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형은 나 보다 한 살 많은데 나와 아래 윗집에서 태어나 같은 학교를 다니며 같은 반을 했고 어린시절을 같이 보내 말 그대로 나의 유일한 불알 친구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커서 짱구라고는 차마 못하고 장구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우리는 다 그를 짱구라고 불렀다.
실은 우리 동창들이면 누구나 아는 그의 별명이 하나 더 있다. 사연은 이렇다. 장구는 공부할 형편도 안됬고 공부에 취미도 없어 시험을 보면 늘 바닥을 쳤는데 어느날 국어 시험에서 95점을 맞았다. 이상하게 여긴 선생님이 그를 추궁하자 마침 옆에 앉아서 시험을 보던 나의 답안지를 컨닝했다고 실토를 했다. 그런데 나는 100점을 맞았는데 그는 95점을 맞아 그 이유를 살펴보니 주관식 답이 보시인데 그가 그것을 잘못 베껴 보지라고 쓴 것이다.
선생님은 우리 둘을 불러 매를 때리면서 장구에게 ‘너는 제대로 베끼지도 못해 보시를 보지라고 쓰냐 이 짱구보지야’라고 하셨다. 모두들 까르르 웃었고 나는 매를 맞으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그 이후로 그를 짱구보지, 줄여서 짱보라고 불렀다.
장구와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매우 달랐다. 장구는 거칠고 모험적이었고 나는 순하고 겁이 많았다. 우리 때 싸움은 보통 코피가 터지거나 한쪽이 아래에 깔리면 지는 것인데 장구는 코피가 터지든 얻어 맞든 절대 항복을 않고 이길 때까지 싸웠다. 그러니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반면에 나는 누가 싸우자면 싸움을 피하고 무조건 내가 졌다고 했다. 요즘 같으면 왕따나 괴롭힘을 당하기 십상이었을텐데 나는 다행히 장구 친구라 무사했다.
장구와 나의 공통점은 동물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장구네 집에 토끼집을 짓고 함께 토끼를 길렀다. 사방을 다니며 함께 토끼풀을 뜯어다 토끼장에 다가갈 때 토끼장에 매달려 바라보는 토끼들의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토끼들은 번식도 잘해 네 마리로 시작했는데 일년도 안되 20마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은 얼마가지 못했다. 장구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는데 술만 먹으면 주사가 심해 뭐든 부수는 습관이 있었다. 장구네 집은 겨울에도 성한 창문이 없었고 건듯하면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아버지가 싫은 장구가 아버지에게 심하게 대들었더니 화가 난 아버지가 토끼장으로 가서 장구가 사랑하는 토끼 한 마리를 죽였다. 장구는 토기들을 더 죽일까봐 토끼장 문을 열고 토끼들을 도망치게 했다. 다음 날 보니 다행히 다 도망가지는 않고 몇 마리가 토끼장 근처에 있었다.
