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러울 수 있다. 여느 재난영화와 달리 <컨테이젼>은 우리의 심장을 움켜쥐려 달려오지 않는다. 이 뛰어난 (그리고 비싼) 배우들을 한데 모아놓고 가족애나 영웅담, 눈물겨운 드라마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좋게 말하자면 사실적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평평하다. 극적인 굴곡을 배제한 채 완성해낸 이 정교한 재난보고서를 제대로 즐기려면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각 이익집단의 이해관계,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과 그것을 역으로 추적해가는 과정, 재난 상황에 대한 전문가와 대중의 온도 차 등을 차분하고 공평하게 보여주는 <컨테이젼>은 제목 그대로 ‘감염’이라는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비록 기존의 재난영화가 취했던 전략과는 전혀 다르지만 사실적인 정보들로 가득 찬 이 영화의 완성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 <컨테이젼>을 건조한 정서의 다큐 색채로 정보 제공에만 주력한 영화라 단정짓기엔(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뭔가 불만족스럽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재연배우들로 만든 이 영화를 여전히 극영화의 자장 안에서 해석하고 싶다. 화려한 배우들의 호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여러 교집합의 중간에 위치한다. <아웃브레이크> 같은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이면서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이 매력적이었던 영화 <트래픽>을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의 신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재현방식이 환기시키는 사실성의 실체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진짜 전염되는 것은 무엇인가
<컨테이젼>은 메시지가 아니다. 이 영화는 관객과의 소통을 바라지 않는다. 인류를 병마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거창한 영웅주의도 없고, 아내를 잃고 나서야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평범한 중년 남자(맷 데이먼)의 개인적 내면에 집중하지도 않는다. 전염병이 펴져나가는 과정, 혼란에 빠지는 사람들과 그에 대한 대처 등 일어날 법한 일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관객에게 유통시킬 뿐이다. 문제는 이 정보가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라는 데 있다. 여기서 ‘사실성’은 표현의 차원이라기보다 재현 양식에 근거한다. 그것은 우리가 뉴스를 비롯한 여러 보도 매체에서 봐왔던 익숙한 방식이며, SAS나 조류독감 등의 실제 전염병을 통해 이미 접해왔던 사실들이다. 이는 ‘정말 일어날 수 있는가’가 아닌 ‘언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공포를 자극한다. (SF영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기존 재난영화와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컨테이젼>은 인류의 멸망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하지 않는다. 전 지구적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영화 속 바이러스는 인류의 1%도 죽이지 못한다. 인류 전체로 보면 미미한 수치. 하지만 이것은 몇 천만명이 사망한다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병에 걸린 당사자에겐 사느냐 죽느냐, 0과 1의 문제다. 실제로 죽는 것은 내 이웃 한 사람, 내가 알고 지내던 선배, 친구, 가족, 라이벌들이다. 그들의 죽음은 실제의 영역에 있다. 이 순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 공포로 전환된다. 백신 없는 전염병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덕분에 단지 몇개의 정보 조각을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실체 없는 공포의 윤곽을 뚜렷하게 인지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바이러스의 실체보다 공포의 윤곽을 잡아나가는 데 더 심혈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기존 재난영화들은 중심인물의 사연을 파고들면서 드라마를 구축한다. 그러나 <컨테이젼>은 그곳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대신 각 등장인물에 대한 균등한 시각을 유지한다. 아내를 잃고서야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남자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조사원처럼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사연들로 가득하지만 감독은 드라마를 얇게 펴바르기만 할 뿐 사연에 감화될 시간을 제공하지 않는다. 몰입과 감정이입을 배제한 이야기는 단지 비중의 차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물리적인 차원에서 ‘사연’을 ‘사건’으로 변모시켜버린다. 드라마가 있을지언정 몰입할 정도는 아닌 상태. 그야말로 뉴스의 정보 재현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뉴스나 다큐멘터리인가? 아니다. <컨테이젼>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사건을 평면화하고 드라마를 얇게 만든 자리에 남는 것. 인물이 3차원의 현실이 아니라 2차원의 정보처럼 인식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 그것은 ‘이동’ 그 자체의 흔적이다. 정보의 이동. 사연의 이동. 바이러스의 이동. 그리고 공포의 이동. <컨테이젼>은 바이러스의 이동경로를 보여줌과 동시에 공포의 유통과 확산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전 지구적인 공간을 하나로 묶어낸다.
