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했다. 이날부터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유신체제가 붕괴되었으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12·12사태를 일으켜 최규하 과도정부를 무력화했다.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투옥을 감행했다.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첫날의 학생시위는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이 참여하면서 점차 격화되었고, 도시빈민과 노동자까지 적극 참여하면서 무장항쟁으로 발전했다.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시위대는 시민군을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그러나 27일 새벽 0시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 등으로 무장한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으로 10일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일단락되었다.
장면 내각 총사퇴/1961. 5. 18
◀ 노모와 함께 선 장면(오른쪽)
1961년 5월 18일 장면 내각이 총사퇴했다. 1955년 장면은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해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1956년 부통령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1960년 조병옥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지만 3·15부정선거로 낙선했다. 부정선거에 대항해 4·19혁명이 일어나고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후, 새로 수립된 제2공화국은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제1공화국의 대통령제를 포기하고 내각책임제로 출발했다. 제5대 민의원을 거쳐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선출된 장면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그러나 여당인 민주당의 파벌싸움으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5·16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장면 내각은 장면의 총리 취임 9개월만에 해체되었다.
희극배우 김희갑씨 별세/1993
◀ 김희갑
우리시대의 희극인 '합죽이'가 50년 웃음인생을 마감하고 잠들었다. 1993년 5월 18일 노환으로 별세한 원로 희극배우 김희갑씨(71). 그는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50년대에 웃음으로 궁핍한 삶을 달래준 1세대 희극인으로 우리가슴에 남을 재인이었다. 영화 '팔도강산'으로 일세를 풍미한 배우로, '불효자는 웁니다'를 목놓아 부르며 실향민의 아픔을 어루만진 가객으로 그는 7백여 편의 영화와 악극, TV에 출연한 한국 연예계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김씨는 22년 함경남도 장지군 개마고원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아버지를, 수년 뒤엔 어머니를 잃고 어렵게 자라났으나 1940년 일본에 밀항, 메이지(明治)대학 2년을 수료했다. 1946년 반도가극단에 입단, 유랑극단 생활을 시작했다. 1952년 12월 김씨는 극단 동료 김영구씨(예명 김문희)와 결혼했다.
1958년 '청춘쌍곡선'으로 영화에 데뷔한 김씨는 1959년 '오부자'로 인기배우가 된다. 합죽이 김희갑과 막동이 구봉서, 홀쭉이 양석천, 뚱뚱이 양훈, 그리고 아버지 이종철 등 다섯명의 희극배우가 배꼽을 쥐게 한 '오부자'는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줬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는 좋든 싫든 정치권력층과 가까워졌고 때로는 협박과 회유를 받았다. 1959년 자유당정권 홍보를 목적으로 한 '코리아 코미디'라는 단체의 구성에 응하지 않았다가 정치깡패 임화수에게 폭행 당한 '합죽이 상해사건'은 유명하다. 김희갑의 전성기는 5ㆍ16이후. 1962년엔 국내에서 제작된 영화 1백10편 중 김희갑이 출연한 작품이 50편이 넘었다.
서정주 徐廷柱
1915년 5월 18일 태어남 / 2000년 12월 24일 죽음
◀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동천> 전문
서정주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히는 시인이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중앙고등보통학교·고창고등보통학교·대한불교전문강원 등에서 공부했다. 1933년부터 <동아일보>·<학등>·<신건설> 등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으로 당선되었다. 같은 해에 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함께 시전문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화사 花蛇>를 발표하는 등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였다. 1941년 동대문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동아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거쳐 1960년 이후로는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흔히 그의 시 세계는 세 시기에 걸쳐 변모를 겪은 것으로 평가된다. <화사집 花蛇集>(1941)으로 대표되는 제1기는 정열적이고 관능적인 생명의식을 특징으로 하며, <귀촉도 歸蜀途>(1948)에서 <서정주 시선>(1956)에 이르는 제2기에는 동양적 내면과 감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보여 준다. 나아가 <신라초 新羅抄>(1961)와 <동천 冬天 >(1969)을 발표한 제3기에 이르면 동양적 정신이 한층 더 심화되어 고전적 절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에도 <질마재 신화>(1975)·<떠돌이의 시>(1976)·<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등을 발표했다.
