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우물가는 컴컴했다. 연성은 보이지 않았다. 어두움이 그녀를 삼킨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우물가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한 쪽 손에는 주머니칼과 한 쪽 주머니에는 손거울까지 준비를 해두었다. 그녀가 오늘따라 늦잠을 자는가.. 그리고 오늘따라 더 차디차게 느껴지는 공기 때문인지 민규의 볼과 입술과 어깨와 손, 무릎은 여느 때 보다 더욱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눈을 뜬 연성은 이미 아침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예전처럼 우물가로 가야 할 연성은 문득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예상대로라면 일어날 일들은, 벌써 일어나야 할 일들은 이미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깜박 잠이 들어 중간에 한번도 깨지 않고 단잠을 잔 연성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신이 세운 계획을 스스로 망칠 수가 있나. 분명 지난 새벽에 민규는 연성의 방을 다녀갔을 것이다. 쿨쿨 자고 있는 연성을 차마 깨울 수 없어 다시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쯤에서 다시 수정에 들어간다. 어쩔 수 없이.. 지금부터는 미리 생각하지 않고 부닥쳐보기로 했다. 이미 생각할 시간은 연성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얼른 나가서 큰스님을 찾아갔다. 일단 가기로 정한 시간에는 벌써 2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곳으로 가면 큰스님과 동이와 민규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서둘러 큰스님 방으로 들어서니 그곳에는 큰스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큰스님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당황한 연성은 차마 다른 이들의 행방을 물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합장을 드린 뒤 큰스님 앞으로 다가갔다. 큰스님은 비구니로서 지녀야 할 여러 가지라기에는 너무도 많은 400여 가지에 달하는 덕목을 보여주며 앞으로 몇 년은 더 교육을 받고 이수를 해야 한다는 복잡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불안감에 그렇다면 머리를 이렇게 이르게 깎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다시 한번 듣고 싶었지만 어제의 확실한 태도 때문이었는지 거기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단지 한마디면 다시 고려해보겠노라며 방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긴 이야기를 끝으로 큰스님은 가위를 연성에게 쥐어 주었다. 긴 생 머리를 자를 수 있을 만큼만 연성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연성은 최대한 아래쪽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아직 볼만할 정도의 단발만큼 잘랐다. 신문지도 깔지 않은 바닥에는 사방으로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큰스님은 연성의 손에 여전히 쥐어져 있는 가위를 빼서 연성의 뒤로 가 앉았다. 도대체 민규는 지금 달려와서 큰스님의 손에서 가위를 빼앗고 연성의 손을 잡고 이 방에서 구출해 줄 민규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연성은 너무나 경직되어 떨 수도 없고 눈물 한 방울 흐르지가 않았다. 가위의 예리한 날이 곁눈질로 반짝함을 비췄고 바닥에는 우수수수 아까보다 더 많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머리가 가볍다 못해 텅 비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멍해진 순간 드르륵 문이 열렸다. 순간 높게 처들은 머리 때문에 큰스님의 손은 잠시 멈추었다. 문을 열은 건 동이였다. 큰스님과 연성은 동시에 동이를 바라보았다. 동이는 연성을 바라보았다. 연성은 동이의 눈을 뚫어지게 눈으로 대화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쳐다보았다. 동이야.. 동이야.. 연성은 동이가 큰스님을 말리기에는 별로 효력이 없어 보여 드러누워 발작이라도 해서 자신을 이 순간으로부터 구출해주길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심정을 충분히 눈으로 실어 보냈다. 동이는 몇 초를 꼼짝 않고 서 있더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동이의 눈에는 어떤 말도 실려 있지 않았다. 큰스님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1월의 우물가가 이렇게 추운 줄은 민규는 오늘 처음 느꼈다. 여전히 오지 않는 연성을 그리며 너무 추워 흘러내리는 눈물 및 콧물을 훔치려니 벌써 얼굴에서 고드름이 되어 침을 발라가며 닦아야 했다. 