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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한국 개신교회의 성찬식 분위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성찬이 준비된 탁자는 흰 보자기로 덮여 있고, 성찬 예식을 집례하기 직전에 목사와 장로는 흰 장갑을 낍니다. 마치 장례식장에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성찬 예식 중에 목사가 낭독하는 성경 구절도 거의 대부분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엄숙하고 무겁게 들립니다. 분병과 분잔이 시행되면서 피아노나 오르간 반주는 한층 더 구슬퍼집니다. 성찬식에서 부르는 찬송가도 대개 이렇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얼마 후 떡과 잔을 받은 성도들이 훌쩍이며 슬픈 분위기는 더욱 고조됩니다. 이쯤 되면 나머지 사람들도 왠지 슬퍼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은혜를 많이 받은 것만 같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한국 교회 성도들은 성찬식을 예수님의 장례식이나 추도예배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성찬식은 분명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이 아닌가요?” 하는 반문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예식이 맞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168문의 답에서 말하듯 “그리스도가 명하신 대로 떡과 포도주를 주고받음으로 그분의 죽으심을 보여주는 신약의 성례”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죽으심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념할 것인가 입니다. 더 나아가 성찬의 본질이 과연 주님의 죽음에 국한되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는 글
선하신(good)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좋은(good) 세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선하심을 사람들이 보기만 하며 즐기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창조 세계의 일부를 맛보아 알길 원하셨기에 그것을 우리에게 먹을거리로 주셨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 즉 식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큰 복 중 하나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을 묻는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맨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통해 그분을 즐거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복입니다.
-1. 성경에 나타난 식사
성찬은 말 그대로 ‘거룩한 식사’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찬의 본질은 식사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집필 동기이기도 합니다. ‘성찬’을
영어로 살펴보면 그 말이 지닌 식사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성찬을 지칭하는 원래 문구는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입니다. 왕이신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식사가 바로 성찬입니다. 성찬의 본질을 식사로 이해한다면, 성찬에 제대로 참여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먹는 경험을 하고 배부름을 느껴야 합니다.
-2. 식사: 성찬의 본질
종교개혁 당시 성찬의 본질뿐 아니라 본질을 설명하는 방식을 놓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실제로 이 둘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먼저 해석해야 그 몸을 어떻게 먹는지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찬에서 “무엇을 먹는가”는 “어떻게 먹는가”라는 질문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어떻게 먹는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합하며 어떤 교제를 누리는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을 어떤 식으로 주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의 본질로 규정한다면, 여기에서 제기된 질문들은 우리의 구원에 중요한 사안이 됩니다.
-3.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먹는가?
모든 신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입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바뀌면 그와 관련된 교회의 실천적 측면도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교회가 성찬을 일 년에 고작 한두 차례 실시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교회의 몰이해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대로 성찬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다면 성찬은 물론이고 교회의 전반적인 일을 실천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4. 성찬의 실제
성찬에 관한 이 책을 읽으면서 혹시라도 성찬이 최고의 예배 요소요, 예배 갱신의 전부라는 오해를 하지 않길 바랍니다. 다만 그동안 예배에서 성찬이 소외되었던 문제를 짚어보고 올바른 자리매김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누가 뭐라 해도 설교임을 전제합니다.
성찬은 말씀, 세례, 기도와 더불어 은혜의 수단이지 예배 갱신이나 부흥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성찬을 은혜롭게 시행하려는 동기가 무엇일까요? 성찬으로 예배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여 성도들에게 참신한 느낌을 주려고 한다면, 출발점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리 새롭고 참신한 예식도 시간이 지나면 진부해질 수 있습니다. 성찬 예식을 하나의 목회수단으로 보며 새로움을 추구할 게 아니라 성찬 자체가 온전히 은혜의 수단이 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5. 성찬으로 회복되는 예배
“누가 크냐”는 교회 역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기까지 했습니다.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나뉜 중요한 두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서방교회였던 로마가톨릭교회의 주교는 베드로의 후예인 자신들이 다른 모든 주교보다 크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거부한 동방교회를 출교시켰습니다. 개혁교회는 주교나 감독이 다른 목사들보다 더 크다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말씀의 종은 어디에 있든지 동등하다는 것을 신앙고백으로 확정했습니다. “누가 크냐”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
에서 더 구체적으로 대답하십니다. 이 대답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봅니다. 이 질서를 알아야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올바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6. 성찬 설교
지금까지 식사로서 성찬이 주는 유익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이 식사가 ‘소망의 식사’라는 점을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우리가 성찬 속에서 즐기는 식사는 참되지만 완전한 식사는 아닙니다. 참된 식사는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듯 마지막 날에 성대하게 벌어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궁극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찬을 통해 소망 가운데서 그 식사의 배부름과 기쁨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찬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띱니다. 믿음으로 이 양식을 먹는 사람은 미래의 완전한 식사를 소망하게 되고, 소망 가운데 이 식사를 바라보는 사람은 믿음으로 생명의 양식을 먹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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