이문열/李文烈
1948. 5. 18 서울~
소설가
◀ 이문열
우리 시대의 능란한 이야기꾼!
작가 이문열은 매우 능란한 이야기꾼이다. 현란할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감을 나름대로 엮어내는 타고난 솜씨를 지닌 작가이다. 때때로 낭만적 세계 인식 경향과 관념편향적 창작 태도로 인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문열의 작가적 역량은 교양과 관념의 사실적 제시 과정에서 독특한 빛을 발한다. 또 그의 소설적 출발로서의 교양과 관념은 언제나 문제제기적인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그것으로 현실에 충격을 가하고, 시대와 맞씨름하고자 했던 터이다.
레퍼토리나 주제의 범역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이문열의 문학적 양상은 쉽게 요약되지 않는다. 1948년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난 그는 경북 영양, 안동, 서울, 밀양 등지를 전전하며 성장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부친이 월북했는데, 이것이 그의 성장 과정과 소설 창작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 <영웅시대> <변경>은 이같은 가족상황에서 비롯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사대 중퇴라는 파란만장한 학력의 소유자인 이문열은 산고 끝에 1977년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대구매일신문 입선, 1979년 중편 '새하곡'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같은 해 신의 구원과 인간의 논리 사이에서 고뇌하는 신학도의 갈등을 그린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80년대를 예고하는 신예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예고와 예측처럼, 허무와 좌절을 넘어 신생 의지를 불지피는 성장소설 <젊은 날의 초상>, 잃어버린 고향을 산문시적으로 재현한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서양 문명과 동양 정신의 대결을 의고적 관념체로 풀어놓은 <황제를 위하여>(1983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진정한 예술가의 길과 예도사상을 모색한 '금시조'(1982년 동인문학상 수상), 자신의 가족사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의 전후한 비극적 민족사를 다룬 <영웅시대>(1984년 중앙문화대상 수상), 독재자의 출현과 몰락 과정을 알레고리 형태로 그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년 이상문학상 수상), <영웅시대>의 세계를 더욱 확대하여 자전적 가족사를 바탕으로 한국전쟁 이후의 민족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자기 시대의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자 했던 <변경> 등의 작품으로 80년대를 풍미한 작가가 되었다.
90년대 들어서는 <시인>, <오디세이아 서울> 등을 출간했고, 최근에는 전통적 여성의 지혜를 바탕으로 현대의 페미니즘을 문제삼은 <선택>을 발표하여 거센 논쟁을 치루기도 했다. 비평가 유종호 교수는 이문열의 문학에 대해 "그의 폭넓은 교양 체험은 그의 작품 읽기를 기억할만한 교양 체험으로 끌어올려 준다. 내면성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정신 고양력과 '교양 체험'의 매력은 아마도 젊은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의 원천이 되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우찬제/문학평론가, 서강대 교수)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Johannes Paulus Ⅱ
(영)John Paul Ⅱ. 본명은 Karol Wojtya.
1920. 5. 18 폴란드 바도비체~.
456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된 비(非)이탈리아계 교황이다. 크라쿠프의 야기엘론니안대학교에서 폴란드 문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고 화학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1942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크라쿠프의 대주교 궁에서 숨어지냈다. 1946년 11월 1일 사제임명을 받고 로마의 안젤리쿰대학교(윤리학박사학위를 받음)와 루블린의 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루블린과 크라쿠프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된 그는 1958년 보좌주교로 임명받았고, 1964년 크라쿠프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1967년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978년 10월 16일 교황에 선출되어 10월 22일에 임명되었는데, 교회 역사상 최초의 폴란드인 교황이 되었다.
러셀/Bertrand Russell
정식 이름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of Kingston Russell, Viscount Amberley of Amberley and of Ardsalla.
