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읍성(慶州邑城)
사적 제96호. 동부동(東部洞) 및
북부동(北部洞)에 걸쳐있는 읍성으로 서부동 2-4번지, 서부동93번지, 북부동 187번지, 북부동 1-4번지, 북부동 1-52번지 성동동
223-1번지, 성동동 386-6번지 등에는 경주읍성에서 옮겨다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석재들이 민가내에 있다.
고려시대와 그 이후에도 경주를 중시하여 왔으므로
읍성(邑城)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축성 연대는 불확실하다.
'동경통지'에는"고려 폐왕 우(禑)
무오(戊午)에 개축하였고, 높이는 12자 7치"라고 되어 있고 조선 문종~세조년간에 해자를 시설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 영조 22년(1746)에
확장되었는데, 당시 둘레가 약 2,300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집경전(集慶殿) 뒤쪽의 석축 구조물을
고려시대의 북문지로 추정하고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 에는"주위가 4,075자이고
높이는 12자인데, 성내에 우물이 80개소나 있다"고 되어 있고,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징례문(徵禮門)은 읍성의
남문인데, 조선 초기에 개축되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숭정(崇禎) 임신(壬申)에 인조 10년(1632) 부윤(府尹) 전식(全湜)이 남문인
징례문(徵禮門)을 중수하고 동․서․북의 3문을 차례로 세웠다"고 되어 있다.
지금은 거의 헐리고 약 70 m만 남아 있는데,
가로 40~50 cm, 세로 20~30 cm의 잘 다듬은 돌로 축성되어 있다.
성문은 동쪽에 향일문(向日門), 서쪽에
망미문(望美門), 남쪽에 징례문(微禮門), 북쪽에 공진문(拱辰門)이 있었는데, 당시 징례문에는 봉덕사(奉德寺)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달아놓고 매일 시각을 알리는 타종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축성한 석재의 돌더미 속에서 귀중한
석물(石物)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절에 있던 석탑부재 사적 제 96호인 경주읍성(慶州邑城)에 대한 보수작업 과정에서 다량의 유구가 발견됐다.
2004년 6월 20일 경북 경주시에 따르면
경주읍성의 치(성곽방어를 위해 돌출시킨 부분)부분을 보수하기 위해 읍성을 해체하자 지반석을 비롯한 성곽 축조 당시의 유구가 드러났다.
시는 유구와 성곽 부재 처리문제에 대해
문화재청에 기술지도를 요청했다. 이번에 발견된 유구는 읍성을 쌓을 때 사용된 지반석과 지대석, 수십개의 성곽부재로, 경주시는 이들을 보수작업에
활용할지 여부를 문화재청에 질의했다.
경주시는 지난해 4월 경주읍성 성곽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배불림 현상을 보임에 따라 사업비 2억원을 들여 56m 길이의 읍성 복원사업을 7개월만에 마친 바 있다. 경주읍성은 고려
현종(顯宗) 3년(1012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동쪽 성벽 90m 정도만 남아있다.
조선 선조25년(1592) 4월 21일에
왜병에게 쫓겨 안강(安康)으로 진을 옮긴 경상좌병사 박진(朴晋)이 9월 8일 경주읍성 탈환 작전에 경주 판관 박의장(朴毅長)을 선봉으로 하여
군기시(軍器寺)의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큰 성과를 올린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최효식,「경주와임진왜란,『한국향토사연구,국학자료원, 2002,
pp.35~49.)
성곽 전문가 12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의 자문으로 9개월여에 걸쳐 높이 2m, 가로 3.6m의
크기로 한지(순지)3배접의 동양화 수목 채색 안료로 제작된 ‘경주읍성 복원도’는 예술성과 역사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성곽의 범위에 있어서도 남측으로는 남고루, 전랑지,
서쪽으로는 형산강, 영병관, 남측으로는 봉황대, 북쪽으로는 북천, 고성까지 표기되어 있어 번성했던 조선시대의 읍성 일원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제작됐다.
‘경주읍성 복원도’ 제작에 심혈을 기울여 온 이재건(60)화백은 “기초자료 수집을 위해 동경통지,
경주읍지를 비롯한 많은 논문과 발굴보고서 등 관련자료를 참고 하였으며, 기본 자료에 의거 자문위원회의 조언으로 우선 하도가 먼저 제작 되었고,
이를 토대로 본도를 제작했다”고 말했다.
"기존 시점은
1800년경 조선 정조 20년에 제작된 ‘경주부지도’를 참고로 표현 했다”고 말한 이 화백은 “본 읍성도를 초안으로 축소시킨 영인본은 별도
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주읍성 옛 모습 되살려 관광자원화
신라 이후 천년 상징…2020년까지 605억 투입 연차적 복원
정비
신라 수도 경주에 고려시대에 축성돼 신라 이후
천년의 경주를 상징하는 경주읍성이 연차적으로 복원 정비된다.
경주시는 경주읍성의 옛 모습을 복원해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 오는 2020년까지 사업비 605억원을 투입해 토지 26,469㎡ 매입, 건물 150호 철거, 복원 기본계획 수립, 발굴조사,
동·북쪽 성체 1천100m 및 동·북문 복원, 성내 유적정비, 경관 및 주변 환경을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시는 지난해 5월 용역비 1억2천만원을 들여
한국전통문화학교에 의뢰했던 △경주읍성 복원 이론적 검토와 정비방안 구상으로 복원계획 수립 △성벽 1천100m, 치성 12개소 △동문 및 북문
복원 △경주관아 및 집경전지 등 성내 유적정비를 위한 기본계획수립 용역 최종 보고회를 9일 개최했다.
또 지난해 사업비 27억4천여만원을 들여 토지
4천503㎡를 매입하고 건물 15호 철거 및 철거지역을 정비했으며, 동부동 49-1번지 외 156필지 1만5천153㎡에 대한 문화재 지정구역을
확대지정 신청했다.
지난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사업비 140억원을
투입해 토지 1만2천801㎡ 매입, 건물 56호 철거, 성체 75m 및 치성 1개소를 복원했다.
월성이 신라 천년의 경주를 상징한다면 읍성은 신라
이후 천년의 경주를 상징한다는 의미가 있다.
향후 시는 사업비 437억원을 들여 토지
19,141㎡ 매입, 건물 철거 79호, 발굴조사 및 실시설계, 성체 1천25m 및 치성복원, 동·복문 복원, 성내 유적정비, 경관 및 주변
환경을 정비해 경주읍성을 복원할 방침이다.
사적 제96호로 지정된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로 고려시대에는 동경유수관(東京留守館)이, 조선시대에는 경주부아(慶州府衙)가 읍성내에 있었다.
이 읍성은 고려 현종 3년(1012)에
축성됐으며, 고려 우왕 4년(1378), 조선 태종~세조년간에 개축했고, 임진왜란 때 불타고 허물어진 것을 인조 10년(1632)에 중수하고
성문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이 읍성은 영조 22년(1746)에 다시
개축됐는데 당시 둘레가 약 2천300m로 성문으로는 동쪽에 향일문, 서쪽에 망미문, 남쪽에 징례문, 북쪽에 공신문 등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
일부 남은 성체는 이 때의 모습이다.
이 읍성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멸실됐으며, 일부
남아있던 동편 약 75m의 옛 성벽이 허물어져 2004년 복원할 당시 경주읍성의 치(성곽방어를 위해 돌출시킨 부분)보수를 위해 읍성을 해체하자
지반석을 비롯한 성곽 축조 당시의 유구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이후 북쪽의 도로변 일부를 발굴한 결과 치의 기초가 그대로 확인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