아마 우물가에서 1시간은 족히 서있었을 것이다. 떨리는 몸과 떨리는 가슴으로 녹초가 되 버린 그는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느끼고 다시 바짝 긴장을 하며 손에 쥔 주머니칼을 한층 더 세게 거머쥐었다. 일부러 그쪽을 바라보지 않고 벌써 얼어버린 얼굴근육 위로 다시 한번 얼음물을 끼얹고 있었다. 벌써 5차례가 넘게 얼음물로 세수하는 중이었다. 발자국은 민규를 스치고 아래로 내려갔다. 돌아보니 동이였다. 동이야! 어디 가니, 동이야! 한참을 불렀지만 동이는 그대로 내려갔다. 아니 이 아이가 이제 귀까지 멀어 버린 건가.. 이 시간에 어디 갈 일이 없는 동이를 바라보며 민규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주머니칼을 손거울이 들어있는 반대편 주머니에 집어넣고 절을 향해 달렸다. 연성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삐죽삐죽하게 짧은 머리가 꼭 영구 같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큰스님은 은색의 바리깡을 집어들고 연성에게 다가왔다. 연성은 눈을 감았다. 민규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애타게 그를 부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제발..제발.. 탁탁탁탁 절로 뛰어 오는 성인의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동이의 타타타닥이 아닌 탁탁탁탁 좀처럼 뛰지 않는 민규의 소리였다. 소리는 큰스님의 방 앞에서 멈추었다. 큰스님의 손 또한 멈추었다. 연성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 수가 없었다. 이미 머리의 반은 민둥산이었고 반은 영구였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도 머리를 들 정도의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긴장이 풀린 연성의 눈에선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 그리고 와락 쏟아졌다. 들어오너라. 큰스님이 부르자 민규는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민규는.. 그 자리에서..그대로..주저앉았다. 어디를 다녀오느냐. 우..우물가에 다녀왔습니다. 우물가라고? 연성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우물가를 다녀올 수가 있지? 언제나처럼 우물가를 거르지 않은 이유는 일상의 우물가이니깐..? 단지 그것뿐이었나.. 민규는 연성이 중이 되고자 했던 것을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저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조금 자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나 어리석은 자신을 내비치는 것 같고 사실 이러쿵저러쿵 따지기에는 그 충격이 너무나 컸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한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가 있나. 바로 어제도 우물가에서 연성을 만났었고 말보다 진한 미소와 눈빛으로 서로를 대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그러는 동안 연성의 머리는 큰스님의 머리와 민규의 보이는 머리와 동일한 모양으로 닮아갔으며 마지막에는 한 올도 빠짐없이 모두 방바닥에 흩어졌다.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은 빗자루의 털이 뭉치로 뽑혀 선풍기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치우거라. 큰스님은 진짜 빗자루를 민규에게 건네주었다. 연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령처럼 방에서 사라졌다. 큰스님은 몇 마디 말과 함께 어디를 다녀오겠다고 했는데 민규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큰스님 방에 혼자 남은 민규는 머리카락의 한 가운데에 쭈구리고 앉아서 자신을 위한 방이라는 심한 굴욕감과 악취를 느끼며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카락들은 민규의 앉은 밑으로 불쑥불쑥 고개를 들며 삐져 나왔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민규의 앞에서 춤을 추고 스물스물 기어다니며 날아가기도 했다. 민규의 머리껍질 속의 머리카락은 그들의 유혹에 어쩔 줄을 몰라 민규의 머리껍질을 긁고 민규의 머리를 조이고 한층 더 심한 악취를 뿜어내고 있었다. 민규는 빗자루를 내던지고 주머니칼을 꺼냈다. 거울 앞에 앉았다. 빨간 눈과 빨간 얼굴과 파란 핏줄에 머리가 큰 남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눈을 너무 크게 떠 튀어나올 정도로 해서는 주머니칼을 이마의 윗부분에 갔다 대었다. 그리고 머리의 한가운데를 지나 뒤통수에서 목덜미까지 주욱 그었다. 세게 그었다. 갈라지는 머리껍질사이에서 민규는 잠시 무언가를 기다렸지만 더 깊숙한 곳에 진짜 머리껍질이 아님을 이내 인식하고 양손을 갈라진 머리껍데기의 가운데에 집어넣고 양쪽으로 서서히 벗겼다. 