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이 승천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부활한 예수를 만나러 찾아가야 합니다. 아니면 예수가 일정을 짜서 세계 각국을 믿는 사람들 만나러 다녀야 합니다. 지금 천주교 교황처럼 말이죠. 얼마나 서로에게 힘든 일입니까. 그래서 성령으로 오실 것을 약속하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부르기만 하면 찾아가겠다. 어디든지 어느 때든지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을 기념하는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돈 꾸러 갔을 때 세 종류의 반응이 있다.
1. 다 내어주는 경우, 아낌없이 도와주는 경우, 부모님의 마음으로 모든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경우 - 정말 구세주를 만나는 기분일 것이다.
2. 얘기는 다 들어주지만 자신의 어려운 얘기를 하면서 오히려 도움을 거꾸로 요구하는 경우 - 듣다보니 상황이 역전되는 경우
3. 문전박대하는 경우, 비난과 욕으로 무안을 주면서 도움은커녕 욕만 들어먹는 경우 (그럴 줄 알았다. 죽든지 살든지 얼씬도 말아라.)
1의 경우는 정말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크게 도움이 되고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는 물론이려니와 그래도 인생이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또 그래도 내 인생 실패하지는 않았구나 생각하게 된다.
또 3의 경우는 그 서러움과 분함에, 배반감에 독기를 품게 되고 그 독기를 잘만 이용하면, 즉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거나 또는 독기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을 경우 인생을 반전시킬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의 경우다. 마치 들어주는 것처럼 다 얘기를 듣고는 위로도 해주면서 함께 그 아픔을 같이 해주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이 더 어렵다는 얘기로 결론이 나면서 결국은 도움 받을 사람이 역전되는 경우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도 이 중 하나입니다. 다 내어주는 교회, 나의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교회, 구원에 이르게 해주는 교회가 있고, 반대로 안티가 있다. 인터넷 상에 보면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넘쳐납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다. 기독교만 없으면 거의 모든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안티들을 보면서, 우리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가 두 번째 경우라는 것이 문제다. 나의 삶의 문제를, 구원의 문제를, 이 사회의 현안문제, 사회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러 갔지만 오히려 교회의 문제를 내가 해결하기 위해서 더 큰 짐을 맡는 경우이다. 교회가 짐을 덜어주는 곳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짐을 지워주는 경우다.
예를 들어 교회가 교인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이 교회를 걱정하는 교회. 또 돈 없어서 다니지 못하는 교회, 교역자들 눈치 보면서 신앙 생활하는 교회. 그래서 교회에 가끔 눈도장 찍으러 가는 불행한 사태까지 발생한다. 교회가 우리들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옥죄는 역할을 한다.
오늘 성령강림주일, 대축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고 성령으로 강림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오순절로써 성령이 강림해서 활동한 것이 바로 이 교회를 만든 것이다. 아주 중요한 날이다. 오늘은 우리 지금 모든 교회의 설립(창립)기념일이다.
부활절기 동안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몇 주 했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본질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성령의 어원은 ‘하느님의 숨’ - 곧 창세기에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 때 숨을 불어넣었다고 했는데, 이는 곧 생명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숨, 생명,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 여기서 발전되어 나온 것이 성령입니다.
그 성령이 강림해서 제일 처음 생긴 것이 교회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정의할 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느님의 선교 비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교회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본질이 사랑인 성령이 활동하는 상당히 긍정적인(복음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실제로 대부분의 제도적인 교회에서 율법적인, 즉 부정적인 측면이 나타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일을 꼭 지켜라. 맞죠. 그러나 내가 기뻐서 나오는 것과 지키라고 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나오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십일조 해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 마라. ~ 해라. 이런 엄숙주의, 경건주의는 남들을 정죄한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율법적인 하느님의 이미지는 대부분 권력이나 제도를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 이용당했을 때 나타나는 하느님의 모습이 그러하다.
반대로 사랑을 서로 내어주는 긍정적 이미지의 하느님 공동체인 교회는 우리에게 ~하지 마라. ~해라 식의 의무와 억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줍니다. 일과 짐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용기와 힘과 평화를 주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한 말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이, 우리 가정이, 우리 사회가 평화롭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을 받아라.’ 그리고 연이어서 하느님이 나를 보냈듯이 나는 너희들을 세상에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했으니까 그것을 받아서 혼자 박수치고 노래 부르면서 좋아할 게 아니라 그것을 갖고 세상으로 나가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나가서 뭐하라는 소리이겠습니까. 집집이 초인종 누르면서 전단지 나눠주라는 소리이겠습니까.
다음에 바로 나옵니다. 너희가 남들에게 죄를 용서하면 죄가 풀릴 것이오,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세상에 나가서 할 일은 죄를 풀어주는 일입니다. 여기서 죄는 범죄(CRIME)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원죄(SIN), 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말하는 (원죄)죄는 하느님을 떠나서 사는 것, 즉 우리 인간이 하느님이 애초 바라시던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는데, 나라는 자의식이 생기면서 하느님을 떠났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생기는 모든 것들, 병으로 고통 받는 것, 자유를 억압 받는 것,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경제적인 것)을 받는 것,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것,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것 - 이걸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세상에 나가서 이런 것들을 풀어주라는 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고, 성령이 강림해서 교회를 세운 목적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 또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서 무언가 하고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 근본주의 신앙을 갖고 있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말하길, 왜 교회가 그런 일을 하느냐, 교회는 사회사업기관이 아니다. 또는 시민운동(환경, 생명), 나아가서 정치하는 곳이 아니다. 또 친교공동체가 아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성령(하느님의 숨, 사랑)을 받아서 세상에 나아가서 그들의 죄를 풀어주라고 했거든요. 이것은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었다고 해서 의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 불쌍한 자를 도우셨다고 해서 사회사업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리의 집과 여인들의 집을 드나들면서 포도주와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고 해서 친교공동체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의 참 본질인 하느님의 사랑, 곧 성령을 받아서 세상에 나아가 발현된, 파생된 결과물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선교의 비전을 펼치되 그것은 반드시 우리들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실제 문제들과 너무 깊이 타협해서 그 본질을 상실해서도 안 되고, 또 그 본질만을 고집해서 오늘의 우리들 실제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그 균형을 맞추도록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또 그것을 식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성령이 공동체에 온 이유입니다. 물론 각각 개인에게도 오지만, 그래서 각자에게 맞는 은총을 주시지만, 그 각각은 흩어졌을 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또 그 크고 작음을 떠나서 지속시키기도 힘듭니다. 또한 하고 그 일이 옳은 일인지 식별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공동체(지금으로서는 교회)를 이루어 한 몸을 이루어라. 일치하라. 연합하라. 일치하고 연합하기 위하여 공동체 안의 균형, 질서, 배려, 식별, 조절, 분배. 한마디로 하모니를 이루는 것. 이는 성령이 임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성령강림대축일 맞아 우리가 다시 한 번 그 성령이 우리 교회에 임하기를, 또 각자의 가슴에도 임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