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 노래/ 김소월
4월과 5월 노래
그리운 우리 임의 맑은 노래는
언젠가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임의 고운 노래는
해지고 저무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고히도 흔들리는 노랫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내 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임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임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잊고 말아요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히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묵념(默念)
김소월
이슥한 밤, 밤기운 서늘할 제
홀로 창(窓)턱에 걸어앉아, 두 다리 늘이우고,
첫 머구리 소리를 들어라.
애처롭게도, 그대는 먼첨 혼자서 잠드누나.
내 몸은 생각에 잠잠할 때. 희미한 수풀로써
촌가(村家)의 액(厄)막이 제(祭)지내는 불빛은 새어오며,
이윽고, 비난수도 머구 소리와 함께 잦아져라.
가득히 차오는 내 심령(心靈)은…… 하늘과 땅 사이에.
나는 무심히 일어 걸어 그대의 잠든 몸 위에 기대어라
움직임 다시없이, 만뢰(萬?)는 구적(俱寂)한데,
조요(照耀)히 내려 비추는 별빛들이
내 몸을 이끌어라, 무한(無限)히 더 가깝게.
먼 훗날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눈 오는 저녁
김소월
바람 자는 이 저녁
흰눈은 퍼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今年)은……
꿈이라도 꾸면은!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눈 타고 오시네.
저녁때. 흰눈은 퍼부어라.
담배
김소월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못 잊게 생각나는 나의 담배!
내력(來歷)을 잊어버린 옛시절(時節)에
낳다가 새 없이 몸이 가신
아씨님 무덤 위의 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어라.
어물어물 눈앞에 쓰러지는 검은 연기(煙氣),
다만 타붙고 없어지는 불꽃.
아 나의 괴로운 이 맘이여.
나의 하염없이 쓸쓸한 많은 날은
너와 한가지로 지나가라.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금잔디
김소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임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고적한 날
김소월
당신님의 편지를
받은 그날로
서러운 풍설이 돌았읍니다
물에 던져 달라 하신 그 뜻은
언제나 꿈꾸며 생각하라는
그 말씀인 줄 압니다
흘려쓰신 글씨나마
언문 글자로
눈물이라 적어 보내셨지요
물에 던져 달라 하신 그 뜻은
뜨거운 눈물 방울방울 흘리며
맘 곱게 읽어 달라는 말씀이지요
오시는 눈
김소월
땅 위에 쌔하얗게 오시는 눈
기다리는 날에는 오시는 눈
오늘도 저 안 온 날 오시는 눈
저녁불 켤 때마다 오시는 눈
애모(愛慕)
김소월
왜 아니 오시나요.
영창(映窓)에는 달빛, 매화(梅花)꽃이
그림자는 산란(散亂)히 휘젓는데.
아이. 눈 꽉 감고 요대로 잠을 들자.
저 멀리 들리는 것!
봄철의 밀물소리
물나라의 영롱(玲瓏)한 구중궁궐(九重宮闕), 궁궐(宮闕)의 오요한 곳,
잠 못 드는 용녀(龍女)의 춤과 노래, 봄철의 밀물소리.
어두운 가슴속의 구석구석……
환연한 거울 속에, 봄 구름 잠긴 곳에,
소솔비 내리며, 달무리 둘려라.
이대도록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초혼(招魂)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산
김소월
산(山)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山)새는 왜 우노, 시메산(山)골
영(嶺)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七八十里)
돌아서서 육십리(六十里)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不歸), 다시 불귀(不歸),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不歸).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오십년(十五年)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물에는 녹는 눈.
산(山)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三水甲山) 가는 길은 고개의 길.
개여울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못잊어
김소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나지요?!"
강촌(江村)
김소월
날 저물고 돋는 달에
흰 물은 솰솰……
금모래 반짝…….
청(靑)노새 몰고 가는 낭군(郎君)!
여기는 강촌(江村)
강촌(江村)에 내 몸은 홀로 사네.
말하자면, 나도 나도
늦은 봄 오늘이 다 진(盡)토록
백년처권(百年妻眷)을 울고 가네.
길쎄 저문 나는 선비,
당신은 강촌(江村)에 홀로된 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김소월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나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怜悧)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스랴.
제석산(帝釋山)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낙천(樂天)
김소월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맘을 그렇게나 먹어야지,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꽃 지고 잎 진 가지에 바람이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