1872. 5. 18 잉글랜드 몬머스셔 트렐렉 ~ 1970. 2. 2 웨일스 메리아너스 펜린듀드래스 근처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수학자·사회사상가. 몬머스셔 트렐렉 출생. 명문 귀족의 아들로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한때 동대학 강사로 근무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반전운동(反戰運動)이 화근이 되어 대학에서 쫓겨났고, 18년에는 6개월간 옥고를 치르었다. 그 후 유럽 각국과 러시아·미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대학의 강의도 맡았으나, 주로 저술에 주력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사회운동을 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며,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논리학자로서의 러셀은 G.프레게의 업적을 계승, G.페아노, 쿠츨러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J.W.R.데데킨트, G.칸토르 등의 현대수학의 성과를 근거로, 19세기 전반에서 비롯된 기호논리학의 전사(前史)를 집대성하였다. A.N.화이트헤드와 공저(共著)인 《수학원리》(3권, 1910∼13)는 바로 이의 성과이다. 그는 논리의 개념이나 연산(演算)을 기본으로 하여 전체 수학을 그것으로부터 도출(導出)했으며, 나아가 수학적 대상을 실재라고 간주하는 논리주의의 구상을 밝혔다. 그는 이 시도를 실수(實數)의 도출에까지 성공시켰으며 그 외에도 집합론 역리(逆理)의 발견, 그리고 그것의 해결을 꾀하는 계형이론(階型理論), 환원의 공리(公理), 기술이론(記述理論) 등 다양한 창의에 의한 공헌을 하였다. 논리주의의 구상이나 위의 여러 이론은 그 후 K.괴델 및 다른 학자에 의해 부정 또는 수정되었지만, 이 분야에 남긴 그의 업적의 의의는 현재도 상실된 것은 아니다.
철학자 러셀의 성과는 특히 이론철학에서 현저하다. G.E.무어, L.비트겐슈타인 등과 함께 케임브리지학파의 일원으로, 19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도 유력한 학설이었던 관념론에 대해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다만 그의 입장에는 시대에 따른 변화가 크게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한때지만 그는 영국 헤겔학파의 영향 밑에 있었으며, 마이농류(流)인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의 경향도 보였다. 이것에 관한 저서로는 《철학의 제문제》(1912)가 있다. 그러나 그의 인식론·존재론의 일반적 경향은, 한편으로는 자기의 논리를 소재(素材) 방법으로 삼았으며, 다른 면에서는 영국 고유의 경험론의 전통을 근거로 삼았다. 또한 논리적 원자론의 이름에서도 명백한 바와 같이 실재의 이론적 단위를 설정하여, 그것에의 환원이나 분석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한 점도 명백하다. 그의 사상은 빈학파나 훗날의 영국 철학의 발전을 위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윤리학에서는 처음에 무어와 거의 같은 입장을 취하였으나, 후에 논리실증주의자의 정서설(情緖說)에 가까운 입장으로 옮겼다.
사회사상가로서의 러셀은 케임브리지대학 졸업 직후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교우하여 마르크스주의에 공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를 방문, 혁명지도자와 혁명 후의 실정에 접하게 된 그는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의 경향은 서구적 자유를 근간(根幹)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로서, 정치이론도 과학이론과 같이 이데올로기나 광신적 독단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실천가로서의 러셀은 1907년 하원의원으로 입후보하여 낙선했고, 20년대는 일반대중을 위한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BBC 방송 출연 등으로 유명해졌으나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60년 ‘100인 위원회’를 구성, 핵무장 반대 연좌농성을 이끌어 네번째 부인과 함께 금고형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철학적 경력은 길고 또 그 다룬 주제가 다양할 뿐 아니라 그 입장도 다양한 변천을 보인다. 기호논리학의 수법으로 철학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그의 영향은 20세기 철학에 유례가 없는 것이다. 저서로는 위에서 소개한 것 외에도 《외계의 지식》(14) 《수리철학 서설》(19) 《정신의 분석》(21) 《물질의 분석》(27)《의미와 진실의 탐구》(40) 《서양 철학사》(45) 《자서전》(3권, 69) 등이 있다.
