단(1988~1992년), 창원교사합창단(1994~1998년), 경남CBS합창단(2004~2006년)을 창단 지휘했으며, 마산교사합창단과 창원교사합창단을 재창단했다. 경남합창연합회 창립회장(1986~2001년)과 한국합창총연합회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작곡가회 상임이사, 한국 예술가곡연합회 상임자문, 한국가곡학회 임원을 맡고 있으며, 서울작곡가포럼 회원이다.
동요작곡집 ‘송이들의 노래’(1979년), 예술가곡집 애모(1987년)·겨울언덕(1997년)·아름다운 동행(2007년)을 펴냈으며 한국가곡 3인 작곡CD(2006년)·가곡독집 아름다운 동행 CD(2007년)를 출반했다. 한국작곡가회, 한국예술가곡연합회, 한국가곡학회 등에서 매년 출반하는 창작가곡 공동CD에 30여 편의 작품이 수록됐다.
최영섭 선생님
2013-10-02 서울신문에서 발췌
‘그리운 금강산’이 작곡·발표된 지 올해로 꼭 52년. 그동안 ‘통일 주제가’이자 ‘민족 가곡’으로 널리 사랑받아 왔다. 국내뿐만 아니라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그리고 세계적인 음반회사 데카에서 낸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의 ‘마이 월드’(My World)에도 수록될 만큼 국가 대표급 가곡으로 알려져 있다. 이 노래를 작곡한 최영섭씨. 그는 추석 직후부터 이산가족 상봉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오는 20일 음반이 나올 예정이어서 ‘그리운 금강산’ 이후 민족 가곡의 완결편을 선보이게 된다. 올해 나이 85살에도 불구하고 작곡에 여념이 없는 최씨를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먼저 최근 작곡한 노래 ‘아 우리 독도여’와 일본 위안부들의 한을 달래는 ‘그 누구가 알리오 소녀의 눈물을’이 담긴 CD 한 장을 건네준다. 보름 전 작곡했다는 설명과 함께. ‘아 우리 독도여’라는 가사를 들여다봤다. ‘삼천리 이 강산에 바위섬 하나/내 한 점 고운 살 던진 독도여~’ 이어 위안부 노래가사가 바로 나온다, ‘그 누가 알리오 서러운 눈물을/머나먼 이국땅에 어린 몸으로~’ 다음 이어진 얘기는 이산 가족 상봉의 노래다.
“9월 중순에 두 곡(아 우리 독도여, 그 누가 알리오 소녀의 눈물을)을 작곡했고 이달 20일쯤 이산가족 상봉의 노래인 ‘금강산 가는 길’이 완성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운 금강산’부터 시작해 조국을 생각하면서 곡을 만든 것이 100곡이 되는 것이지요. 나름대로 우리 가곡 역사에 의미가 있겠지요.”
작곡 중인 ‘금강산 가는 길’의 가사 내용을 잠깐 살펴봤다. ‘볼수록 아름다운 우리 금강산/망향가 부르다가 흘러간 청춘/저 하늘 달빛 속에 어리는구나/이제야 보고 싶은 그리운 얼굴~’ 작시는 시인 고산 최동호씨가 했다. ‘그리운 금강산’에서 시작해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노래여서 사뭇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가 작곡한 노래는 대부분 조국 강산과 연관이 있다.
♬혹평도 딛고
“그동안 우리의 조국, 삼천리 금수강산, 그리고 민족의 ‘정’이라는 가곡집을 5권 출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강과 산, 바다, 그리고 인정을 소재로 한 가곡이 100곡이 되더군요. 이번에 나오는 이산가족 노래가 그 완결편입니다. 보세요. ‘그리운 금강산’부터 시작해 ‘압록강은 흐른다’, ‘백두산은 솟아 있다’, ‘낙동강 칠백리’, ‘한강의 노래’, ‘남산에 올라’ 등 주로 조국의 산하를 작곡했거든요.”
작시한 최동호 시인과는 평소 자주 만났다. 그러면서 ‘아 우리 독도여’와 ‘그 누가 알리오 소녀의 눈물을’ 작곡하게 됐고 추석 때 이산가족 상봉 노랫말을 지어달라고 했단다. 그는 그동안 300여곡을 작곡했으며 그 가운데 3분의1은 민족 가곡, 그러니까 조국을 생각하면서 작곡한 것이 100곡이 된다. 예를 들어 ‘그리운 금강산’은 그리움과 금강산의 아름다움, 통일의 염원을 담았으며 최근 발표한 ‘아 우리 독도여’에는 한국인의 기백을, 위안부 노래에는 슬픔을 녹였다. 이달 발표될 이산가족의 노래에는 그리움과 다시 헤어지는 가슴 아픈 절절한 심정을 표현했다.
이어 ‘그리운 금강산’으로 얘기를 옮겼다. 2000년 8월 15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앞마당에 한옥집만 한 크기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2009년 강화도 통일평화전망대에도 그만한 크기로 노래비가 세워졌다. 최씨는 “해외에 다니면서 수백개 노래비를 봤는데 ‘그리운 금강산’만 한 크기의 노래비는 보지 못했다”면서 기네스북에 올려주면 안 되겠느냐며 웃는다. 그러면서 슈베르트의 ‘보리수’ 노래비는 숲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노래를 많이 사랑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의 고향은 강화도이며 학창시절은 인천에서 보냈다.
시곗바늘을 옛날로 돌린다. 한 시인이 음악가를 꿈꾸는 중학생과 인천 앞바다를 거닌다. 시인은 오른쪽 주머니에서 소주병을 꺼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시인은 “이봐, 한 수 읊을 테니 적어 봐”라고 했다. 그러고는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라고 소리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성질 급한 학생은 “다음은요?”라고 보챘다.
