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내가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오래된 미래’서점에서 였다. 그날은 부담이 가지 않는 소설 책 서 너 권을 골랐고 은희경의 소설도 포함되었다. 서점 여 주인은 나에게 ‘이런 종류의 소설을 좋아하나봐요?’라는 말을 했다. 그 때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웃고 말았다.
‘이런 종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의문부호를 달고 있었다. 창피한 혹은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나는 이번에 읽은 책이 그녀의 책을 처음 읽게 되었기에 ‘이런 종류’라는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은희경의 독특한 기술법과 그녀의 솔직한 표현법을 알 수 있었고 어쩌면 페미니즘을 담은 소설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사실 보통의 여자들의 경우가 이 책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렇게 쓰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빨려 들어가서 좀 당황하기도 하고 또 말도 안 되는 진희라는 여성에게 허튼 소리도 해 보았다. 다음은 7쪽과 8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셋은 좋은 숫자이다.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 이 어리석은 은유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당연히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 둘이라는 숫자는 불안하다. 일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때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은 첫 선택에 대한 체념을 강요당하거나 기껏 잘해봤자 덜 나쁜 것을 선택한 정도가 되어 버린다.
셋 정도면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일이 잘 안될 때를 대비할 수가 있다. 가능성이 셋이면 그 일의 무게도 셋으로 나누어 가지게 된다. 진지한 환상에서도 벗어나게 되며, 산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체중을 양다리에 나눠 싣고 아랫배로도 좀 덜어왔으므로 몸가짐이 가뿐하고 균형 잡기가 쉽다. 혹 넘어지더라도 덜 다칠 게 틀림없다. 실제로도 내게는 언제나 세 번째 선택이란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애인이 셋 정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가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파격적인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한 남자와 관계를 맺고 그 남자와 헤어지면 다른 남자가 있으니 슬퍼 할 이유도 없고 또 그것조차 싫어할 이유가 없다.
주인공인 진희는 현석, 종태, 전남편 상현 등 세 명의 남자와 엮여 있으면서 위의 소설의 일부에서 나열한 ‘세 명’에 대한 정당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세 남자와의 인연과 그들과 만나서 나누는 사랑이야기. 그리고 대담한 기고를 하고 또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어쩌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살아나간다.
그녀는 애인은 셋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상대에게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게 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녀는 현석과 가장 많은 무게를 가지고 사랑을 나눈다. 그러면서 자신의 친구들의 사랑 그리고 이복 여동생과의 다듬어지니 않은 관계조차도 뛰어 넘는다.
그녀의 상대로 유부남도 상관이 없다. 결혼과 이혼, 임신과 낙태, 불륜과 양다리까지 서슴지 않는 그녀를 보는 나의 시선은 사실 곱지 않았다. 특히 낙태를 세 번 씩이나 하는 행위가 자신의 사랑의 결과에 의한 책임을 떠넘기려는 모습으로 다가와 불편했다. 그냥 물건을 사듯 낙태를 하는 것은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