악취는 진동을 했고 머리의 길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카락은 구겨져서 진짜 머리껍데기 위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닥의 검은 물결과는 달리 구겨진 회색이었다. 가발을 벗어 던진 그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가발을 뒤집어쓴 것 같았지만 그것은 쥐어뜯고 잡아당겨도 벗겨지지 않는 진짜 머리껍데기와 한올한올 붙어 있는 진짜 머리카락이었다. 중이 되고자 했던 연성의 비단결 같은 고운 마음과 함께 자라난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제 이 방에서 흩뿌려진 채 그녀의 목적을 달성케 하기 위해 아름다운 희생을 하였고 그런 그녀의 맘을 모르고 음란한 눈빛으로 사랑만을 쫓아오던 그의 머리카락은 회색으로 변질된 채 그 악취에 못 견디게 만들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깎아버리게 만든 것이다. 그 머리가 어디까지 오는지는 결코 펴보지 않았다. 아까 연성의 머리를 깎아 내리던 바리깡을 찾아 이번에는 진짜 민규의 머리를 찾기 위해 한 꺼풀 또 벗기기 시작했다. 사랑과 아픔과 허영과 욕정과 모든 속세의 감정들을 변질된 회색 머리카락이 조금씩 바닥에 흩어질 때마다 조금씩 씻어 내렸다. 눈물도, 콧물도,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입에서도 물이 나왔다. 한 올도 빠짐없이 모두 방바닥에 흩어졌을 때 민규의 머리는 다시 작아졌고 가벼워 졌으며 약간 추워졌다. 바닥을 다시금 바라보니 연성과 민규의 머리카락들은 서로 얽히고 섥혀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래.. 나의 꿈을 잠시라도 이루는 것은 그래도 이 변질된 머리카락이구나. 그녀와 함께 했던 한 부분만이라도 그리고 민규와 함께 했던 한 부분이 서로 섞이어 이렇게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구나.. 민규는 이제 거울은 그만 쳐다보기로 하고 어차피 다시 돌아온 일상의 약간은 무료한 민규였지만 알 수 없는 안도감과 긴 여행을 마친 것 같이 긴장이 풀려 얼른 청소를 하고 방에 들어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에 돌아온 연성은 얼 빠진 사람처럼 거울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거울 속에서 마주 보고있는 어느 낯선 여인은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는 엉큼한 마음먹으면 안 되지. 이건 니 죄의 댓가이지.. 이제 나를 따라야 하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지. 독한 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니 맘대로 행동해. 연성은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요..단지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다시 눈을 드니 거울 속의 낯선 여인은 여전히 연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어엿한 스님에게 눈독들이면 네 머리카락 영원히 자라지 않게 할거야. 눈을 내리 깔은 연성은 무슨 말을 하려다 확 고개를 들면 말을 멈추고 또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다가 중간에 고개를 들어 말을 멈추고 노려보기를 몇 번 하다가 우스움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그 웃음은 괴로움에 가까웠다. 가까스로 일어나 다시 거울을 보니 이번에는 낯선 여인과 자신이 반반 섞여 눈과 코가 빨간 채 지나친 웃음 때문이었는지 눈물까지 범벅된 상태로 짓다 말은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것. 이번엔 거울 속의 그녀와 바깥의 그녀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날라 가고 날라 오던 목침은 중간에서 정통으로 부딪혀 거울 조각들과 함께 그리고 조각난 얼굴들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깨어진 유리파편들을 하나씩 주워가며 가끔씩 비치는 완전히 자기로 되돌아온 한 비구니를 바라보며 그 모습에 사로잡혀 어떤 경외심 마저 드는 것이었다. 그래.. 결심했어.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가 나에게 준 선물일 수도 있어. 이렇게 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던거야. 민규는 모든 머리카락을 꼼꼼히 모아 신문지에 싸서 돌돌 말았다. 이미 방은 깨끗했고 민규의 머리 또한 깨끗했고 악취는 사라졌다. 큰스님의 방을 나오는데 연성의 방에서 문이 열렸다. 연성은 깨진 거울을 담아 방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속세에서 벗어난 연성은 거울을 없애고 마음의 거울을 만들었나보구나. 합장. 연성은 민규를 바라보며 나의 어떤 행동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여전히 일상의 대범함으로 나를 제압하는구나. 닮아가야지.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