시인은 또 목구멍 속으로 술을 꼴깍 넘기며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학생은 이튿날 가곡을 만들어 화답을 했다. 시인은 고 조병화씨다. 광복 직후 경복중학교에 다니던 학생 최영섭이 인천 앞바다를 거닐 때의 일화다. 최씨는 1954년 처녀 가곡집을 냈다. 그러자 서울신문 문화면 전체에 다음과 같은 글이 게재됐다. ‘악보 출판치고는 사상 최악이다. 그러나 이 청년의 장래를 정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작곡가 나운영씨가 주저 없이 나서 역설적으로 호평했던 것이다.
“저는 ‘그리운 금강산’ 덕분에 명성과 부를 얻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학교 교가나 회사 사가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빈털터리 삶
그러나 지금은 서울 모래내 반지하 월세방에 산다. 왜 그런지 살며시 물었다. 16년 전 재혼한 부인한테 돈을 몽땅 줬는데 집 나가서 여태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며 웃는다. 그 부인을 미워하느냐는 질문에 “글쎄, 올 줄 알았더니 오지 않더구만요”라고 한다.
최씨의 첫 부인은 세 아들을 낳고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한참 동안 혼자 살다가 방송국 PD의 중매로 둘째 부인을 만나 살았지만 1997년 헤어졌다. 평생 살려고 약속했던 부인에게 재산을 다 주고 났더니 빈털터리가 됐다. 그룹 ‘들국화’ 멤버였던 큰아들이 함께 살자고 하지만 집에 쌓인 책이며 음악자료들이 정들어 혼자 지내기로 했다. 눈치 보는 게 하나 있다. 집에서는 소주를 마시고 밖에서는 맥주를 마신다. 혹시 ‘그리운 금강산’ 작곡자가 강소주나 먹는 처지가 됐나, 하는 시선 때문이다.
‘그리운 금강산’ 탄생 당시로 화제를 돌렸다. 1961년 8월이다. KBS가 남산에 있던 시절이다. ‘남산에 올라’, ‘한강의 노래’, ‘낙동강 칠백리’, ‘백두산은 솟아 있다’ 등의 곡을 발표할 때였다. 하루는 한용희(‘파란 마음 하얀 마음’ 작곡자)씨가 남산 ‘산실다방’에서 차를 마시자고 했다. 다짜고짜 “최 선생. 한강, 백두산, 낙동강을 다 작곡하면서 정작 금강산은 왜 안 하는 거요”라고 말했다.
최씨는 아차 싶구나 하는 생각에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한상억(1992년 작고)씨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안 그래도 가사를 이미 써 놨으니 가져 가시오”라고 했다. 그날로 최씨는 밤새 오선지에 음표를 그렸다. 이튿날 방송국에 악보를 전달하고 녹음에 들어갔다. 서울대 음대 동창인 이남수씨가 지휘했다. 3일 뒤부터 KBS 가곡프로그램 ‘이주일의 노래’에 연달아 방송됐다. 팬레터가 쇄도했고 32세의 청년 최영섭은 일약 가곡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지금에야 밝히는 진실. ‘그리운 금강산’의 첫 대목에서 ‘누구의 주제련가~’의 주제는 ‘주재’(主宰)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름다운 금강산을 주재했다는 뜻인데 처음 악보집을 인쇄할 때 ‘주제’라고 나온 것이 그대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최씨는 6살 때 강화도 동네 병원에서 축음기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었다. 또 마니산에 올라 연평도 쪽에서 들려오는 ‘경기 뱃노래’에 매료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호르겔 피아노를 처음 접하면서 음감을 확인했고 이화여고에 다니는 누나한테 음악을 배웠다. 인천중학교 시절에는 바이엘과 체르니를 독학으로 배웠다. 1949년 경복중학교 6학년 때 첫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서울대 음대 시절 김성태 선생을 만나면서 오늘날 민족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다.
“제 나이 85살입니다. 생전에 통일을 봤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내후년이면 광복 70주년이거든요. ‘그리운 금강산’도 더 이상 불려지면 안 될 텐데요.” 헤어지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탁소에 옷을 맡기면 ‘금강산’이라고 이름을 적어요.”
선임기자 km@seoul.co.kr
■최영섭 작곡가는
오선지와 한평생 지휘자로도 활약
1929년 인천 강화군 화도면에서 태어났다.
인천중학교를 거쳐 경복중·고교 재학 때 이화여대 임동혁 교수에게 작곡 이론을,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서 김성태 교수에게 작곡 이론을 각각 사사했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지휘과 수석 교수 칼 스터라이히 교수한테는 지휘법을 사사했다.
인천여중고, 인천여상고, 이화여고, 한양대 음대, 상명대 음악과, 세종대 음악과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인천애협교향악단을 창립, 상임 지휘자를 맡았다. 사단법인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한국작곡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이사, 서울작곡가 포럼 고문, 한국가곡문화예술협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주요 수상으로는 인천시문화상(1959년), 경기도문화상(1961년), 한국음악상(1996년), 세종문화상(2001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은관·2009년), 세일문화재단가곡상(2010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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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파천님~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명곡을 작곡하신 세 분의 글을 읽어보니
참으로 훌륭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이 자료가 온 라인에 퍼져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허긴 컴을 다루는 솜씨가 문맹수준이라.... 파천님 감사합니다
귀한 자료 다운받습니다.
우리음악을 빛내시는 멋지신 작곡가분들을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건강하십시요.
박인석 지휘자님.. 잘 계시지요?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자료입니다~~잘 받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