하나의 지구가 아닌 하나의 삶
소더버그는 <트래픽>에 이어 공간의 영화를 그린다. 분할된 이야기들을 연결시키고 통합하는 소더버그의 연출은 전작 <트래픽>에서 이미 선보였지만 형식(주로 필름의 컬러)을 통해 엄격할 정도로 구분되었던 전작과 달리 <컨테이젼>에서는 더이상 공간을 분할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전세계로 전염병이 퍼져나가는 상황을 그려낸 이 영화는 현재의 상황을 ‘전 지구적 연결 상태’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오프닝의 의자, 잔, 손잡이와 같은 이미지 나열은 접촉만으로 감염되는 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에 그치지 않고, 바이러스를 매개로 물리적으로 단절된 공간들을 하나로 통합시킨다. 영화 속 감염 경로는 오늘날 세계와 사람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증거다. 비단 물리적 연결뿐만이 아니다. 폭로 전문 블로거가 올린 검증되지 않는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퍼져나가고, 전세계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가짜 치료제인 개나리액을 구하기 위해 약국을 턴다. 오늘날 공간은 물리적으로 분할되어 있을지 몰라도 심리적으로는 이미 분할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순간 영화는 잔인하게도 전 지구적 연결이라는 환상을 걷어가버린다. 그것은 감염이라는 공포가 가져온 착각일 뿐이다. 감염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어갈 수 있지만 백신은 그렇지 않다. 홍콩에서 발생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미국과 유럽을 휩쓸고 전 인류의 공포의 대상이 되지만 백신을 구하기 위해 세계보건기구의 조사관을 억류하는 홍콩인들의 모습은 힘의 역학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공포에 감염된 사람들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지점이야말로 <컨테이젼>이 전하는 전 지구적 연결과 단절의 진실이다. 세계가 전염병으로 통합되어 있는 순간에도 각국의 이해관계, 집단간의 역학관계에 따라 백신은 제한된다. 세계는 그렇게 닫혀 있다. 전 지구적 연결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은 도시를 탈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렬에서 다시 한번 극적으로 드러난다. 전세계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지만 도로를 봉쇄시키는 것만으로 간단히 차단되는 전 지구적 연결의 진짜 얼굴. 인터넷으로 정보가 평등하게 공유되고 기업과 국가의 음모를 파헤칠 수 있으리라 믿지만 가짜 정보에 현혹될 수밖에 없는 정보의 폐쇄. 얇은 유리 격벽에 칸칸이 갇힌 사람들은 전 인류 혹은 지구촌이라는 허상에 취해 공포라는 악의를 확실하게 유통시킨다.
그럼에도 <컨테이젼>은 단절이 아닌 하나의 통합된 세계를 보여준다. 다만 그것은 전 지구적 시점이라기보다는 일상의 시점에 가깝다. 어쩌면 이 지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극영화의 영역에 있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를 휩쓰는 바이러스와 피어나는 악의 속에서도 균형있게 조명되는 주요 인물들의 개인적 선의는 흔들리지 않는다. 혼란 속에서도 공공질서를 지키려는 평범한 남자, 그저 내 가족의 안전을 바라는 소박한 바람, 마을 아이들에게 필요한 백신을 위해 기꺼이 인질로 잡히는 수고를 마다지 않는 조사관처럼 전 지구적 연결과는 무관하게 개인은 그저 ‘살기 위해’ 혹은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야말로 바이러스의 흐름이나 인류의 1%라는 숫자가 아닌 ‘내 눈앞의 한 사람’이라는 실체적 진실이다. 하나의 지구가 아닌 하나의 삶. 비록 건조한 다큐 재현 방식을 취함에도 <컨테이젼>이 포기하지 않은 메시지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손이 씻고 싶어졌다면 당신도 거기에 동의한 것이다.
<출처 - 씨네21. 2011.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