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의 창설자,이냐시오 로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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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연예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불굴의 의지인 3번째 이냐시오 편입니다.
역경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맞서 불굴의 의지로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나갔던 분들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십니다...
1500년대 유럽에는 가톨릭교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야흐로 중세 천년이 끝나가고 있었고...
중세의 낡은 교회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의 지도부는 안이하게 대처했습니다.
오히려 개혁의 요구를 외면하고 중세의 오랜 전통을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개혁정신에 불탔던 많은 개혁가들은 곳곳에서 개혁의 불씨를 놓았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수도회를 창설하거나 개혁하면서 가톨릭교회에 복음정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라토리오회의 창설자였던 필립보 네리(1515-1595),
까르멜회 개혁자였던 아빌라의 대데레사(+1582)와
십자가의 요한(+1591),
우르술라회 창설자였던 안젤라 메리치(+1540),
천주의 요한(+1550),
가롤로 보로메오(+1584),
빈첸시오(+1660) 등등이 강력한 교회개혁가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개혁가가
예수회를 창설한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일 것입니다.
독일 아오스딩수도회의 수사신부였던
마르틴루터(1483-1546)도 개혁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영웅심리가 강했습니다.
루터는 성인처럼 살기 원했지만 돋보이기를 좋아했습니다.
불행하게도 34살의 혈기왕성했던 루터는 다른 개혁가들처럼
교회 내에서 개혁하지 못하고 아예 1500년 가톨릭교회를
통째로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웠고,
이것이 저마다 너도나도 교회를 세우는 개신교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떨어져나가서 루터교를 세운 것이 1521년,
스위스의 본당신부였던 쯔빙글리가 쯔빙글리교를 세운 것이 1525년,
프랑스의 평신도 요한 칼빈이 장로교를 세운 것이 1536년,
영국의 왕 헨리8세가 성공회를 세운 것이 1533년 이었습니다.
그 후로 개신교는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로 분열되었고,
미국으로 건너와 여호와의 증인, 안식일교, 몰몬교 등으로 분열되었다가,
한국으로 건너와 통일교, JMS, 영생교 등등으로 지금도 수백개 종파로
저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면서 분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교회분열시기 독일은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였습니다.
루터와 그 추종자들은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공격하고
신부와 수도자들을 죽이고 성당과 수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수많은 신부와 수도자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개신교의 다른 종교에 대한 공격성은 태생부터 시작되었지요...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불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억울한 심정을 생각하면...
힘있는 사람들에 억눌렸던 피해자들을 위로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가톨릭교회도 루터추종자들에게 맞서면서
곳곳에서 폭행과 살인, 약탈과 방화가 난무했습니다.
급기야 루터지지자들이 일으킨 군사와 가톨릭을 지지하는
군사들간의 오랜 전쟁으로 독일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습니다.
혼란속의 가톨릭교회... 그 가장 큰 원인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던 지도부의 안일함과
루터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가의 극단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누가 그 혼란 속에서 가톨릭교회를 구할 수 있을 것인지...
프랑스 파리는 유럽의 중심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1200년에 세계최초의 종합대학이 설립된 곳도 파리와 이태리의 볼로냐였습니다.
당시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스페인출신의 몇몇 젊은이들은
가톨릭교회가 처한 혼란 앞에 의기투합하였습니다.
강한 복음정신으로 뭉친 이들이 설립한 것이 예수회였습니다.
예수회의 젊은 선각자들은 만신창이가 된 가톨릭교회에
순수한 복음정신으로 돌풍을 일으켰고 강한 개혁정신을 일깨웠던 것입니다.
그 젊은 선각자들의 리더였던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는
개혁정신으로 뭉친 투사였습니다.
스페인 귀족가문의 장교출신이었던 이냐시오는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오랜 병상생활 중에 수도생활을 할 것을 결심하고
은둔하여 깊은 영성을 쌓으면서 '영성수련'이라는 피정책자를 저술하였습니다.
이후 이냐시오는 스페인 살라만카 대학(1526-1527)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 파리 대학(1528-1535)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당시는 독일에서 루터의 교회분열 여파가 전 유럽으로 확산되던 난세였습니다.
이냐시오는 파리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베드로 파베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야고보 라이네스,
알퐁소 살메론,
시몬 로드리게스,
니콜라오 보바딜라 등 6명의 동지들은 가톨릭교회를 위해
살기로 약속하고 1534년 예수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동지들은 철저한 정신으로 무장하였고 불굴의 의지로 흔들림 없이
계획을 하나씩 실천해나가면서 교회에 놀라운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냐시오는 위대한 영성가였습니다.
그의 영성에는 '주관적인 광신'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그리스도를 확신하였습니다.