그밖에
1999년 에후드 바라크 노동당 당수, 이스라엘 새 총리에 당선
1998년 박세리, 98맥도널드 LPGA골프대회 최연소 우승
1997년 나차긴 바가반디, 몽골 대통령에 당선
1993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법안 국회 통과
1990년 동-서독 '경제통일' 협정 조인
1983년 김영삼 단식 시작 (~6월9일)
1981년 정부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서울지국 재개 및 마이니치(每日)신문 특파원 서울상주 허용
1981년 미국 잉여농산물 (PL 408호) 도입 종결
1980년 중국, 대륙간탄도탄미사일(ICBM) 실험 발사 성공
1980년 박찬희, 6차 방어전에서 일본의 오쿠마 쇼지에게 패배
1980년 미국 워싱턴주 세인트 헬렌즈산에서 화산 폭발
1979년 농수산부, 정부미를 가공 일반미로 속여 팔아 말썽
1978년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실시
1978년 이탈리아 상원, 인공임신중절 허용하는 법안 가결
977년 미국-영국-소련 3국 핵무기 및 대량파괴무기 해저저장 금지조약 비준서 교환
1977년 미국 소련 우주평화이용협정 조인
1977년 환경파괴병기금지조약 조인식이 제네바서 열림. 33개국 조인
1976년 경부고속도로 양산근처서 고속버스 전락 23명 사망, 25명 중경상
1974년 인도 지하핵실험 성공, 세계 6번째 핵보유국
1973년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랜킨 사망
1973년 한국문화재보호협회 발족
1970년 사학자 이홍직 사망
1970년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첫 중계 실시
1970년 한국-캄보디아, 국교수립
1968년 하일레 셀라시에 이디오피아 황제 내한
1963년 인도네시아 의회, 수카르노를 종신원수로 결정
1963년 최초의 의사(서양의학) 오긍선 사망
1961년 치안국, 전국 폭력배 1,500여명 검거
1951년 유엔 총회 대중공 전략물자 금수안 결의
1950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사회 집단방위군 창설등을 결의
1942년 조선의용대 임시정부 광복군에 편입
1933년 미국 테네시강 유역개발공사(TVA) 설립
1927년 제1회 연희전문대-경기의전 정기 야구전 개최
1922년 프랑스의 의사. 병리학자 라베랑 사망 - 1880년 말라리아 기생충 발견
1915년 시인 서정주 출생
1913년 샹송가수 샤를 트레네 출생
1909년 미국 연방의회 흑인 차별대우 철폐 결정
1904년 백인 노예 판매금지 조약
1904년 한국 러시아 조약 폐기
1899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개막(-7.29)
1885년 브라질의 대통령(1945-50) 두트라 출생 - 입헌민주주의 회복
1868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1895-1917) 니콜라이2세 출생
1804년 나폴레옹, 제정 선포-황제 즉위
1675년 미시시피강의 발견자 마르케트 사망
1452년 조선왕조 단종 즉위
첫댓글5.18 광주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독일 위르겐 힌츠 페터 기자의 국립 5.18 묘지 안장이 검토되고 있다. 그는 "필름의 마지막 1㎝까지 버리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고 다짐했다"는 말로 당시의 치열함을 회상하기도 했다는데..어제 5월 18일엔 민주항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고, 여야가 모두 망월동에 모였다고 한다.
첫댓글 5.18 광주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독일 위르겐 힌츠 페터 기자의 국립 5.18 묘지 안장이 검토되고 있다. 그는 "필름의 마지막 1㎝까지 버리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고 다짐했다"는 말로 당시의 치열함을 회상하기도 했다는데..어제 5월 18일엔 민주항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고, 여야가 모두 망월동에 모였다고 한다.
피해 보상, 진상조사 등등의 문제를 안고는 있지만, 광주 영령앞에 여야 모두가 머리숙여 참배할 수 있음이 매우 뜻 깊다고 하겠습니다.. 정치... 잘~ 되야 될텐데...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