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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운명이라도?
금남정맥 계룡산의 우중 통과가 정해진 운명이라도 되는가.
전번에 연 이틀을 빗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포기한 것은 계룡산
구간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계룡산의 명물 자연성릉과 암봉들을 청명하고 시야가 넓은 날에
지나가고 싶었건만 중장리행 버스에 올랐을 때는 또 비였다.
옹기촌 현갑수와 그의 곱상 노모가 반가이 맞으면서도 이구동성
한 마디씩 했다.
"어찌 비를 몰고 다니신대요"
거푸 포기할 수는 없기에 강행하려고 비옷 등 단단히 준비하는데
노파가 따끈한 매실차를 내놓으며 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전번에 끊었던 고개(만학골?)에 당도하기도 전에 이미 흠뻑 젖어
버린 몸이라 체온 관리에 이상만 없으면 된다.
수정처럼 곱다는 662m 수정봉(水晶)을 지나 금잔디고개에 내려
서서 비로소 소규모 단체를 만났다.
이미 잡힌 스케줄이라 강행했다는 그들은 갑사에서 천황봉 경유
동학사의 코스였는데 비 때문에 천황봉을 생락하겠단다.
다시 홀로가 된 나는 더욱 굵고 거세지는 빗줄기를 뚫어야 했다.
살짝 비켜있을 뿐이지만 삼불봉(三佛)이 보일리 없다.
이름이 암시하듯 삼불 이미지가 뚜렷하게 빚어진 암봉이건만.
쏟아지는 빗물로 자연성릉 바위와 로프, 철사다리가 마치 기름
칠이라도 한 듯 미끈거려 초긴장 상태였다.
저 아래 백척간두의 기찬 절경은 아예 꽁꽁 숨겨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을 느낄 수 없다 할까.
이름처럼 절로 된 괴암절벽의 위용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는데.
빼어난 관망소 관음봉 정자도 아무 구실을 하지 못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점심을 먹으려 했으나 5월
중순인데도 비맞은 손이 곱아서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무학대사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에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형국이라 하여 계룡산(鷄龍)이라 명명했단다.
더러는 쌀개봉 ~ 천황봉의 연봉이 닭볏(鷄冠)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이름의 유래야 어찌 됐건 금남정맥 끝부분인 845m 계룡산이 이
날만은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28봉과 7계곡의 장대함도, 오악(五岳)중 서악(西岳: 통일신라),
삼악중 중악(中岳: 이조)이라는 역사적 명성도 허명일 뿐이었다.
1970년대 초부터 이따금 코스를 바꾸며 오르내리는 동안 뇌리에
각인돼 있던 추억을 반추하는 것으로 자위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함께 간 초등학교 4년 아들이 선두그룹에 끼어 가다가 뒤로
처지는 지엄마때문에 속상해 하던 모습이 더욱 또렷이 떠올랐다.
지붕과 사방을 꽉 막아서 질식지경으로 답답했으나 다행인 것은
국립공원 답게 안전시설들이 비교적 잘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라
하겠다.
신들의 마을 별당마루
그러나 천황봉을 우회해 내려가며 정맥을 잡았다 놓쳤다를 반복
하다가 끝내 잃고 말았다.
목표물 부재 상태에서는 컴퍼스나 지도도 별무 도움이다.
원점으로 회귀해서 다시 시도해야 함을 어찌 모르랴.
다만, 그러기에는 너무 벗어난 듯 하며 기상이 협조를 거부하는
한 방황의 종결 보장도 없다.
의식적으로 좌로 틀어야 하는데 직진과 우편향이었나 보다.
결국, 내려선 길은 널티에서 중장리, 갑사 입구를 거쳐 신원사와
논산시 상월면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로였다.
도착한 마을은 신원사(新元) 입구 양화리(陽化) 별당마루.
마침 종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석양 볕이 나자 시골 여느 마을과
달리 정자 앞으로 중장년들이 나왔다.
이즈음 시골에서 젊은이 보기는 가뭄에 난 콩처럼 드문데.
그들에게 주변 상황과 민박집 등을 묻고 있는데 한 젊은 승려가
친절한 모습으로 참견해 왔다.
그는 이 늙은이의 안내자를 자임하며 자기 거처로 가자 했다.
그의 채근에 엉겹결에 망설임을 접고 그를 따르고 있지 않은가.
그를 따라가는 내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었으나 짐짓 외면하고 골목들을 돌아돌아 가는데 대개의
집에 간이(?)불당이나 신상(神像)이 눈에 띄었다.
피상적, 외견상으로는 보통 시골 마을과 다를 것 없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니 사뭇 달랐다.
사람들의 복색(服色)이 그렇고 나붙은 간판들도 그랬다.
마을 곳곳에 서있는 대형 신상들과 괴이한 주술들도 그러했다.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장했다 해서 별당마루가 됐다는 마을이다.
그런데 지금은 제신(諸神)의 마을이 되었단다.