이냐시오는 루터가 말하는 교회를
'저마다 자기 양심에 따라 세우는 지극히 주관적인 교회'로 보았습니다.
이냐시오는 가톨릭교회야말로 예수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이며,
역사상 교회 내에 있는 인간들의 나약함으로 과오도 있었지만
세상 끝 날까지 정화와 쇄신을 계속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해나가야 한다고 확신하고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이냐시오는 가톨릭교회가 인간구원을 위해 행하는
활동들을 분명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였습니다:
성사와 미사,
수도서원,
성인공경,
순례,
대사,
전례,
금육과 단식,
성화상 등등의 의미를 명쾌하게 해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루터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였습니다.
루터는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써만 의화(구원)된다고 하였지만,
이냐시오는 믿음뿐만 아니라 인간의 선행도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오직 은총만으로 의화(구원)된다고 하였지만,
이냐시오는 은총뿐만 아니라 인간의 협력도 함께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오직 성서만이 하느님말씀이라고 하였지만,
이냐시오는 아무도 성서를 자기 주관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되고
예수께서 맡겨주신 교도권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라는
전통적인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보다 쉽고 명확하게 해설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아주 짧은 기간에 쉬우면서도
명쾌한 복음정신을 전파하고 신앙적 열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556년, 이냐시오가 사망했을 때 예수회는 이미 천명의 회원으로 불어났고,
1600년경에는 이미 8500명, 1600년 말에는 2만명이 되었습니다.
예수회는 엄격한 조직, 유연한 사고, 불굴의 정신으로
교회분열이후 흐트러진 가톨릭교회에 엄청난 정신을 불어넣었고,
교육과 영성과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베드로 카니시우스(1521-1597),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506-1552),
프란치스코 보르지아(+1572),
알로이시오 곤자가(1568-1591),
로베르트 벨라르미노(1542-1621) 등이 뛰어난 예수회회원들이었고,
예수회총장 머리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하느님도 모른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예수회는 특히 ‘교육과 영성, 선교’에서 빛나는 공헌을 했습니다.
그 바탕이 ‘유연한 사고와 진취성’이었습니다.
첫째가 교육이었습니다.
당시 개신교세력의 도전을 방어하면서 흐트러진 가톨릭신학을 정비하고
가톨릭정신으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대학을 설립하였고,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예수회는 지금도 전 세계에 270여개 대학을 운영하여 가톨릭정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국의 서강대학,
일본의 상지대학,
미국의 컬럼비아대학,
조지타운대학,
로마의 성서대학,
그레고리안대학,
벨기에의 루벵대학... 등, 그 가운데 독일어권 첫 대학이 바로 인스브룩대학이었습니다.
인스브룩대학은 예수회의 아성이지요.
둘째가 영성이었습니다.
당시 교회의 낡은 정신을 바로 잡는데 예수회 영성은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한 달간의 이냐시오 영성수련은 지금까지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가톨릭영성수련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회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과 진취적인 사고가 담겨있습니다.
셋째가 선교였습니다.
예수회는 가톨릭을 유럽이라는 우물에서 벗어나 전 세계로 전파시켰습니다.
영화 '밋션'이 바로 예수회선교사들의 활약을 다루고 있습니다.
세계선교는 예수회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남미전역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인도, 일본선교,
그리고 그 후계자들이었던 마태오 릿치, 아담 샬 신부님의 중국선교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예수회의 이러한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뛰어난 예수회의 정신은 예수회가 100년 만에 가톨릭교회에서
최대 규모의 수도원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고, 가톨릭교회에 큰 공헌을 하였던 것입니다.
낡고 노쇠했던 가톨릭교회와 당시 루터와 같은 교회분열자들의 도전에 교회의 앞날은 암담했습니다.
누가 또 어떻게 그 상황을 개혁할 수 있을지 우왕좌왕할 뿐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젊은 선각자들이 뭉쳐서 교육과 영성, 선교라는 세 가지 큰 틀을 잡고
불굴의 의지로 이끌고 나갈 수 있었던 것, 이것을 다만 하느님의 은총이었다고만 말할 수밖에 없겠는지요...
하느님의 은총도 끊임없는 노력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 많은 성인들이 계시지만...
이냐시오는 특히 저의 가슴을 뛰게 하는 분입니다.
명석한 두뇌, 불굴의 의지, 정확한 판단력이 이냐시오의 트랜드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냐시오와 같은 리더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대구 대교구 교구청 사목기획실장
전광진 (엘마노) 신부 드림.
’타는 불’이라는 뜻인 이냐시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헤매는 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고,
냉담한 마음속에 정열을 북돋아 주었다.
실로 이냐시오의 생애를 상징하는 표어를 말한다면
’나는 이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루가 12,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