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원묘스님(1238~1295) 공부이야기
고봉스님은 남송(南宋) 가희(嘉熙) 2년 무술년(戊戌年)인 1238에 쑤저우(蘇州) 우장현(吳江縣)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이 서(徐)씨이고, 휘(諱: 존함)는 원묘(原妙)이나, 스스로 고봉(高峰)이라 하였으나, 사람들은 고불(古佛)이라 일컬었다. 고봉원묘스님은 육조 혜능스님의 제23대손이자 임제선사의 17세 적손이다. 스님이 15세 되던 1252년에 교종(敎宗)사찰인 밀인사(密印寺)로 출가하여 16세 되던 1253년에 구족계를 받고, 18세 되던 1255년까지 천태학(天台學)를 배웠다. 하지만 늘 달마종의 종지인 불립문자(不立文子)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가르침이야말로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선지식을 찾아 행각을 한다.
20세 되던 1257년에 선종 사찰인 정자사(淨慈寺)에서 단교묘륜(斷橋妙輪)화상을 만나 교(敎)에서 선(禪)으로 공부의 행로를 바꾸게 된다. 22세 되던 해에 죽음을 각오하고 3년간의 기한을 정하여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단교화상으로부터 생종하래(生從何來) 사종하거(死從何去) 즉 ’태어날 때에는 어디에서 오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라는 화두를 받아 정진하였으나 잡생각이 많아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 훗날 고봉스님은 통앙산노화상응사서(通仰山老和尙疑嗣書)라는 책에서 “단교화상이 일러주는 공부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일 년 남짓의 세월을 마치 매일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과 같이 보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고봉스님은 3년의 기한이 임박해지자 초조해졌고 마침내 23세 되던 해 북간탑에서 주석하고 있는 설암화상(雪巖和尙)을 찾아가게 된다. 조주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아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무자화두에서도 큰 의심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따르면 두 때의 공양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늘 경행(經行)하면서 정진하였으나 혼침과 산란 때문에 한순간도 화두일념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눈치 챈 설암스님은 매일 공부의 점검을 받으러 오는 고봉스님을 향하여 아수타이사시래(阿誰拖儞死屍來) 즉 “누가 너의 송장을 끌고 왔느냐? 라고 소리치며 곧 쫒아버렸다.
24세 되던 해 설암스님은 남명사로 떠나고 고봉스님은 경산(徑山)의 쌍경사(雙徑寺)에서 한철을 지내게 되었는데, 하루는 꿈속에서 단교(斷橋)화상이 다른 학인에게 제시했던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의 화두가 홀연히 떠올랐다. 이로부터 문득 의정(疑精)이 단박에 생겨 잠자는 것도 잊고 끼니도 잊었으며 동서도 분간하지 못하였으며 밤인지 낮인지도 구별하지 못하였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할 뿐이요 털끝만치도 다른 생각이 없었다. 일부러 조금 다른 생각을 내려 하여도 낼 수가 없었다. 마치 못을 박고 아교로 붙인 것처럼 흔들어도 동하지 않았다. 비록 사람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 있어도 한 사람도 없는 것이나 같았다. 아침에서 저녁까지 저녁에서 아침까지 맑고 고요하며 우뚝하고 드높아서 순전히 맑아 티 한 점 없고 일념이 만년이라 경계도 고요하고 나도 잊었으니 마치 천치와 같고 바보와 같았다.