시골에서 우리는 늘 붙어 다녔는데 나는 소극적으로 따라했고 항상 장구가 앞장섰다. 예나 이제나 착한 일은 재미가 없고 하지말라는 일이 재미있다. 그 분야는 장구가 도사였다. 공부 잘하는 범생 스타일인 내가 보기에 장구는 불가능이 없었다. 학교 까지는 거리가 십리쯤 되고 산을 넘어가야 했는데 도중에 유혹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장구가 고분고분 학교에 다닐 리가 없었다. 콩서리 참외서리 남의 밭 땅콩이나 고구마 캐먹기는 기본이고 학교 안가고 가재잡기, 개구리 잡아 다리 구워먹기 등 재미있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학교를 꼭 가야하는 것도 아니었다. 땡땡이 좀 쳤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땅벌 구멍에 함께 오줌을 누다 땅벌에 불알을 쏘여 불알이 탱탱부어 죽을뻔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한번은 참외 서리를 하다 들켜 둠벙 속으로 몸을 숨겼는데 둠벙이 너무 깊어 물에 빠져 죽을뻔하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는 점순이라는 여자애가 제일 예뻐 장구가 그 아이를 심하게 놀리고 괴롭혔다. 그 아이를 좋아한다는 관심의 표시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한번은 장구가 점순이는 점도 없는데 왜 이름을 점순이라고 지었는지 궁금하다며 틀럼없이 점순이 몸 어디에 점이 있을거라고 했다. 옷을 벗어보라고 할 수도 없고 좀 난감해 하던차에 우리는 비밀을 하나 알아냈다. 마을 뒤편 느티나무 아래 우물이 있는데 여자아이들이 거기서 목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겁이 많아 망설였는데 한번 호기심이 발동한 장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밤에 도둑고양이처럼 살살 기어 느티나무 밑으로 갔다. 그 때 장구는 몸집이 커서 이미 아랫도리가 거무스름했다. 예상했던 대로 여자 아이들 몇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에 하얀 여자 아이들의 나신이 드러났다. 여자 아이의 벗은 몸을 생전 처음 보는지라 가슴 두근거리는 소리가 온 산에 다 들릴 것 같았다. 앵두알만한 작은 가슴이 보였고 도톰한 엉덩이에 까만 점 하나가 보였다. 점순이 였다.
나는 나이 들어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나신을 본 적이 없다. 그후로 내가 몽정을 할 때면 이 여신의 몸이 나타나곤 했었다. 그 날 이후로 점순이에 대한 장구의 관심은 더욱 커졌고, 마침 그 때 내가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타자 장구가 나를 졸라 점순이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한 장 써달라고 했다. 나는 그 때 김소월의 산유화를 흉내내어 난생 처음 연애편지라는 걸 썼다.
망태골(우리가 살던 마을 이름)에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꽃 피는 망태골에 점순이가 살고
꽃 보다 더 아름다운 점순이가 좋아 나도 망태골에 산다네
장구는 이 편지를 점순이에게 주었다. 문제는 이 편지 끝에 사랑하는 장구가 라는 말을 쓰지 않고 무심코 내 이름을 썼던 것이다. 당연히 장구에게는 아무 연락도 없었고 나는 아주 나중에 점순이는 공장에 다니고 나는 대학에 다닐 때 점순이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 날 점순이는 그 편지를 가져왔고 내가 중학생일 때 어느날 이른 아침 뒷산에 갔다가 산나리꽃을 한아름 꺾어 자기에게 주었다는 말을 하며 자기는 한시도 나를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장구의 첫사랑은 점순이었고 점순이의 첫사랑은 나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기억 한켠에 그녀가 없었던건 아니지만 나는 이미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던터라 차마 그녀의 사랑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니라도 그 때는 사랑했었다는 말이라도 해달라는 그녀의 애절한 요청도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잔인무도한 일을 생각하면 나는 아마 지옥의 가장 뜨거운 밑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아, 점순씨.
장구의 아버지는 장구가 중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알콜중독으로 돌아가셨다. 그후 장구와 나는 각자 다른 길을 갔고 만나기도 어려웠다. 나는 순탄하게 공부하는 길로 가서 결국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취직을 했다. 반면에 장구의 가족은 뿔뿔히 흩어졌고 그 때부터 그는 안해본 일이 없었다. 중국집 배달원, 벽지 바르기 데모도, 이삿짐 나르기, 날품팔이 막노동꾼, 전봇대 세우러 다니기, 목수, 용접공 등등.
그러던 어느날 수십년만에 장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를 보고 싶으니 한번 찾아오라는 것이다. 나는 그 동안 그에게 무심했던 것에 대한 죄의식도 있어 바로 그를 찾아갔다. 가서 그 간 산 얘기를 들으니 온갖 고생을 하다 안정된 직장이라고 조선소에 들어가 용접을 하다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어 산재보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고향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의 돌산을 평당 천원씩 만여평을 사서 몇 년간 죽을 고생을 다해 개간하여 이제 좀 살만하게 되니 제일 먼저 친구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밭에 가보니 한켠에 돌맹이들이, 아니 바위가 수북했다. 처음 돌산을 살 때 주변 사람들이 다 미친 놈이라고 했고 아내는 이혼하자고 했다 한다. 그 많은 돌들을 다 캐내고 밭을 만든 것이다. 밭에는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정구지, 아옥, 파, 호박등을 심었다. 그 날 그는 내가 차에 싣고가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농작물을 주었다.
