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기미년 3월 1일, 민족의 독립 운동과 한국 교회
(에9:31-32)
삼일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전 한국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일으킨 애국 애족의 운동입니다. 3.1절은 기독교 고유의 절기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이 민족을 사랑하시고 아끼셨음을 믿기에 교회가 특별히 기념하면서 기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1. 부림절
성경에서 3.1 운동과 유사한 것을 찾는다면 부림절(= 멸절 위기에 빠졌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을 들 수 있습니다. 아달월(12월) 14일은 유대 민족이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처참하게 죽게 돼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유대인들에게 승리와 구원의 날이 되었습니다. 하만은 당시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 밑에 있는 국무총리로 모르드개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절하지 않는 것을 알고, 그와 그의 민족 곧 온 유대인을 진멸하기로 하고 ‘부르’, 곧 제비를 뽑아 12월 13일 하루 동안 왕의 허락을 받아 유대인들을 도륙(屠戮, 잡을 도 죽일 륙 , 짐승을 찌어 죽이듯이 사람을 찢어 죽임))하도록 바사 제국 127도(道)에 포고령을 내렸습니다(에3:12-15).
2. 3.1 독립 운동은 왜 일어났는가?
이스라엘에 부림절이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 살아가는 한국 민족에게는 3.1 독립 운동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1919년 상해에 임시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대한 제국 방방 곡곡에 남녀가 전부 하얀 옷을 입고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민족적 독립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부림절과 같은 하나님의 주권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국제적으로는 191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민족 강화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선포됐습니다. 둘째, 국내적으로는 1919년 정월 21일 고종 황제가 서거(逝去)했습니다. 기독교 목사, 교인들과 독립 운동가들이 중심해서 대한 제국 백성들이 다 서울로 모이는 이 날을 계기로 하여, 독립 운동의 거사일로 잡은 것입니다.
3. 3.1 독립 운동과 한국 교회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 운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습니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 선언문에 서명한 분이 33명인데 그 중에 기독교인이 16명입니다.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 회담에 보내는 탄원서는 감리교 교회 목사 현순과 김지순 전도사가 맡아 안동의 김병송 목사를 통해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국내의 각국 영사관에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은 정동 교회 목사 이필주와 배재 학당 학생 김진호가 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은 일사 각오 순교 정신으로 하루에 6-70리씩 걸어서 태극기를 방방 곡곡에 전달했습니다. 3.1 운동은 기독교인의 주동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면 헌병대에 끌려가서 더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남자 140여 명, 여자 60여 명이 잡혀 왔는데 여자, 남자 다 옷 벗기고, 여자들의 온몸을 담뱃불로 지져 댔습니다. 그 만행은 눈뜨고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수원 제암리 감리 교회 -교인 30명 순교.
3.1운동 당시는 일본과 싸웠지만, 이제 우리가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는 길은 사탄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길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는 것입니다(딤후4:1-2). 복음을 전해야 이 민족이 죄에서 멀어지고 죄에서 돌이켜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