이렇게 일념으로 정진하던 중 6일째 되던 날 3월 22일, (이날은 달마대사의 기일이기도 하다) 대중을 따라 삼탑사에 가서 경을 독경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벽에 걸려 있던 오조법연스님의 진영(眞影:초상화)을 보게 된다. 그 진영(眞影)에 쓰여 있는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反覆元來是者漢) 즉 ‘백년 삼만 육천 일을 반복하는 것이 본디 이놈이다.’ 라는 진영(眞影)의 찬(影讚)을 보는 순간 일전에 설암화상이 다그쳤던 ‘누가 송장을 끌고 다니는가?’ 라는 화두를 깨치게 된다. 고봉스님은 나아가 다른 공안들도 차례차례 확인해 보고는 천의만의(千疑萬疑) 지시일의(只是一疑) 즉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한 가지 의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불법의 대의가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죽음의 문제와 일상사에서 자유자재하지 못한 자신을 깨닫고 다시 행각을 하며 선지식을 참방하다가, 28세 되던 1265년에 다시 설암스님을 찾아가 시봉하면서 정진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설암스님이 묻기를, "번잡하고 바쁠 때에도 주인공이 있느냐?" 라고 묻자, 고봉스님은,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설암스님은 ‘꿈속에서 주인공이 있느냐?’ 라고 물었다. 이에 ‘네! 있습니다.’ 라고 고봉스님은 다시 대답하였다. 이 말에 설암스님은 ‘잠이 깊이 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없을 때 너의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느냐?’ 라고 다시 묻는다. 이 말에 고봉스님은 어떤 대답도 못하고, 내어 보일 이치도 없었다. 이에 설암화상은 ‘너는 이제부터 불법도 배울 것 없으며, 고금도 공부할 것 없으니 다만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잠을 자되, 잠이 깨거든 정신을 가다듬고 나의 이 일각(一覺) 주인공이 필경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 것인가?,’ 라는 의심을 참구하라고 하였다.
아무리 참구해도 끝내 대답을 알지 못한 고봉스님은 의단(疑斷)을 품고 반드시 이 화두를 타파하리라는 맹세하며 29세 되던 1266년 임한에 있는 용수사(龍鬚寺)로 떠난다. 그 곳에서 5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정진을 하던 중, 어느 날 함께 잠자던 도반의 베개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순간 5년간 품고 있던 의단(疑斷)이 부서지며, 다시 살아나는 기연을 얻게 되는데 이때가 34세이다. 이때 고봉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는다.
여사주견대성(如泗州見大聖) 사주(泗州)의 대성인(大聖人)을 친견한 듯하고
원객환고향(遠客還故鄕) 떠난 객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
원래지시구시인(元來只是舊時人) 원래 다만 옛 사람일 뿐
불개구시행리처(不改舊時行履處) 옛 행리처를 바꾼 적이 없도다.
남송이 멸망하던 1279년 42세에 고봉스님은 천목산 사자암으로 거처를 옮기고, 44세 되던 해에 천목산 서쪽 봉우리인 장공동(張公洞)에 사관(死關)을 세우고 입적할 때까지 15년간 이곳에서 보림(保任)을 하며, 찾아오는 납자들을 삼관(三關) 즉 세 개의 관문을 세워 지도하였다. 50세가 되던 1287년에 설암화상이 입적하였고, 그 해 겨울 조실로 추대되어 천목산 사자선사(獅子禪寺)에서 개당보설(開堂普說)을 열었다. 조그마한 계율도 소홀이 여기지 않을 만큼 엄격했던 반면 제자들에게 자비함도 잃지 않았던 고봉은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고봉스님에게 계를 받은 이와 가르침을 청한 이가 수만 여 명이며 제자는 1백여 명에 이른다고 하며, 고려의 급암종신(及岩宗信)선사가 고봉스님의 사제라고 한다. 생전에 사자선사(獅子禪寺)와 대각사(大覺寺) 두 곳의 도량을 건립하였고 건립한 뒤에는 조옹(祖雍)화상 등 제자들에게 일체를 맡기고 관여하지 않았다. 1295년 12월 초하루 세수 58세,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 원(元)나라의 인종(仁宗)은 무오년(戊午年)인 1318년에 보명광제선사(普明廣濟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다음과 같은 임종게송(臨終偈頌)을 남겼다고 한다.
래불입사관(來不入死關) 와도 죽음의 관문을 들어온 일이 없으며
거불출사관(去不出死關) 가도 죽음의 관문을 벗어난 일이 없네.
철사찬입해(鐵蛇鑽入海) 쇠 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
당도수미산(撞倒須彌山) 수미산을 쳐 무너뜨리도다.