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歲寒圖 외 2편
민병도
싸락눈 사각사각 먹물마저 얼어붙어 꼭두서니 깨워주던 새소린들 들렸으랴 적막에 턱을 괴고서 잠 못 드는 섬 하나
분노야 내려놓으면 달빛처럼 가벼워서 소나무 늙은 그림자 빈 초당을 기웃대고 물결도 울음을 삼켜 수평선 베고 눕는다
해는 하마 중천인데 마음 아직 캄캄하여 촛불을 켜는 대신 마른 붓을 달래는가 먼바다 건너온 바람, 먹빛 앞에 푸르다
떠나오지 않았으니 돌아갈 곳도 없어 유마경 덮어놓고 혼자 읽는 불이법문, 모슬포 저문 바다에 붉은 눈이 내린다
주) 제주도 유배 시절 꾸준히 서책을 보내준 이상적의 변함없는 마음에 감화되어 혹한의 시기에도 변함없는 송백松柏 같은 지조를 상 찬하여 그려준 작품으로 변함없는 의리와 고고한 정신을 대변하는 완당阮堂 문인화의 완결판이다.
추사체
천하의 서법, 서체 마음 창고 채워두고 벼루 열 개, 붓 천 자루 다 닳아 없앤 후에 추사체 조선의 명필, 그 이름 늠연하다
오늘 붉게 피는 꽃이 어제의 꽃 아니듯이 맑디맑은 공중에 천둥 번개 들어 있듯 하늘 뜻 톺아 읽으면 새 천 년이 가득 차
일 획이 일법이라 일생을 바친다 해도 법에 들어 못 나오면 감옥이 아니던가 지사의 충천한 기운, 법첩法帖 밖에 눈부셔
주) 우리나를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의 독특한 서체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대표적인 서법과는 확연히 달라 '법'과 '정신'과 '조형 미'가 한데 어우러진 독창성을 지닌다. 예의 법첩을 본받되 독자적인 조형감각으로 재구성한 필 획과 절제된 여백, 내면의 미학 질서로 동양 최고의 예술 서체로 평가받는다.
봉은사, 하직
먹 갈고 붓을 들어 천하를 경영해도 칼을 쥔 난봉꾼들 그 어이 맞서리오 과천 땅 과지초당瓜地草堂도 마음 편치 못하네
뚝섬 절집 봉은사, 화엄경판 모신 성전 주지 스님 내준 서실은 묵향 차향 그윽하여 서성書聖의 외로운 삭신, 생불로나 모셨네
왔으니 가야하고 쥐었으면 놓아야 하네 일편단심 그림자도 바람에 벗어주고 홀연히 나선 일주문, 적막만이 시리네
주) 서울 강남구 소재의 사찰로 지금은 조계사 말사지만 추사가 운명하기 사흘 전에 쓴 <판전> 현판으로 유명하다.
- 민병도 등단 50주년 기념 시조집 『세한歲寒의 길 』 2026. 목언예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