온 마을 가가 호호가 각기 신들을 모시고 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토착민이나 외지인 불문하고 모두가 신을 받은 사람들
이며 신들과 무관한 사람이 여기 있을 리 있겠느냔다.
그래서 전 계룡산 자락에는 신을 받으러 온 외지인의 수가 평균
5천명이며 이는 토착민의 몇곱이란다.
내가 뭘 물었을 때 하나같이 모르쇠로 일관한 이유도 그들이 다
외지인들이기 때문이라고.
곳곳에 신(神) 내린 남녀 젊은 도사(?)가 많은 까닭을 알만 했다.
혹, 실업자 대란시대의 한 방편은 아닌지?
이런 전제로 보면 이 늙은이 또한 그 범주에 드는 게 당연하겠다.
특히 공군 장교용 레인 코트(rain coat)에 커다란 배낭, 긴 머리,
하얀 수염의 차림은 더욱 그리 보일 것이다.
도사중 도사, 왕도사....
어쩌면, 그 승려도 이런 내 외관에 속은 것 아닐까.
나의 신은 신중의 신
승려의 거처는 한 칸의 셋방.
아직도 빗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몸으로 방에 들어가기가 뭣해서
그냥 떠나려 하는데 승려는 이 밤을 이 방에서 유하고 떠나란다.
이런 만남도 억겹의 인연이라며 거의 강권했다.
집 주인인 늙은 보살이 나서서 더욱 권했다.
사양의 이유로 내세운 흠뻑 젖은 내 옷들도 개의되지 않았다.
밤이 이슥할 즈음이었다.
승려와 나, 또 한 사람 도사 등의 막걸리 파티가 무르익어갈 쯤에
늙은 보살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참으로 진지하게 청했다.
"저 좀 봐주세요. 너무 맘 아파서 못살겠어요"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으나 신(神)을 따라 강원도 원주에서 여기
까지 내려와 뿌리내리고 살고 있다는 그녀다.
불당까지 모시고 사는 68세의 이 보살이 나를 하룻밤 유하라고
강력하게 권한 이유가 이것이었던가.
자기를 좌지우지하는 신력(神力)의 한계를 이 대도사(?)를 통해
극복해 보려 했던가.
그녀의 낙담이 너무 컸을 텐데 유감이다.
보살이 나간 후 도사가 설명했다.
신들의 위계(位階hierarchy)가 철저하다고.
가계(家系)로는 부모 자식간이라 해도 모시고 있는 신의 위계에
따라서는 부모가 자식을 깍듯이 섬기는 경우가 흔하단다.
그러니까 그 보살이 내게 와서 애원한 것도 내 신이 자기가 모신
신보다 한참 상위의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
하긴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의 세계가 다 그러하지 않은가.
그리고 동일한 역할을 하는 신이라도 권위면에서는 태백산신이
으뜸이고 다음으로 계룡산신이라고.
헤게모니(hegemonie) 싸움이 그들 세계엔들 없겠는가.
그래도 개도 안먹을 지방색 만은 없겠지.
그러고 보니 나의 신이 대단한 신인가 보다.
문득 생각이 났다.
누군가가 점치러 갔다가 내 신수도 보려고 사주를 내밀었더란다.
순간, 잘 나가던 점쟁이가 마치 경련이 일어난 듯 살래살래 고개
저으며 더듬는 말로 봐줄 수 없으니 나가달라 하더라나.
과연 나의 신이야 말로 제신이 알아서 기는 신중의 신이 아닌가.
잠간의 오수(午睡) 중에 밖에 나가보라는 계시에 뛰어 나갔다가
사람들에게 둘러 쌓인 나를 만나게 되었다는 35세의 승려.
그래서 내게 각별해야 한다던 이 승려의 법명은 묘유(妙有)다.
묘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승려가 염불은 하지 않고 온 종일 막걸리 마시는 것이 기도라니
참으로 해괴한 수행(修行)의 괴승이다.
그러나 동자승 때부터 장장 18년의 만행(萬行)으로 법력이 출중
하다며 그의 비서를 자임하는 45세의 도사는 제공(濟空)이다.
대학의 공업경영학과 출신으로 병신(病神:질병을 다스리는 신)을
받기 위해 하던 사업까지 버리고 영월에서 예까지 왔단다.
굳이 병신을 원하는 까닭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빈곤층 환자들을
위해서 라니 진정 그의 소원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제공은 "제 방이 스님의 방보다 크고 깨끗하고 조용합니다"
하더니 자기 방을 통째로 내게 내주고 승려의 방으로 갔다.
늙은이를 편히 쉬게 하려는 갸륵한 배려일 것이다.
묘유는 밤새 내 옷과 신발을 말리느라 공을 많히 드린 듯 했다.
어쨌거나 무속마을 제신의 보살핌으로 나의 한 밤은 편안했다.