다음에 또 찾아가니 그는 내가 왔다고 동네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했다. ‘이보게들, 야가 내 불알 친구야. 나는 돌대가린데 야는 천재야. 서울대 박사야(나는 박사는커녕 석사도 아니다). 야는 성공해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학원 원장님이셔(나는 일개 학원 강사에 불과했다)’ 내가 아니라고 말을 하려니 말문을 막으면서 말했다. ‘야가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하다니까’
술이 좀더 오르자 그는 흥에 겨워 내 자랑을 계속했다. ‘나는 기독교쟁이들을 제일 싫어하는데 야는 기독교인인데도 참 착해(나는 교회를 졸업하고 안다닌지 좀 됬다) 아니 야는 목사님인데(신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목사는 아니다) 술도 잘마셔. 야가 외국에서 사온 이 술좀 봐. 술병만 봐도 죽이잖아. 청자 백자 그런 여자는 비교도 안되’
돌이켜보면 그와 나는 불알 친구이긴 해도 살아온 길이 너무 달랐다. 나는 어느새 먹물이 됬고 그는 말 그대로 몸둥이 하나로 사는 사람이 됬다. 몇 번 더 만나니 서로의 차이가 너무 커 어린 시절 얘기말고는 할 얘기가 별로 없었다. 그를 만나면 나는 내가 먹물인게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웠고 그는 아마도 자기가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 의식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런 차이가 우리가 서로 친구로 지내는데 무슨 장애가 된단 말인가? 나는 그를 만나고 약간 서먹해져 돌아올 때마다 내 탓을 하곤 했다.
그런데 어제 그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아내가 죽었는데 너무 슬프고 외로와 내가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열릴 다 제끼고 다섯 시간이나 쉬지 않고 차를 몰아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나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나는 정말 나쁜 놈야. 아내에게 고생만시키고 죄만 지었어. 이제 좀 살만한데 이렇게 급히 가다니. 농사는 내 목숨과 같은디 이제 나 혼자 어떻게 농사를 지으란 말야. 정구지 수백단도 번개 같이 빨리 묶고 아옥은 어찌 그리 이쁘게 묶는지 딸아이 머리 묶은 것 보더 더 이뻤어. 내가 술 먹고 새벽에 안 일어나려고 하면 여보 밭에 있는게 다 돈이야, 우린 배우지 못했어도 열심히 일해 애들 교육시켜야지. 정구지 한단에 천원이면 이백단만 묶어서 팔아도 20만원이야. 하늘이 이런 큰 복을 주었는데 어서 일어나 여보’
그의 울음 섞인 고백은 끝이 없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이렇게 속으로 기도했다. ‘하느님정말 죄인인 나 같은 놈은 벌하시고 여기 내 친구 성자는 지켜주소서.’
첫댓글 이 글은 쓰다 만 것인데 반은 실화이고 반은 소설이다
실화이든 소설이든 독자가 빨려 들어가게 좋습니다.
저는 몸으로 행하는 예술 춤을 젤로 여깁니다. 무용이 아닌 춤이라는 우리말.. 이 글을 읽으면서 제가 접한 최고의 공연이라 꼽는 이매방 선생님의 살풀이 춤 을 떠올렸습니다. 눈물까지 바쳤던 최초의 공연이기도 합니다.피나바우쉬보다 이매방샘을 엄지로 꼽는 이유는 남자의 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원색적인 춤도 함께....한편의 춤 공연을 보느 듯 몸의 세포들이 반응을 하는 글인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