정맥에 짜증을 부리는가
아무튼, 금남의 계룡산은 이 늙은山나그네를 한 순간에 왕도사로
둔갑시켜 기상천외의 행복한 체험을 갖게 했다.
이른 아침, 정상적으로 하산했으면 날머리가 됐을 엄사리로 갔다.
상월면으로 나가 논산시 터미널에서 엄사리행으로 환승해서.
엄사리는 원래 논산시 두마면(豆磨) 땅이었는데 이 일대를 중심
으로 하여 계룡시가 신설되었다.
연전에, 이탈했던 그 구간을 다시 찾아갔을 때 엄사리는 두마면
에서 엄사면(奄寺面)으로 분면되어 있었다.
한데, 공교로운 것은 그 날도 비를 흠씬 맞았다는 점이다.
계룡산 등산에서 청명했던 날은 단지1번 밖에 없는 것으로 기억
되리만큼 말짱하다가도 종일 비를 쏟으니 말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금남정맥의 계룡산은 우중통과가 운명인가.
사전에 기청제(祈淸祭)라도 드려야 할 건지.
그런데 음절이라는 절이 있어 유래되었다는 엄사리를 종주자들
중에는 '암사리'라고 고집하는 이들도 있다.
아마, 한자 奄(엄)자와 庵(암)자를 혼동 혹은 착각한 탓 아닐까.
꽤 큰 아파트 단지가 된 엄사리에서 양정고개 까지 정맥 잇기는
난개발과 철로로 인해 인내심이 필요할 만큼 만만치 않다.
그러나 잠간의 오름이 있을 뿐 천마산 이후로 황령 한하고 고만
고만한 봉들이 많아 지루하긴 해도 퍽 수월한 정맥길이다.
높지 않은(287m) 천마산은 어느 새 계룡시민의 산이 되었나.
체육 시설을 활용하고 천마정(天馬亭)을 다녀가는 시민이 적지
않거니와 시 전모가 한 눈에 들어오는 팔각정이 일품이다.
비는 그쳤는데도 여전히 흐린 날씨가 계룡산을 감춰 유감이기는
했으나 맑은 날엔 계룡산뿐 아니라 멀리까지 조망될 수 있겠다.
전국 최소시(最小市)라 하나 삼군의 본부가 자리잡은 국방도시,
계룡시는 바야흐로 역동적(dynamic)이다.
새 도로가 닦여가고 조성되어 있는 넓은 단지에는 고층아파트와
업무용 빌딩이 부지런히 키를 키워가느라 요란한 중장비 굉음이
팔각정까지 들리는 듯 했다.
2004년 5월 16일 아침, 계룡시의 모습은 이랬다.
무수한 신도시가 태어났으나 평판은 하나같이 실패작이다.
그랬다 해도, 농산간(農山間)의 계룡시만은 여유와 조화의 균형
잡힌 도시로 정착되길 바라며 팔각정을 떠났다.
한참 진행하다가 등의자처럼 생긴 작은 바위에 앉아 보았다.
아주 편해서 아예 배낭도 벗어던졌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일어나 얼마
가지 않아 정맥 아래 좌우의 도로와 마을 등이 설지 않았다.
괴이쩍은 생각이 드는데도 그냥 전진하는데 저만치에 아까 앉아
있었던 천마산 팔각정이 나타나지 않은가.
이런, 어찌 이런 일이?
오던 길을 되돌아 가고 있으니....
어제는 날씨 때문에 그랬고, 오늘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생각
때문에 엉망이 되어 가는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고쳐먹어 보지만 어이없게도
정맥에 짜증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
알바하고 반복해 걷기가 비일비재인데 이 정도에 왜 그랬을까.
계속되는 해프닝 탓이겠지만 금남정맥에 미안한 마음이었다.
종심(從心)에 든 아들의 이런 꼴에 어머니의 실망이 크시겠다.
늙은 山나그네의 초심으로 돌아가 부지런을 떨었다.
연산면 천호리와 두마면 회음동을 연결하는 임도를 가로지르고
천호산(天護山)도 넘고 벌곡면 대목골과 연산면 한림정을 잇는
대목재도 지나 곧 2차선 포장도 상의 황령(黃嶺)에 내려섰다.
연산면과 벌곡면의 각 심장부가 통하는 지방도로 고개마루다.
정맥 종주자들 거개가 황룡재라 부르는 재다.
이정표까지도 그리 표기되어 있다.
예전에 연산면 황령마을에서 벌곡면으로 넘던 느르뫼재의 한자
이름이며 우리 지리의 교과서인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의 표기도
黃嶺으로 되어 있건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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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계룡에 오셨었군요. 계룡산에 영험하신 도사님이 나타나셨다고 대전시내에 소문(?)이 쫘~~악. ㅎㅎㅎ 선생님 건강하시죠!!!!
대전 시내까지는 너무 멀어 약발이 들지 않았겠지만 그 마을에서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 이렇게 라도 뵙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